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크리스타 볼프 『몸앓이』
상처로 쓴 책
- 크리스타 볼프 『몸앓이』, 창비 2013
지치고 피곤한데도 제대로 쉬지 못할 때면 내 몸에는 종종 열꽃이 피어난다. 몸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성을 내며 피부를 뚫고 올라오는 불청객을 나는 번번이 대책 없이 맞았다가 속절없이 떠나보낸다. 그러나 몸의 언어는 그 까닭 모를 철자를 번뜩이는 것만으로도 제 주인에게 많은 것을 직감하게 한다. 내가 모르는 무엇을 몸이 먼저 알고 반응하는 것이다. 어느새 몸의 노예가 되어버린 이 주인은 신열에 들떠 지난했던 하루를 톺아본다. 언제 어디서부터 열꽃이 피었을까 하고. 데까르뜨가 맹인이 ‘손을 통해 본다’고 하였듯이, 열꽃을 맞을 때만큼은 나는 ‘몸을 통해’ 본다.
2011년 타계한 크리스타 볼프(Christa Wolf)의 『몸앓이』(Leibhaftig, 2002, 한국어판 정미경 옮김)에서 주인공은 ‘몸’이다. 몸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소설을 쓰는 작가의 심정은 얼마나 절박했을지 감히 상상해본다. 두 독일이 공존하던 시절 동독체제에 적극 참여한 지식인으로서, 체제가 속으로 기르는 파시즘에 맞선 내부 비판자로서, 통일 이후 그 체제의 파시즘(슈타지)에 협력했다는 혐의의 희생자로서, 사회주의 이상을 가슴에 품은 채 비난의 진원지에서 살아야 했던 심적 이방인으로서. 이 모든 사회정치적 격변을 살아낸 작가가 제 삶의 문학적 결산을 몸의 심각한 발병과 투병으로 표현한 것은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작가는 슈타지 논쟁에 휘말린 뒤 크게 앓은 바 있으며, 『몸앓이』는 그후에 집필된 것이다. 문학을 자신의 내적 투쟁공간으로 삼는 볼프 특유의 서술은 이 책에서 더욱 ‘생생하게(leibhaftig)’ 체현된다.
사회주의라는 병원체의 몰락
맹장염으로 입원한 주인공은 극도로 쇠약하여 허물어진 면역체계를 뚫고 창궐한 병원체로 인해 생사를 오가다가 수술 끝에 회복된다. 병상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몸을 ‘재건’하려는 의사와 간호사들의 능숙하고 사무적인 모습과 대면한다. 예컨대 수술에 임하기 직전 담당 간호사와 사적인 대화를 나누던 주인공은 의사에게 “준비 끝났습니다. 환자와 얘기도 나눴어요”(58~59면)라고 한 간호사의 말을 듣고서야 그것이 업무의 일부였음을 깨닫는다. 그런가 하면 각자의 지위에 따른 위계질서에 맞춰 행동하는 의사들을 지켜보며 “저 사람들이 나와는 다른 땅에 살고 있다”(67면)라고 의식한다. 그들은 수술은커녕 검사과정에서부터 난항을 겪는 주인공에게 ‘협조’를 구하고, “같이 투쟁”(109면)할 것을 주문한다.
의사에게 협조하는 환자의 무기력함이란 통일 이후 서독사회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된 동독인들의 그것과 진배없어 보인다. 의사가 잘 교육받은 손으로 민첩하게 환자의 장기를 휘젓고 다니며 병의 원흉을 감추고 있는 ‘몸의 진실’에 도달하는 동안, 환자는 그 진실에 근접한 다른 장기들까지 드러내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기력은 주인공이 오후마다 의지와 상관없이 라디오를 들으며 진저리 치는 모습에서도 역력한데, 홍수 피해나 핵미사일 협상 소식 따위의 ‘정보’가 흘러드는 것을 그녀는 페스트처럼 두려워한다. 날것 그대로의 진실이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지 몸소 겪은 작가의 두려움이 고스란히 투영되는 대목이라 하겠다.
의술의 도움으로 병원체를 이겨내는 몸의 투쟁이 계속되는 동안, 과거 동료였던 우르반을 둘러싼 기억이 단속적으로 등장한다. 동독에서 주인공과 함께 예술을 통한 이상적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당 문화정책에 참여했던 그는 자신의 명예욕을 관철해 당 내부에서 입신하지만, 당에 대한 비판을 고수하다가 궁지에 몰려 실종된 뒤에 자살한 채 발견된다. 우르반이 기억으로부터 끄집어내져 변사체로 확인되기까지의 과정과 주인공이 병상에서 서서히 회복해가는 과정이 손깍지를 끼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르반의 정체는 환자의 면역체계를 쇠진시켰던 ‘몰락한 사회주의’라는 병원체이지 않을까.
불온한 것은 도려내야 하는가
한편 이야기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엉겨 있는 모양새는 ‘몸’이라는 유기적이면서도 불가사의한 덩어리를 연상시킨다. 소설은 당장의 투병과 과거의 기억, 꿈과 환각을 수시로 넘나든다. 특히 검은 피부가 매력적인 마취 전문의 코라 바흐만을 매개로 한 무의식으로의 여행은, 주인공의 몸과 감각이 아닌 뇌와 의식을 위무하며 더 근본적인 치유에 기여한다. 주인공은 코라와 함께 밤하늘을 날아 세포의 동굴과 혈관의 강줄기를 건너, 아리아인 검진이 금지된 유대인 의사에게 진료를 받는 리스베트 이모를 지나, 병원체와 항체의 전쟁터를 굽어도 보고, 살던 집 지하실에 감춰진 도청 녹음테이프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여정이 뇌와 육체를 인위적으로 분리하는 ‘마취’라는 의학적 힘을 빌었을 때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녀의 회복은 성공적인 만큼 절망적이다.
수술을 통한 몸의 치유도, 환각을 통한 의식의 치유도 모두 절망적인 와중에, 주인공은 ‘문학’에 기대어 한줌의 희망을 쟁취하는 듯 보인다. 병상에서 그녀가 유일하게 가져다달라고 부탁한 것은 괴테의 시집이다. 투병 중에는 여과되지 않은 단어들에 짓눌리고 시간감각을 잃어버려 서술도 포기했던 그녀가, 수술이 성공하고 회복되면서 대화도 많아지고 농담을 하기도 한다. 물리치료로 추스른 몸을 움직여 마침내는 창밖의 풍경에 경탄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목가적인 아름다움에 반응하고 이를 시로 옮기고픈 문학적 욕구를 회복함으로써 이제 주인공은 완전히 치유되었다. 그러나 이는 사회를 향한 뜨거운 목울대가 절개된 비더마이어(Biedermeier)적인 문학, 즉 세속의 정치를 외면하고 자연의 서정에 안주하는 허약한 문학일 따름이다. “손실을 겪으며 느끼는 고통은 전에 가졌던 희망의 크기”(167면)라면, 고통을 잘라낸 문학에는 희망도 없다. 한 여자의 회복기를 그린 이 책은 결국 크리스타 볼프라는 한 작가의 사망진단서인 셈이다. 그녀는 제 손으로 자신에게 사망선고를 내렸다. 책장을 넘기는 손이 아리다.
이은지 / 문학평론가
2014.10.1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