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희망은 아래로부터 채워지는 것
5대 도시에 거주하는 20~34세 청년층 가운데 42%가 선호하는 미래로 ‘붕괴-새로운 시작’을 꼽았다는 설문조사가 있었다. ‘계속성장’ ‘보존사회’ ‘변형사회’ 같은 범주를 모두 눌렀다. 여기서 ‘붕괴’라는 단어가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는 차치하고 그것이 미래만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실감과 이어져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이 조사를 두고 청년층이 겪는 좌절감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극단적 성향 같은 것에 주목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다. 그들 다수가 나날이 감당하는 삶의 고단함과 막막함이야 말할 필요가 없고 그들이 다름아닌 ‘청년’이기에 그같은 삶의 속박에 남달리 예민한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조사결과가 전하는 바는 무엇보다 한국사회의 전체상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며 거기에는 ‘땜질’식 변화, 더 정확히 말해 이미 가진 것은 고스란히 보존한 채 땜질로 변화를 대신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도 담겨 있다. 붕괴에 방불한 근본적인 변화, 그런 것이 아니고는 우리 사회에 희망이 없다는 메시지다.
이제야말로 우리 삶의 균열을 돌볼 때
‘붕괴’를 말하기로 치면 올해 들어 가장 뚜렷하게 그런 조짐을 보여준 것은 한때 콘크리트라 불리던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이다. 그리고 이 콘크리트가 균열되기 시작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시점에 예상대로 익히 보아왔던 과정이 되풀이되고 있다. 집권당에 이른바 ‘비박’ 대표-원내대표 체제가 거창하게 출범하고 이들이 청와대를 향해 ‘다른 목소리’를 내겠다며 자못 엄중하게 선언한다. 이것은 바로 부서지는 저 콘크리트를 쌓은 당사자, 박대통령이 구사하던 변화 ‘코스프레’가 아닌가. ‘아무것도 바꾸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바꾸는 척’하는 이 방식은 지지율 하락이 주는 충격을 자기세력 내부의 균열로 흡수한 후 선거를 앞두고 다시 대동단결함으로써 붕괴를 피해가는 공법이다. ‘증세 없는 복지’에 대한 내부비판이 슬그머니 복지축소 논의로 넘어가는 것을 보면 그간 너무 좋은 시절을 보낸 이들 기득권세력에는 그나마 코스프레도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보다 엄중한 사실은 이제 청년층만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변화 코스프레나 땜질식 변화나 그리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실상 지지율이 콘크리트든 아니든 그건 대통령 본인이나 신경 쓸 사안이고 우리 다수에게 시급한 것은 그분이 별로 염려하지 않는 우리 공동의 삶에 깊어진 균열을 돌보는 일이다. 앞서의 설문조사에서 붕괴와 함께 묶인 새로운 시작이란 ‘더 나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겠지만 현실에서는 붕괴가 ‘더 나쁜’ 시작과 묶이지 말라는 법이 없다. 애초에 한 사회의 붕괴 자체가 결코 그 사회의 모든 사람에게 같은 정도의 붕괴일 리 없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작용하리라 믿기 쉬운 자연재해나 기후변화의 피해마저 지역과 계층과 성별에서 비롯된 사회적 차이에 따라 그 정도가 다른 것을 보면, ‘같이 망한다’는 것이야말로 언제나 불가능한 선택인 셈이다.
그러니 변화를 위해서는 ‘같이 잘해보는’ 길밖에 없다. 그런데 이때 ‘같이’가 취하는 방향이 중요하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성장을 명목으로 경쟁과 승자독식을 부추기는 황폐한 삶의 방식이 이제 비인간적일 뿐 아니라 비효율적 시대착오라는 진단에 공감하고 있다. 그런 방식이 내세운 ‘파이 키우기’나 ‘낙수효과’ 같은 수사 또한 말하는 이조차 진정성을 싣기 힘든 빈말이며 듣는 이에겐 냉소의 대상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살지 않겠다’는 기운이 좀체 응집하지 못하는 이유는 지금 이 사회에 실제로 존재하는 붕괴 직전의 위태로운 삶이 개개인의 불안을 증폭시켜 당장의 각자도생(各自圖生)을 부추기는 탓이다. 복지 이슈가 커다란 반향을 얻는 것도 그런 불안을 없애고서야 ‘같이 잘해보는’ 변화가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희망이란 위를 보며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파이를 차지한 이들이 흘려보내는 부스러기 자체가 없어졌다는 사실은 소수의 상층 기득권에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를테면 정규직 과보호 탓에 비정규직의 축소나 처우개선이 힘들다는 정권의 논리에 맞선다고 정규직 안정이 비정규직에도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지금 어떻게 설득력을 갖겠는가.
문제의 해결은 정확히 그 반대방향이어야 한다. 비정규직이 되어도 살 만할 때만 정규직의 삶이 안정될 수 있으며, 실업자가 된다 한들 버텨낼 만해야 비정규직의 삶도 개선될 수 있다. 누구든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말과 누구든 실업자가 될 수 있다는 말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현실적인 진술인지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복지에도 ‘낙수효과’란 없으며 우리의 삶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건 이런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바로 지금 어느 누구의 삶도 위태롭지 않으므로 나 또한 어떤 일이 일어나도 견딜 만하리라 확신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불안을 해소하는 궁극의 방법이며 삶의 연대가 시작되는 출발점이다.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칙이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는 칸트의 주장은 아직 낡지 않았다. 근본적인 변화란 언제나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 변화여야 하고, 언제나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변화란 가장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변화를 말한다. 그렇듯 희망이란 위를 보며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채워지는 것이다.
* 이 글은 『창작과비평』 2015년 봄호 '책머리에'의 일부입니다.
황정아 / 문학평론가,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2015.3.4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