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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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중소상공인들의 정치세력화가 필요하다

최태욱 / 한림국제대학원대 교수


요즘 소상인들의 생존투쟁이 힘겹게, 그러나 과거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 중소기업청을 중심으로 한 정부의 대응도 (이유가 무엇이든) 과거에 비해서는 이들에게 호의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전엔 시도조차 어렵다던 소상인들의 사업조정신청도 잘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사업조정권한도 지역민심에 민감한 광역시와 도 등 지자체로 일부 이행되고 있다. 그러나 소상인 보호를 위한 현행 제도는 그 한계가 너무 명백한 것이다.
 
현행대로라면 대형유통업체와 SSM(슈퍼슈퍼마켓, 기업형슈퍼마켓) 같은 대기업 직영점은 등록제의 요건만 갖추면 어디에서든 개점할 수 있다. 단, 정부는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에 규정된 '중소기업 사업조정제도'로 중소상인을 대기업의 시장잠식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 그 조정과정은 다음과 같다. 중소상인들이 조정신청을 하면 중소기업청은 대기업에 대해 영업 일시정지 권고를 내릴 수 있다. 그후 2차까지의 자율조정 기간을 갖는다. 만일 그때까지 자율조정이 되지 않으면 중소기업청은 사업조정심의회를 열어 그 결과에 따라 사업정지 권고나 행정명령을 내릴 수 있다. 행정명령에는 대기업 진입규제, 영업시간 제한, 취급품목 제한 등이 포함된다.
    

강자와 약자 사이에 '자율조정'이 가능할까


문제는 이 조정제도의 실효성이 매우 낮다는 점이다. 몇가지 이유를 짚어보자. 첫째, 조정신청이 들어와도 중소기업청은 대형마트나 SSM의 개점 일시정지 권고를 안 내릴 수 있다. 그렇다면 조정은 개점 후 벌어진다는 것인데, 그 경우 시간이 갈수록 중소상인들의 협상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자율조정과 사업조정심의 기한은 법률로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그 기간은 몇년이고 길어질 수 있다.


둘째, 이 제도는 자율조정을 우선시하는 것인데 과연 '자유'시장에서 강자와 약자 사이에 벌어지는 '자율'조정이란 것이 얼마나 공평하고 합리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셋째, 자율조정의 실패 후에 구성되는 사업조정심의회의 위원 대다수는 중소기업청장의 추천으로 선정된다. 결국 중소기업청장을 통한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것이다. 유통산업 구조조정에 대한 정부의 의지가 확고한 이상 심의회가 중소상인을 보호하겠다고 그 의지에 반하는 결정을 내릴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동안 바로 이 조정제도하에서 대형마트가 지금의 포화상태에 이르기까지 급격히 확산돼왔다는 점을 보더라도 이 제도의 실효성이 얼마나 낮은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다만 최근의 변화, 즉 2차 자율조정기간까지의 사업조정권한을 광역시도지사에게 위임한 것이 이 제도의 실효성을 일정 정도는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약자에게 불리한 자율조정이 원칙이며, 자율조정기간 이후에는 중소기업청이 최종 권한을 행사하는 이상 (앞에서 말한 이유로 인해) 이 제도의 중소상인 보호효과는 크게 개선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대기업 시장진입, 사회통합의 관점에서 규제해야


진정 중소상인들을 보호하고자 한다면 대기업의 시장진입은 등록제가 아니라 (실질적) 허가제로 규제해야 마땅하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인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그리하고 있으며, 이웃인 일본 역시 그러하다. 지금 우리의 중소상인들은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다. 세계화의 추진이라는 명목으로 단행된 1996년의 유통시장 전면개방정책과 그와 짝을 이뤄야한다는 유통산업 대형화정책이 채택된 이래 골목가게와 재래시장은 빠른 속도로 우리 주위에서 사라지고 있다. 이미 일터를 잃었거나 앞으로 잃을 것을 우려하는 수많은 중소상인들이 갈 곳을 모른 채 불안에 싸여 있다. 게다가 이젠 SSM이라는 신종 위협이 이들을 더욱 옥죄고 있다.
 
중소상인들만이 아니다. 제조업 등 여타 산업의 중소기업들도 어려운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의 핵심 제도는 '중소기업 고유업종제'였다. 중소기업들이 주로 하는 업종에는 대기업의 진출을 어렵게 함으로써 중소상공인들의 생존을 법적으로 보호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제도는 이미 오래전에 사실상 폐지됐다. 그후 대기업들은 온갖 업종에 침투해 들어갔고, 중소기업들의 상당수는 퇴출당하거나 (하청기업이란 이름으로) 대기업에 종속됐다. 이같은 과정을 거치며 지금 우리나라 중소기업 전체가 위기에 몰려 있는 것이다.


주지하듯, (중소기업 소유자와 취업자 및 그들의 가족을 포함한) 중소기업 쎅터의 규모는 그들이 우리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할 정도로 막대하다. 우리나라 생산활동인구의 약 1/3이 자영업자이며, 정규직과 비정규직 근로자의 대다수(약 88%)도 중소기업에 취업해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이 거대한 집단이 이렇게 속절없이 무너져가고 있을까?


중소상인 보호와 유통산업 변화를 동시에

이즈음에서 일본 얘기를 좀 해보자. 거기선 중소상인들이 오히려 과하게 보호받는 것이 문제였다. 일본은 이미 1956년부터 '백화점법'을 제정하여 백화점의 신규 개점, 확장, 영업활동 등을 규제함으로써 중소상인들의 상권을 지켜줬다. 이후 백화점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대형 유통업체들이 늘어나자 1974년에는 백화점법을 '대규모 점포에 관한 법률'(통칭 '대점법')로 대체하여 사업이나 점포 종류에 관계없이 매장규모가 1500평방미터가 넘는 모든 대형점에 대하여 허가제 방식으로 규제했다. 1978년에는 대점법의 규제 대상을 500평방미터 이상의 점포들로 대폭 확대했다.


이어 1982년에는 대형점 신규 신청자는 신청 이전에 반드시 해당 지역의 (중소상인들이 주도하는) '상업활동조정위원회'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행정지침을 발효시킴으로써 중소상인들에게 실질적인 비토권을 부여했다. 이 정도 되면 사실 지나친 보호였다. 이에 특히 1980년대 말부터 일본 국내외에서 대점법의 폐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거세졌다. 중소상인집단에게 가는 과도한 렌트(진입규제 덕에 생기는 잉여이익)로 인해 일본의 고물가 구조가 지속된다는 등의 이유였다.
 
대점법 폐지 압력이 더이상은 무시하기 어려울 정도에 이르자 일본정부는 1991년 대점법을 개정하여 규제를 완화한다. 그러나 대점법 체제는 그후로도 7년을 더 간다. 그사이 중소상인들에게는 변화되는 유통산업 환경에 대처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비용이 제공된다. 말하자면 구조조정에 따른 보상의 정치경제가 적실하게 작동됐다는 것이다. 1998년에는 드디어 대점법이 폐지된다. 그러나 그 대신 대체 입법을 통해 (경제규제가 아닌 사회규제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대형점 조정을 지속함과 동시에 중소상인들의 주무대인 중심시가지 활성화대책을 별도로 마련한다. 소위 '지역활성화(街づくり) 3법'인 대점입지법·개정도시계획법·중심시가지활성화법은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일본 중소상인들과 유력정당의 파트너십
 
이같이 일본의 중소상인들은 장기간에 걸쳐 꾸준히 그리고 충분하게 보호받아왔다. 비결은 간단하다. 그들 뒤에는 일본의 최유력 정당인 자민당이 있었다. 전 수상 나까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는 자민당(정권)은 두 줄기의 등뼈로 지탱되고 있는데, 하나는 농민이고 다른 하나는 중소상공인 집단이라고 말한 바 있다. 수십년간을 장기집권해온 자민당의 최대 지지세력 중의 하나가 바로 중소상공인들이며, 따라서 자민당은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그들의 집단이익을 적극 대변해왔던 것이다. 말하자면 중소기업 쎅터와 자민당은 서로 지지표와 보호정책을 맞교환해온 셈이다.


일본 정도의 과보호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통합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구조조정의 피해집단에 대한 적절한 보호는 마땅히 제공돼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중소상공인들을 안정적으로 보호해줄 수 있는 유력정당이 필요하다. 지금으로 봐서는 (진보적 자유주의 정당으로 발전할 소지가 있는) 민주당이 적임 정당인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이 중소상공업 이익의 대변자로 나선다면 그것은 확실히 민주당의 발전에도 큰 득이 될 것이다. 민주당이 지향하는 바는 분명한 가치와 정책기조를 구비한 전국정당화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중소상공인들의 정당으로 거듭나는 것이 상책이다. 앞서 말한 대로 중소기업 쎅터의 규모는 전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할 정도로 크며, 그 구성원들은 전국 방방곡곡에 포진해 있다.

예컨대, 영남의 소상인이든 호남의 소상인이든 그들로 하여금 민주당을 지지케 하라. 지역이익보다 계급이익을 우선시할 정도로 그들을 단합시켜라. 그렇게만 된다면 그들의 (일부) 지지만으로도 민주당은 안정적인 유력정당으로 존속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소상공인들을 위한 체계적인 정책 개발은 물론 중장기적으로는 다음 두가지의 과제 수행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지역이익 넘어선 결집, 선거제도 개혁 뒤따라야

첫째, 중소상공인들이 전국적 네트워크를 가진 자발적 단일결사체를 조직하도록 도와야 한다. 관제 성격이 강한 중소기업중앙회 조직만으로는 중소상공인들의 정책 선호가 제대로 결집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많은 선진국에서 볼 수 있는 전국 노조와 노동당 혹은 사민당 간의 관계 같은 것이 한국의 중소상공인 조직과 민주당 간에 설정돼야 한다.

둘째, 선거정치에서 지역주의 변수의 중요성이 크게 감소되고 계층이나 계급 변수의 중요성이 크게 증대되도록 선거제도 개혁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중소상공인들이 지역을 넘어서는 연대를 이룰 수 있다. 그렇다면 중대선거구제의 도입 정도로는 부족하다. 전면 비례대표제의 도입이나 독일식 비례대표제 같은 비례성이 충분히 보장되는 혼합형 선거제도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요는 민주당이 앞장서 중소상공인들의 정치세력화 요건을 충족시켜가란 것이다.

2009.8.19 ⓒ 최태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