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나와 탈냉전세대의 자기성장법
언제부턴가 지금의 30대는 한국 진보세력의 희망적 미래를 대변하는 세대가 되었다. 최근 일련의 선거에서 일관되게 가장 진보적인 투표성향을 보인 것은 단연 30대다. 물론 일각에서는 20~40대 전체를 ‘진보세대’라고 호칭하며, 한국사회 개혁의 중추로 치켜세웠지만, 적잖은 사십대가 이미 보수화되었고 이십대는 여전히 유동적인 측면이 강하다는 점에서 삼십대의 지속적인 진보적 투표성향은 꽤나 흥미로운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의 삼십대가 희망과 진보를 대변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원래 이 세대는 ‘X세대’라는 경멸적 호칭으로 불렸다. 아무 생각 없이 대중문화와 소비문화를 지향하는 세대, 시대에 대한 고민 없는 강한 개인주의의 세대, 락까페(90년대 초반의 클럽 문화)와 노래방과 당구장만을 전전하는 세대. 80년대 중후반 학번들이 여전히 ‘예비역’ 복학생으로 대학에 남아 있던 90년대 초반, 실제 선배들은 나와 나의 동기들(93학번)을 이렇게 인식했고, 아무렇지 않게 경멸의 말을 툭툭 내뱉곤 했다. 생각 없는 놈들!
희망의 ‘진보세대’로 변한 절망의 ‘X세대’
20~40대의 진보적 정치성향에 대해 분석한 저서 『진보 세대가 지배한다』(유창오, 폴리테이아 2011)는 사십대의 진보적 성향이 가치‧문화적 요인에 의해 형성된 반면에, 이삼십대의 진보성은 계층적·경제적 원인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설명한다. 요컨대 현재 사십대의 진보성이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가치‧문화적으로 형성된 것이라면, 이삼십대의 진보적 성향은 IMF 이후 본격화된 신자유주의와 양극화를 통해 계층적·경제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상당히 타당성을 지닌다. 세계에서 두번째로 비싼 대학등록금과 청년실업의 높은 벽에서 좌절하는 이십대(88만원세대), 불안정한 일자리와 치솟는 집값 등 과도한 삶의 비용으로 인해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 삼십대(삼포세대)의 처절한 현실을 돌아보면, 이삼십대 진보성의 근원이 계층적·경제적 원인으로 형성되었다는 설명은 분명히 타당하다.
그런데 새로운 세대의 진보성에 대해 설명하는 이 두꺼운 저서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는 이삼십대만의 중요한 특징이 있다. 이는 특히 현재의 사십대와 구분되는 중요한 특징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것은 과거 X세대라는 경멸적 호칭으로 불리도록 만들었던 바로 그 ‘생각 없음’과 관련된다. 좀더 그럴싸하게 표현하자면, 과거 한반도를 좌우했던 냉전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탈냉전세대’의 자유롭고 여유로우며 상식적인 사고체계가 사십대와는 구분되는 중요한 진보성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지난 대선 준비과정에서 안철수 예비후보가 ‘상식’의 문제를 중요하게 거론했을 때, 사십대보다는 이삼십대가 훨씬 더 거부감 없이 상식이라는 개념을 수용했으리라 추측한다.
탈냉전세대의 자기성장법
나의 첫번째 단독저서 『폭격』(창비 2013)이 출간된 지 정확히 1년이 지났다. 이 책은 ‘전쟁’이 아닌 ‘평화’에 대해 성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정전 60주년인 2013년 7월 27일에 맞추어 출간했다. 그리고 지난 1년 동안 과분한 주목과 사랑을 받았다. 수십편의 리뷰가 쏟아졌고, 모 대형서점과 언론사가 공동선정한 올해의 책에 선정되기도 했으며, 김진균상이라는 과분한 학술상을 받기도 했다. 정신없이 흘러간 한해였다.
한국의 대표적 한국전쟁 연구자 중 한명인 연세대 박명림 교수는 나의 한국전쟁기 미공군 공중폭격 연구를 “사회변화의 산물”이라고 평가했다. 자신의 세대는 감히 연구주제로 고려조차 할 수 없었던 미국의 반인륜적 전쟁범죄 행위를 학문적으로 드러낸 나의 시도 자체가 놀랍다는 평가다. 실제 나는 한국전쟁기 미공군의 한국 민간인 공격양상에 대해 연구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80년대 학번 선배들로부터 “너는 반미주의자냐?” “너는 NL이냐?” 따위의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다.
아주 솔직하게 고백건대, 나는 반미주의자도 아니고, NL도 아니다. 생활태도나 사고방식으로 따지면 오히려 나는 반미보다는 친미에 훨씬 가깝다. 대학원 재학 중에는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출신 입양아들에 대한 자원봉사 과정에서 선물받은, 성조기가 가슴팍에 커다랗게 새겨진 티셔츠를 아무 거부감 없이 입고 다닐 정도였다. 대학생 시절에는 김민기의 카세트를 마르고 닳도록 듣고 있던 80년대 선배들을 흉보며, 미국에서 송출된 MTV를 통해 너바나와 펄잼과 메탈리카의 음악을 반복해서 듣던, 자유분방한 X세대의 전형과 같은 인물이었다.
그런 내가 한국현대사와 한국의 민중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모순적이게도 군생활을 통해서였다. 1995년 나는 매일 시위진압 현장에 출동해야만 하는 경찰부대에 차출되었다. 그리고 한해 300회 이상 현장으로 나가는 부대에서 수시로 한국사회의 밑바닥과 조우할 수 있었다. 비로소 나는 우리 사회의 진면목에 대해 궁금해하기 시작했고, 사회의 모순을 설명해주는 책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이 2차대전 폭격기 조종사 경험을 통해 반전사상에 스스로 눈뜬 것처럼, 나 또한 아주 사적인 경험과 독서를 통해 우리의 현대사와 대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국현대사를 전공하는 대학원생이 된 내가 한국전쟁기 미군의 공중폭격에 대해 연구한 이유는 반미주의 때문도 아니고, NL이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이 문제가 역사적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전쟁과 냉전, 현대의 북한과 미국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폭격은 매우 중요한 주제였다. 냉전세대에게 내재된 두려움과 자기검열 따위는 내게 존재하지 않았다. 프로페셔널한 역사가로서의 책무가 그 자리를 대신할 뿐이었다.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X세대가 성숙한 진보세대로 거듭나는 과정에서는 오히려 과거의 ‘생각 없음’이 적잖은 도움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냉전(반공주의), 민주화, 산업화라는 커다란 파도에 휩쓸려 살 수밖에 없던 현재의 사십대 이상 기성세대와는 달리, 이삼십대 탈냉전세대는 보다 인류보편사적 관점에서 중시되는 자유·평화·인권·생명·환경·평등 등의 가치를 매우 소중히 여긴다. 그리고 이같은 가치가 훼손될 경우 강한 거부감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곤 한다. SNS를 통해 정보가 빠르고 투명하게 소통되기 시작한 이후 이삼십대의 진보성이 더욱 강화된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즉 탈냉전세대는 이들 가치를 매우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며 성장해왔기에 당연한 것이 더이상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지 않는 상황, 혹은 그 당연한 것을 위협하는 세력 등에 이전 세대보다 더 강한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희망적 진보의 시대를 꿈꾸고 싶다
최근 새누리당 김상민 의원실이 여론조사기관에 의뢰하여 발표한 이삼십대 정치인식 조사결과는 여러모로 흥미롭다. 19세 이상 49세 이하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새누리당 호감도 조사에서 무려 응답자의 78.3%가 비호감으로 답변했고, 신뢰도 조사에서는 79.9%가 비신뢰로 응답했다. “전혀 신뢰가 가지 않는다”라는 답변도 무려 36.4%를 차지했으며, 37.1%는 새누리당을 “향후에도 지지하지 않을 정당”이라고 대답했다. 김상민 의원은 “세월호 참사 이후 민심과 다른 인사난맥상, 국회선진화법 개정 움직임” 등으로 인해 “2040으로부터 외면받고 있다”라고 평가했다(경향신문 2014년 7월 16일자 참조).
현재 20~40대는 이미 전체 유권자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앞으로 십년 후 소위 ‘세월호세대’로 불리는 지금의 십대(486세대의 아들과 딸들)가 이십대가 되고, 지금의 삼사십대가 완연한 중년이 되는 시기의 한국사회를 생각해본다. 지금의 세월호세대는 분명 자신을 버리고 도망가버린 기성세대에 대한 분노를 간직하고 있으리라 짐작한다. 그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기성세대의 지시에 더이상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현재의 486이 586이나 686으로 불리는 시대, 이미 새로운 이름을 얻기 시작한 과거의 X세대가 완연한 중년이 된 새로운 시대에 대해 상상해본다. 허황된 꿈이라고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긍정적인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김태우 /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2014.7.23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