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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칼럼] 광복 70주년, 다시 해방의 꿈을

백낙청

백낙청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 / 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텄다.”

 

8·15 직후 부르던 「독립행진곡」의 첫머리다. 돌이켜보면 일본의 식민지통치 35년은 분단 70년의 절반에 불과했지만, 어둡고 괴롭고 치욕스러운 남의 나라 종살이였기에 해방의 환희와 감격이 그만큼 벅찼다. 그런데 70년이 지난 오늘도 이 노래가 가슴을 울리는 것은 환희의 기억이 생생해서라기보다 어둡고 괴로운 세월이 여전히 끝나지 않았고 아~아, 자유의, 자유의 종이 울리고 해방의, 해방의 깃발 날리는 날에 대한 목마름이 간절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렇더라도 1945년 8월 15일은 확실히 빛을 되찾은 광복(光復)이었다. 이를 부인하는 것은 비록 분단시대라 해도 자기 나라 이름을 걸고 운영되는 역사를 명실상부한 식민지 역사와 혼동하는 부실한 역사인식이요, 일제통치를 끝내기 위해 헌신했던 선열들에 대한 도리도 아니다.

 

유달리 어두웠던 2014년

 

다른 한편 광복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강제된 어둡고 괴로운 날들은 그것대로 직시해야 한다. 연합군의 승리는 국토의 분단을 가져왔고 온갖 혼란과 낭자한 유혈사태를 거치며 두개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곧이어 3년여에 걸친 참혹한 동족상잔의 전쟁이 뒤따랐다. 그런 뒤에도 38선과 크게 다름 없는 휴전선이 60년 넘게 존속되어 분단체제라 부름직한 현실이 굳어졌다. 내부 기득권세력과 외부 강대국들의 ‘갑질’에 취약한 사회가 남북 모두에 자리잡았고, 주민들 스스로도 ‘갑’이 되고 싶은 욕망과 기회만 닿으면 ‘갑질’을 마다않는 행태가 널리 퍼졌다. 매사를 ‘갑을관계’로 보는 습성마저 내면화된 듯하다. 이제 70년 전과는 다른 차원의, 훨씬 다면적인 해방이 절실해진 시점이다.

 

2014년은 그런 목마름이 유달리 애타는 한해였다. 특히 4월 16일의 세월호 침몰사고가 국가적 사건으로 확대되는 가운데 우리가 어떤 나라에 살고 있는지를 수많은 사람들이 깨닫게 되었다. 깨달은 것은 또 하나 있다. 국민들이 애통하고 분노하며 변화를 갈망한다고 해서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이 오늘의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이다. 세월호사건을 겪었다고 일대 전환이 당장 이루어질 사회라면 애당초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 테고, 그런 사건이 일어나는 사회라면 쉽게 전환하고 개조될 사회일 수가 없는 것이다. 실제로 끔찍한 군부대 사건들이 잇따랐고 군과 정부는 ‘우리는 갑이니까 아무렇게나 말해도 상관없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그렇다고 권력을 효과적으로 행사하는 진정한 강자의 모습을 위정자들이 보여준 것도 아니다. ‘비선실세’와 ‘문고리 3인방’의 국정농단 논란이 표상하듯이 정권의 난맥상은 실로 엽기적 수준이었다.

 

수많은 자살자가 세상을 떴고 노동현장의 안전사고도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여성들은 또다른 성격의 안전사고에 항시 노출되어 마음놓고 길거리를 걸어다닐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한창 꿈에 부풀 나이의 젊은이들이 일자리도 없고 일할 전망도 막막한 상태로 무기력해지거나, 젊은 기운을 ‘일베’ 식으로 엉뚱하게 발산하기도 했다. 과거보다 나아진 면이 있다면 ‘4대강사업’ 같은 초대형 국토파괴 작업이 없었다는 것인데, 이 또한 국고가 바닥나고 집권자가 자신의 뚜렷한 국정목표를 못 가졌다는 현실의 다른 일면이었을 뿐, 환경의식과 준법정신의 부재가 지난 정부와 전혀 달라진 바 없음은 부실하고 부정확한 4대강사업 조사보고에서도 확인된다.

 

통합진보당 해산, 정권의 꽃놀이패인가?

 

대선 2주년이 되는 12월 19일에는 헌법재판소에 의한 정당 강제해산이라는 초유의 사태마저 벌어지면서 한국 민주주의의 죽음을 선포하는 목소리가 드높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바로 87년 민주화의 값진 열매인 헌법재판소가 “민주적 법치주의 원리에도 불구하고 북한 문제와 관련해서는 헌법을 빈껍데기로 만들 수 있는 위험마저도 감수할 수 있다는 ‘무모’하고도 ‘비겁’한 결정을 ‘무책임’하게 내려버렸”기(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진보당 해산 결정문 살펴보니」, 한겨레 2014.12.22, 8면)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두고 파시즘의 복귀라고 단정한다든가 반대로 통진당 옹호가 될까 두려워 미온적인 비판에 그치는 것은 정권의 꽃놀이패에 걸려드는 일이다. 체념하거나 이제 물리적 투쟁만 남았다고 단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사태 또한 집권층으로서는 나쁘지 않다. 대중의 체념은 그들이 바라는 바이며, 물리적 투쟁이 성가시긴 해도 공권력이나 ‘재건 서북청년단’ 등의 물리력 동원에서는 자신의 우세가 확실하기 때문이다.

 

거리에 나가 싸우는 일 따위는 아예 접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상황에 따라 필요하고 적절한 방법을 선택할 일이되 상황에 대한 판단만은 정확해야 한다는 것이다. 헌재의 이번 결정도 그 양면적 성격을 두루 보아야 한다. 한편으로 그것은 무슨 희한한 묘수라기보다 분단체제 속에서 우리가 수없이 겪어온 하수농락법의 일종일 뿐이다. 1987년의 민주화는 독재를 끝장냈지만 독재의 토대가 되었던 분단체제를 허물지는 못했기에, 위에 인용한 “민주적 법치주의 원리에도 불구하고 북한 문제와 관련해서는 헌법을 빈껍데기로 만들 수 있는 위험”은 87년 이후에도 여전히 남았던 것이며, 87년체제의 민주헌법에는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면헌법’이 수반했던 것이다(졸저 『2013년체제 만들기』, 창비 2012, 제7장 「한국 민주주의와 한반도의 분단체제」 145~7면).

 

다른 한편 이번 결정의 과정에 87년체제의 남은 생명력이 작동했음을 놓쳐서도 안된다. 헌재는 87년 민주화의 성과물답게, 정당해산을 어째서 함부로 해서는 안되는지를 상세히 설파한 뒤에야 한국사회의 ‘특수성’ 때문에 그 원칙이 적용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는 이승만정권에 의한 진보당 해산과 조봉암 처형과는 엄연히 다르다. 당시의 진보당은 미군의 ‘군정명령’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행정부 처분으로 해산되었고 조봉암 재판은 날조된 증거에 입각한 그야말로 사법살인이었다.

 

굳이 이런 차이점을 밝히는 것은 역사의 큰 흐름을 바로 읽으면서 현실에 대응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8·15해방으로 먼동이 트고도 어둡고 괴로운 날들이 이어져온 게 사실이지만 줄곧 어둡기만 했던 역사는 아니다. 오늘날 어둠이 다시 짙어진 것은 6월항쟁으로 한결 밝아진 날들을 맞이했건만, 87년체제가 다음 단계로 제때에 진화하지 못함으로써 말기국면 특유의 혼란과 퇴행현상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나는 작년 말의 칼럼에서도 “지금은 유신2기도 망국전야도 아닌 시대전환기”(「사회통합,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창비주간논평 2013.12.27, http://magazine.changbi.com/?p=1609&cat=5)라고 주장했는데, 현 시기가 87년체제의 막장이자 분단체제 자체의 전환기라는 인식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구된다. 이런 고비에서 분단체제의 일익인 북녘에 대한 비판의식이 부재하고 내부적 자기쇄신 노력이 결여된 집단이라면 통합진보당이든 누구든 원칙있는 비판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변혁적 중도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리해본 그 원칙에 대한 설명은 여기서 생략한다. 관심있는 분들은 졸고 「큰 전환, 큰 적공을 위하여」, 『창작과비평』 2014년 겨울호, 제6절 ‘무엇이 변혁이며 어째서 중도인가’를 참조해주시기를.) 어쨌든 ‘종북’과 선을 긋는답시고 헌재의 행태에 결연히 항의하지 못하고 쭈뼛거리는 정치권에 흔한 행태는 과도한 흥분 못지않게 정권의 꽃놀이패에 걸려든 꼴이다.

 

말기국면의 핵심적 위기와 새로운 해방의 꿈

 

헌재도 헌재지만, 체제말기적 혼란의 핵심에는 87년 6월항쟁 최대 성과인 직선 대통령이라는 헌법기관의 위기가 있다. 2012년 대선은 국정원과 군부의 선거개입 같은 부정사례가 있긴 했지만, 87년 민주헌법의 절차에 따라 대통령이 선출되어 취임하였고 그 합헌성을 야당이나 국민 대다수가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87년체제 최고·최강의 헌법기관인 대통령이 거의 모든 여타 헌법기관의 권위와 권능을 무시하는 행태를 견지하고 있는데다가 그 때문에 정권의 통치력이 강화되기는커녕 오히려 대통령 권력 자체의 급속한 무기력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핵심적 위기요 혼란의 진원(震源)이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 본인의 민주헌정 의식이 원래 희박한 점과, 누구 말대로 집권플랜만 있었지 집권 후의 통치플랜은 없었던 준비부족 및 통치능력의 결여, 그리고 어느 누가 하더라도 발본적 전환 없이는 수습이 안되는 체제말기적 여건 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탓이다. 따라서 쉽게 개선될 현상이 아니며, 그렇다고 기득권구조의 큰 전환 없이 대통령중심제를 내각제 또는 이원집정제로 바꾸는 보수작업만으로 시정될 일도 아니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혼란이 곧 파시즘은 아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라는 노랫말이 있지만, 파시즘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것이다. 다만 파시즘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힘센 자리에 너무 많다보니 내공도 없는 파시스트 지망생들에게 난동 면허가 곳곳에서 발부되고 있을 뿐이다. 87년체제가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도 없으려니와 유신정권 같은 파시즘을 재연하기에는 분단체제의 고착기도 멀리 가버렸다. 남북대결을 새로 격화시킨다고 분단체제가 안정되기는커녕 더욱 변덕스럽고 위태로워질 따름이기 때문이다. 물론 무능한 정부의 거듭된 실정과 극심한 사회혼란에도 불구하고 민주개혁세력이 적공(積功)을 못하고 계속 밀리기만 한다면 언젠가 강력한 파시즘이 대안으로 떠오를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 당장의 괴롭고 고달픈 현실에서 이러저런 ‘체제’를 들먹이는 게 무슨 도움이 될까? 먹고살기에 바쁜 사람 아무나 붙들고 체제 논의를 벌이자는 건 물론 아니다. 우리 삶이 왜 이렇게 괴롭고 답답한지를 올바로 알아서 제대로 대응하려면 한층 체계적인 인식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사회체제는 사람이 만든 것이기에 사람이 바꿀 수 있다고들 하지만,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알아야 어떻게 바꿀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가능해진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어둠과 괴로움이 한반도의 분단과 얼마나 일상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려주는 분단체제론은 한갓 이론이 아니라 희망의 메시지일 수 있다. 물론 만악의 근원이 분단이라는 단순논리라면 전혀 가당치 않은 소리며, 오히려 통일이 안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절망의 메시지가 될 터이다. 그러나 매사를 신자유주의 탓으로 돌리고 이 범세계적인 대세와 싸우라고만 다그치는 것도 아득하고 절망스럽기는 매한가지다. 신자유주의와 낡은 군국주의 등 여러 국내외적 요인이 한반도 특유의 분단현실을 매개로 우리 삶을 옥죄는 실상을 정확히 짚어낼 때만 그 멍에를 벗어던질 길이 보이게 된다.

 

더구나 분단체제의 작동이 시기마다 다르다는 점에 유의함으로써 그때그때의 단기적 과제와 분단시대를 관통하는 과제, 나아가 분단시대 이후까지 내다보는 세계사적 과제를 식별하고 이들 사이에 상승효과를 낼 수 있다. 지금은 87년체제의 말기국면을 청산하는 일이 우선 급하다. 다만 어려운 점은, 2016년과 17년의 선거가 이 단기적 과제의 관건일 수밖에 없지만 선거중독증에 걸려 적공 없이 승리만 챙기려는 어리석음을 다시 범해서는 안되며, 반대로 야당이 하는 꼴을 보니 선거승리는 아예 물 건너갔다고 스스로 패배주의에 젖어들어서도 곤란하다는 것이다. 적공의 구체적 방안은 널리 논의되어야 하고 그것 자체가 적공의 한 과정이겠지만, 한반도의 남북 모두에 지금의 분단체제보다 나은 체제를 이룩하는 중기적 과제와 보수·진보를 떠나 너무 몰상식한 현실을 남녘에서만이라도 일단 정돈하자는 단기작업을 적절히 배합하는 성격이어야 할 것이다.

 

분단을 만악의 근원으로 볼 일은 아니라고 앞서 말했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한 온갖 ‘갑질’과 ‘갑을관계’는 분단 안된 대다수의 나라들에서도 만날 수 있는 현상이다. 빈부격차, 환경파괴, 성차별, 폭력문화 등이 모두 현존 세계체제에 공통된 문제들이다. 이걸 싸잡아서 신자유주의로 단순화하며, 분단체제의 작용을 빼놓은 채 마치 한국인들이 유달리 못나서, 또는 위정자가 유달리 사악해서 나라가 이토록 엉망이라는 듯이 생각하지 말자는 것이지, 분단이 극복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을 장기적 문제들을 인식하고 그 극복노력을 각 분야에서 지금부터 차분히 진행할 필요성은 그것대로 절실하다.

 

이런 다면적인 해방의 과제를 의식할 때 「독립행진곡」 제3절의 “유구한 오천년 조국의 역사 / 앞으로 억만년이 더욱 빛나리”라는 첫 대목은 확실히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아아, 청춘의, 청춘의 피가 끓는다”는 결말도 젊은 인구가 줄어들고 피 끓는 청춘을 만나기도 한결 어려워진 지금은 실감이 덜하다. 그러나 당시의 희망찬 열정은 여전히 감동적이다. 실제로 달라진 세월과 한결 원대하고 복잡해진 시대의 과제를 의식할수록 당면의 짙은 어둠부터 걷어냈으면 하는 우리의 목마름이 더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새해에는 다시 해방을 꿈꾸는 피 끓는 청춘을 많이 만나고 싶고 남녀노소가 해방을 위한 적공의 길에 “발맞추어 함께 나가자”고 노래하고 싶다.

 

 

백낙청 / 계간 『창작과비평』 편집인, 서울대 명예교수

2014.12.30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