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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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문학의 자리를 생각한다: ‘밤의 맨 가장자리’와 ‘팔꿈치들의 간격’

정홍수

정홍수

『눈먼 자들의 국가』(문학동네 2014)에는 세월호참사에 대한 시인, 소설가 들의 발언이 실려 있다. 소설가 김애란은 ‘세월호’가 갈라버린 세상의 시간을 생각하며 말한다. “앞으로 ‘바다’를 볼 때 이제 우리 눈에는 바다 외에 다른 것도 담길 것이다. ‘가만히 있어라’는 말 속엔 영원히 그늘이 질 거다. 어떤 이는 노트에 세월이란 단어를 쓰려다 말고 시간이나 인생이란 말로 바꿀 것이다. 당분간 ‘침몰’과 ‘익사’는 은유나 상징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본 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시인 김행숙은 “아직은 어디서 날이 밝아온다고 말할 수 없는 밤입니다”라고 절망하는 밤의 시를 들려주면서도 “잃어버리면 안되는 것, 잊어버리면 안되는 것들을 찾아 어둠 속으로 파고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소설가 김연수는 『오이디푸스 왕』을 다시 읽으며 “우리의 망각과 무지와 착각으로 선출한 권력은 자신을 개조할 권한 자체가 없다. 인간은 스스로 나아져야만 하며, 역사는 스스로 나아진 인간들의 슬기와 용기에 의해서만 진보한다”라고 한다.

 

세상과 스스로를 향한 숨 막히는 질문

 

소설가 박민규는 “이것은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라고 사태의 꼴을 명확히 한 뒤, “이것은 마지막 기회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우리는 눈을 떠야 한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눈을 뜨지 않으면 끝내 눈을 감지 못할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소설가 황정은은 4월 16일 이후 “말이 부러지고 있”다면서 “말을 하든 문장을 쓰든 마침에 당도하기 어렵고 특히 술어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소설가 배명훈은 ‘우리’라는 말 자체를 지탱하고 있는 사람들의 존재에 대해 언급한 뒤,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존경받지 못하고 침묵을 강요받고 있다. 그렇게 ‘우리’가 사라져간다.”

 

시인 진은영은 이후에 전개된 사태를 예견이라도 한 듯 말한다. “그들의(세월호 유가족들의―인용자) 정당한 싸움이 ‘몹시 가여운 사람’이라는 사회적 온정주의의 선을 조금이라도 넘어가면 그들은 곧바로 시체 장사꾼으로, 혹은 불온세력으로 매도되며 사회적 폭력에 노출될 것이다. 세월호 이후의 문학은 이러한 온정주의의 금지선들, 그리고 시혜의 논리를 반동적으로 활용하는 감성정치들이 정당한 싸움을 마비시키지 못하도록, 고통받는 이들의 표상을 여러 방식으로 균열시킬 수 있어야 한다.”

 

하나같이 한두 문장의 인용으로 그칠 수 없는 숨 막히는 글들이다. 슬픔과 분노, 탄식의 한가운데서 그들은 죄책감과 무력감을 헤집고 세상과 스스로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우리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황정은은 7월 24일 세월호 유가족들이 안산에서 걸어 서울광장에 도착했을 때, 수만명의 사람들이 일어나 박수로 맞이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글을 맺는다. “그 팔꿈치들의 간격이, 그 광경이 무척 아름답다고 생각해버렸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고백해야겠다. 그 점점(點點)한 아름다움을 믿겠다. 그러니 누구든 응답하라. 이내 답신을 달라.” 황정은은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본 모양이다.

 

그런데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이겠지만, 작가가 서 있던 “밤의 맨 가장자리”라고 표현한 그곳, 그리고 “팔꿈치들의 간격”을 보며 “아름답다고 생각해버리”는 그 마음에는 문학이 세상과 감응하는 시선과 태도가 있는 것 같다. 죄스럽고 안쓰러운 위로와 애도의 몸짓, 슬픔을 견디며 그곳까지 걸어온 유족들에 대한 경의의 마음을 함께하면서도 얼마만큼은 멀찍이서 더 서성이고, 흔히는 잘 보이지 않는 더 작고 구석진 곳으로 마음을 끌고 가려는 어떤 시선과 태도 말이다. 그리고 ‘심연’과 ‘끝’, ‘바깥’을 생각하기 위해서라도 부러 찾아 발 딛고 서야 하는 ‘맨 가장자리’, ‘경계’. 당장은 “말이 부러지고” “술어가 잘 떠오르지 않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언젠가는 그 부러지고 끊어진 말들이 질문과 응답의 말들로 다시 떠오르기를 “믿겠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그래서다. 그리고 아마도 그 말들은 부러지고 끊어졌던 기억을 포함하고 있을 테다.

 

언젠가 한강 백사장에서도

 

천명관의 단편 「우이동의 봄」(『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창비 2014)에는 한국의 어떤 정치적 리서치에서도 사례로 수집되지 않았을 법한 노인의 고백이 등장한다. 호남과 김대중에 대한 편견을 평생 버리지 않았던 노인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손자와의 우이동 봄나들이에서 뜻밖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전에 대통령 뽑는 거 말이다…… 내가 실은 김대중이를 찍었느니라.
―그러셨어요?
―그래, 어차피 떨어졌으니 하나 마나 한 얘기지만,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는 선건데 까짓것 한번 찍어주지 뭐, 하는 마음으로다가 찍었다. (…) 그이도 고생 많이 했나보더라. 죽을 고비도 여러번 넘기고…… 하기사 누가 되든 세상이 쉽게 바뀌기야 하겠느냐만, 그래도 뭐 좀 다른 게 있을까, 하는 마음도 있고…… (214면)

 

소설화자인 손자는 생각한다. “그것은 그저 죽음을 앞둔 노인의 변덕이었을까? 아니면 그도 언젠가 모래사장을 가득 메운 군중 속에서 다른 세상을 꿈꿔본 적이 있었던 걸까? 나는 끝내 그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215면) 뒤늦은 시차(時差) 속에 무심하게 등장하는 한국 현대정치사의 한 장면. 그렇다면 여기에도 한강 백사장을 뜨겁게 달구었던 ‘팔꿈치들의 간격’이 있지 않았을까. 조금 늦더라도 언제든 문학은 이 작고 아름다운 간격들을 기억하면서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부러지고 끊어진 말들의 기억과 함께.

 

 

정홍수 / 문학평론가

2014.10.15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