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울음에 대하여: 「공산토월」과 작가회의 40년
한달쯤 전 상(喪)이 있었다. 생활에서는 얼마간 거리가 있었다고 해도 마지막 발인 자리에서 눈물이 나지 않는 게 당황스러웠다. 말고도 이런저런 주변의 슬픔이나 아픔에 무감해져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때가 많다. 오히려 울음은 뜻밖의 자리에서 자기연민과 손잡고 싱겁게 흘러내리곤 한다. 통제하기 힘든 영역일 테지만, 가끔 나오는 스스로의 울음에 별 신용이 가지 않는 것도 그래서다. 잘 모르겠다 싶다. 내가 나 말고 누구를 아파하나. 정말 아플 때 사람은 어떻게 하나.
소설가 이문구 선생의 「공산토월」(1973)은 울음에 관한 이야기다. 무턱대고 새벽 첫차로 상경한 ‘백제 유민’ 박용래 시인은 아침부터 고량주를 마시며 왜정 때 경원선 기차를 타고 눈 내리는 두만강 철교를 건너던 이야기를 한다. “나는…… 나는 울었다. 그냥 울었다. 두만강 눈송이를 바라보며 한없이 한없이 그냥 울었단 말여……” 이문구 선생은 이 장면을 이렇게 전한다. “어느덧 그의 양어깨에 두만강 물너울이 실리면서 두 볼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식민지시대의 두만강이 흐르고 있었다.”(『공산토월』, 문학동네 2014)
참혹했던 세월이 낳은 잊을 수 없는 울음
내게 「공산토월」은 무엇보다 역사의 횡포, 세월의 잔혹함에 대비되는 너무도 선하고 진실된 인간, 신석공의 아름답고 아픈 이야기로 깊이 각인되어 있다. 그런데 얼마 전 다시 읽으면서는 울음을 외면하고 살아야 했고,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이문구 선생 자신의 회한이 새삼 가슴을 데웠다. 기실 ‘신석공전(傳)’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이야기의 후면에는 너무도 참혹한 이문구 선생의 가족사가 있다.
선생은 전쟁이 일어났던 해 겨울, 남의 집 아이보기를 하며 눈칫밥을 얻어먹던 기억의 옆자락이나, “약관에 요절한 그 형”처럼 지나가는 문장 한편에 그 아픈 가족사를 조용히 새긴다. 물론 석공의 혼례 잔칫날 노래와 어깨춤까지 선보인 아버지의 놀라운 모습을 전하는 대목에서는 부친의 그런 파격적 행보가 “처음이며 아울러 마지막일 터임을 미루어”보아야 했던 흥분과 설렘, 앞선 불안이 선생의 그 돌 같은 언어를 조금 달뜨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쟁과 이데올로기의 참화가 휩쓸고 간 집안의 사정은 다음처럼 간략히 정리되어 있을 뿐이다. “모두들 비명에 세상을 뜨고, 어른이라곤 오로지 어머니 한분뿐이었던 우리 집도 적잖이 변모된 채 겨우 하루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 조금만 생각해보면 곳곳이 울음밭이었던 것이다. 울음을 외면하고, 울음을 밀어내지 않고는 살아낼 수 없는 세월이었다. 죽어가는 석공 옆에서 밤이면 병상을 지키고 낮이면 서울바닥을 쓸다시피 약국을 뒤졌을망정 눈시울 한번 적시지 않았던(못했던) 사정이 여기에 있을 테다. 석공은 집에서 마지막을 맞기 위해 택시에 실려 고향으로 내려간다. 악수로 영결(永訣)해야 될 순간이 온다. 「공산토월」의 마지막이다.
내가 고개를 차 안으로 디밀며 입을 열려 하자, 석공이 먼저 꺼져가는 음성으로, “잘들 사는 걸 보구 죽으야 옳을 텐디, 이대루 죽어서 미안하네…… 부디 잘들 살어……” 하며 움직여지지 않는 손으로 악수를 청했다. 나는 울었다.
「공산토월」이 발표된 것은 1973년이었다. 이 울음은 아마도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깊고 강렬한 거절과 부정의 울음이자, 가장 넓고 세심한 껴안음의 울음이 아니었나 한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이문구 선생도 석공이 먼저 떠난 곳으로 가셨다.
작가회의 40년, 그리고 희망
「공산토월」 발표 이듬해인 1974년 11월 18일 오전 10시, 서울 광화문, 지금의 교보빌딩 자리 의사회관 건물 앞에 이문구 고은 염무웅 박태순 황석영 등 30여명의 문인이 모여 ‘자유실천문인협의회 101인 선언’을 발표한다. 고은 시인이 “오늘날 우리 현실은 민족사적으로 일대 위기를 맞고 있다”라는 내용의 선언문을 낭독한 데 이어 문인들은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된 문인·지식인·종교인·학생 들의 석방,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노동관련법 개정 등을 요구하며 기습시위를 벌인다. 자유가 차압된 동토의 유신시절이었다.
이날 고은 조해일 윤흥길 박태순 이시영 이문구 송기원 등 7명의 문인이 경찰에 연행된다. 위기의 민족현실, 고통받는 민중의 삶과 함께하려는 문학인들의 비상한 결의이고 행동이었다. 민주화운동에 한 획을 그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출범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1987년 ‘민족문학작가회의’로 거듭났고, 2007년 ‘한국작가회의’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렀다. 올해가 40돌, 얼마 전 기념행사도 치렀다. 이제 ‘역사의 전당’으로 물러날 만한 때도 되었다 싶지만, 퇴행하는 민주주의, 악화되는 생존현실은 ‘작가회의’를 여전히 광화문 광장으로 불러내고 있다.
작가회의 40년을 돌아보며 후배 비평가 백지연과 나눈 대담의 자리에서 염무웅 선생이 말한 몇마디가 기억난다. “나는 우리 작가회의가 현실에서 역사로 옮겨가게 될 해방의 날을 학수고대합니다. 그날을 위해 우리가 능력껏 헌신해야 하고요. 그런 뜻에서 억지로 희망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면서 내 말을 끝내지요.”(한겨레 2014.11.23)
울음이 너무 많은 한해였다. 억지로라도 희망을 말한다는 것은 저 석공의 “부디 잘들 살어……”에 대한 최소한의 응답일 것이다.
정홍수 / 문학평론가
2014.12.3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