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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파일

황승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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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라는 영화가 있다. 1989년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이 26살에 만들어 그해 깐느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영화를 본 사람은 적어도 제목을 아는 사람은 많다. 이십여년 전 하숙방 근처 비디오대여점에서 친구 녀석과 나는 제목만 믿고 이 영화를 빌렸다. 비디오테이프가 돌아가면서 살구색 속살로 화면을 가득 채운 에로영화를 보게 되리라는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앤디 맥도웰과 제임스 스페이더의 풋풋한 젊은 시절이 담긴 지루한 영화였다는 기억만 남아 있다.

 

메르스 유행이 확산되던 지난 6월 중순 중앙메르스역학조사위원회에 합류하게 됐다. 역학조사관이 작성해 제출한 역학조사서를 취합·분석하다보니 기억 속에 제목만 남아 있던 오래된 영화를 떠올리게 됐다. 유행은 시작됐고, 환자의 진술은 엇갈리며, 생존을 위해 거짓말도 피하지 않았다. 환자의 진술만으로 메르스 감염경로를 파악할 수 없는 경우가 태반이라 CCTV에 찍힌 비디오파일 분석이 필수가 됐다. 어떤 환자는 유력한 감염경로를 애써 부인하다 카드 사용내역에 근거한 폐쇄회로 화면을 보여주자 그제야 사실을 말하기 시작하기도 했다.

 

국민건강도 못 챙긴 정부, 의료수출을 꾀하려는가

 

메르스 같은 신종 감염병은 국외로부터 국내 유입을 막는 검역이 유행을 막는 첫번째 단계다. 방역 당국은 이 단계를 효과적으로 관리하지 못했다. 환자들은 무너진 의료전달체계를 따라 곧장 상급 종합병원 응급실로 이동했다. 메르스 바이러스는 응급실을 숙주 삼아 의료인과 다른 환자를 감염시키기 시작했다. 6인실에 환자, 보호자, 간병인, 내원객, 의료진까지 쉴 새 없이 드나드니 병실이 아니라 메르스를 나르는 운송수단이 됐다.

 

감염병의 유행을 막는 방역은 근대국가의 핵심 업무임에도 정부는 여전히 취약함을 드러냈다. 유언비어를 막는다면서 정보공개는 소홀했다. 화려한 첨단 의료의 그늘에는 병원 감염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무능한 보건이 숨겨져 있었다. 그 와중에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정보 당국은 해킹 프로그램으로 불법 감청을 수행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정부가 국민의 기본권인 건강은 못 챙기고 정보나 들여다봤다면 근대국가라고 부르기도 민망하다.

 

메르스 유행은 사실상 종식 선언만 앞두고 있다. 정부는 메르스 유행 당시 보건의료계를 달래기 위해 꺼냈던 정책을 대부분 거둬들였다. 예방의학계가 요구한 질병관리청의 승격 신설은 쑥 들어갔고, 병원계가 요구한 메르스 손실 보상도 미미한 수준이었다. 질병관리본부장의 차관급 격상과 병원 내 감염관리료의 소폭 인상이라는 생색으로 채워졌다.

 

신임 정진엽 보건복지부장관 내정자는 의사 출신으로 병원정보화에 많은 경험을 쌓은 인물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의료서비스는 창조경제의 새로운 동력을 제공하는 핵심 콘텐츠’(신년기자회견)라거나 ‘해외 의료수출 활성화로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집권 후반기에 의료서비스 분야의 ‘창조경제’ 실현과 의료수출 활성화 정책을 구현할 인물을 찾은 셈이다.

 

정부의 거짓말은 국가적 위험을 낳을 수 있다

 

결국 이번 인사를 통해 메르스 유행을 통해 민낯을 드러낸 부실한 국가방역체계와 왜곡된 의료전달체계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의지가 없음을 선언한 셈이다. 해결하기 어렵고 성과도 내기 어려운 개혁은 치워두고, 집권 초기부터 밀어붙인 의료서비스산업 활성화를 통한 일자리 창출 정책을 강력히 밀어붙이겠다는 포석이다. 그러나 정부의 기대와 달리, 중동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메르스 유행을 경험한 국가의 의료서비스를 환영하며 수입할 국가는 당분간 나오기 힘들 것이다.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에는 ‘거짓말은 알코올중독과 같아서 완치가 어렵다’는 대사가 나온다. 작년 세월호사고 이후나 올해 메르스 유행 이후 모두 정부 당국자의 거짓말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메르스 환자 한명의 거짓말은 역학조사를 힘들게 하고 유행을 연장시켰을 뿐이다. 그러나 책임있는 정부 당국자의 거짓말은 국민의 신뢰를 거둬들여 메르스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재난을 예비하게 된다는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황승식 / 인하의대 사회의학교실 교수

2015.8.5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