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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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민주주의여 슬퍼하라! 그리고 우리를 다시 광장에 서게 하라: 故 김대중 전 대통령 추도시

백무산 / 시인    


아, 한 시대가 가셨구나
아, 한 사람이 가셨구나

한 시대가 한 사람을 떠메고 가셨구나
한 사람이 한 시대를 떠메고 가셨구나
파란 많은 시대를
곡절 많은 시대를
피비린내 진동하던 야만의 시대를
훌훌 떠메고 가셨구나

그러나 어찌하여 사람들은 그를 보내지 못하는가
슬픔만은 아니구나, 길을 막고 눈물 흘리는구나
어찌하여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아니라고 울먹이는가

어찌된 일일까?
음악도 멎고 조명도 꺼진 무대는 어둠에 싸이고
먼지바람 이는 광장에 찢긴 종이들 흩날리는데
저기 저 가슴에 멍을 안은 사람들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데
어찌 그 불빛을 가슴에 밝히지 못하고
어찌 그 빈 무대에 뛰어들지 못하고
한숨만 쉬는가, 불빛은 흐려만 가는가

한 시대가 갔으나 다른 한 시대는 오지 않고
한 사람이 갔으나 그를 마중할 한 사람은 오지 않고
머리를 찧으며 부끄러워했으나 아직 일어서지 못하고
진실은 아직 책장 꽂혀 있고 광장은 멀리 있는데
진리는 아직 풍문으로만 떠돌 뿐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데
어찌 놓아드리나요, 어찌 잘 가시라 하나요 

저들은 과거의 신문을 찍어대고
낡은 법전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하고
매국의 역사 앞에 충성을 맹세하고
앞서간 사람들 몸 눕혀 분단을 이은 다리를 걷어내고
죽은 망령 불러내는 굿판을 벌이고 있는데
어찌 편히 쉬시라 손 흔드나요

나도 그리하였습니다
당신을 좋아하고 또 미워하였습니다
존경하고 또 원망하였습니다
우러르고 또 못마땅해하였습니다
그러나 파란의 한 시대를 건너는 일은 녹록지 않으셨지요
진창길도 함께 밟아야 했을 당신의 고뇌를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이라는 한 시대는 위대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위대함은 책으로도 업적으로도 賞으로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당신이라는 인간을 대신할 수도 그 이상일 수도 없습니다
야만과 독재와 폭력을 이겨낸 정신은 서슬 퍼런 칼날이 아니라
부드럽고 따듯한 인간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그 힘은 아무것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생애를 통해 우리는 보았습니다
성공과 허망은 한 뿌리였습니다
영광과 좌절은 같은 뿌리였습니다
그 경계에서 당신은 머뭇거리지 않고 몸을 던졌습니다
거침없이 일어나라 하였습니다
그 경계 속 허망의 깊이가 인간의 깊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오고 가는 것은 시대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사람이 몸을 던지면 시대가 됩니다
당신이 남기신 것은 업적도 이름도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사람들 가슴 가슴에 스며들어 한 시대를 이룰 것입니다
당신이 남기고 간 그 사람들이 이제 무대에 오르고 조명이 켜질 것입니다
그때서야 당신을 광장에서 마중할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에 가 계십시오
떨리는 손을 내밀겠습니다


2009.8.19 ⓒ 백무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