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이범준 『일본제국 VS 자이니치』
대결이 불가능했던 역사의 증인들
-이범준 『일본제국 VS 자이니치: 대결의 역사 1945~2015』
올 6월과 7월, 내가 일하는 재단에서 4주에 걸쳐 '현해탄의 경계인, 재일조선인'이란 제목의 특별강의를 진행했다. 나름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해 기획한 강의였음에도,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용어부터가 그랬다. 자이니찌(在日), 재일조선인, 재일동포, 재일교포…… 맥락을 섬세하게 고려하지 않는 언론의 표기는 논외로 하더라도 어떤 용어를 쓰는 것이 가장 적합한지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서도 견해가 나뉜다. '재일'보다는 '자이니찌'라는 표기가 차별과 소외를 표상하는 디아스포라의 속성을 잘 드러낸다는 의견(김응교)이 있는가 하면, 자이니찌는 줄임말이므로 정확하게 재일조선인이라는 명칭을 써야 하며, '조선'이라는 단어가 일본에서 좋지 않은 뜻으로 쓰인다는 것을 감안해서라도 의도적으로 정확하고 분명하게 재일조선인이라고 써야 한다는 의견(서경식)도 있다.
이렇게 의견이 분분한 것은 '자이니찌'의 탄생 배경과 연관이 있다. ‘대결의 역사 1945~2015‘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북콤마 2015)은 바로 그 시작부터 현재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당사자가 아닌 한국인이 특정 이슈가 아닌 '자이니찌'의 삶과 역사 전반을 상세히 다룬 것으로는 거의 유일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책의 제목과 내용을 감안해 '자이니찌'로 표기한다.
존재를 설명할 수 없는 이들
'자이니찌'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걸리는 단어는 이것뿐이 아니다. 그들의 언어를 가리키는 ‘조선어’ ‘한국어’ ‘우리말’도 그렇고 각자의 나라 역시 남한, 북조선, 공화국, 우리나라 등 섬세하게 가려 쓰지 않으면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하지만 이런 피로감은 아무것도 아니다. 실제로 자이니찌가 일본에서 조선적(朝鮮籍, 일본 정부가 대한민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을 보유하지 않고 일본으로 귀화하지도 않은 자이니찌에게 부여하는, 외국인 등록제도의 일환)을 유지하는 것은 실생활의 고통을 견디는 일이기 때문이다. 조선적은 무국적과 비슷한 상태이기 때문에 여권이 없고 외국에서 트러블이 생겨도 어느 나라 국민도 아니기 때문에 찾아갈 대사관조차 없다. 한국과 일본 어디에서도 존재를 설명하기 어려운 존재인 셈이다.
특히 국가, 국민, 국어라는 단어를 쓰는 나라가 전세계에서 한국과 일본, 단 두 나라뿐이며 이 두 나라가 국민과 국가와 국어를 단단히 묶어 네이션 스테이트(nation-state)를 만들었다는 것을 상기해보면 이들의 존재는 더욱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심지어 자이니찌가 발딛고 있는 3개의 나라 중 2개국이 분단과 식민이라는 굴절된 역사를 통과해왔고, 현재도 분단이 지속되고 있어서 서로 비난하는 것으로 존재를 유지함으로써 이야기가 더 복잡해지는 것은 물론이다. 물론 이 책이 보여주듯이 "그렇게 불편한데 왜 국적을 바꾸지 않느냐"고 한가한 질문을 해대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그들에게 일본 내에서도 차별받는 지역인 오끼나와에서 조선적 변호사로 활동하는 백충은 명료하게 답한다. "불편함이 많은데 왜 한국적을 받지 않느냐는 질문은 이상하다. 나는 이렇게 조선적으로 태어났고, 그 배경에는 뼈아픈 식민과 분단의 역사가 있다. 잘못된 세상이 바뀌어야지 죄 없는 내가 바뀌어야 할 일이 아니다."
기자 출신 전문 논픽션 작가인 이범준은 올해 광복 70주년을 앞두고 3년에 걸쳐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는 성실한 취재를 통해 이 책을 완성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실력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프로젝트였다고 고백한다.) 책은 서울, 평양, 토오꾜오의 3개 챕터로 구성되어 있으며 챕터별로 저자가 만난 인물(주로 자이니찌 법조인)들의 이야기를 주로 서술한 '풍경'과 취재후기처럼 배경설명을 덧붙이는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일본제국과 자이니찌의 ‘대결의 역사’라고 하지만 사실상 판정패가 이미 예정되어 있는 대결이나 마찬가지다. "아무런 소리도 흔적도 없이 사람을 배제하는 사회에서 말라죽지 않고 살아나는 그들의 삶을 그대로 기록하겠다"는 저자의 주장처럼, 책에는 자이니찌의 뿌리와 현황, 자이니찌로 살아가는 이들의 현재, 조선학교의 실체, 조선학교를 괴롭히는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의 실상까지 상세히 담겨 있다.
영화 「암살」을 보면서도 느꼈지만 일제 식민지시대, 남북한 정부 수립의 역사는 우리에게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생기기도 전에 일본으로 건너가 살게 된 사람들에게 '왜 한국 사람이 한국말을 못하느냐'고 비난하는 것은 옳은가? 게다가 자이니찌라는 이유만으로 2등 시민 취급하는 것도 모자라 “조선 출신의 일본사회 구성원이 아니라, 식민지 역사를 드러내지 않는 일본인이기를 바라는 것”을 요구하는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이들은 심지어 이름조차 본명(민족 이름)과 통명(일본 이름) 두가지를 가지고 있다.
우리 역사가 만들어낸 그들의 슬픈 시선
서경식 교수는 "국가의 국민을 그만두는 것은 국민이 되는 것보다도 어렵다. 더 어려운 것은 그 어느 나라의 국민도 되지 않는 것, 즉 항상 난민으로 사는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 역사가 없었다면 자이니찌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이니찌는 휴전국가이자 분단국가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표현하는 또다른 현재진행형 단어인 셈이다. 한국 정부는 항상 난민으로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힘이 되어주지는 못할망정 조선적의 입국 자체를 막는 후진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너무 쉽게 비난하고, 공동체로서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집단인 '재일 한인'을 만들어낸다. "내가 일본어를 지금보다 훨씬 잘하게 되어도 수만명 일본 변호사와 같은 수준이 되는 것에 불과하다. 대신 나는 완벽한 한국어를 한다. 일본 변호사 가운데 나처럼 말하는 사람은 없다. 일본에서 내가 인정받는 길은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달라지는 것이다"라는, 책에서 소개된 한 변호사의 말에 희망이 있다.
자이니찌는 완벽한 일본인도, 완벽한 한국인도, 완벽한 북조선인도 되기 어렵지만, 그렇기에 그 세 국가의 경계에서 누구보다 예리하게 리얼리티를 훨씬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이 '슬픈 시선의 정확성'을 우리는 너무 외면하고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식민지배와 분단의 역사를 되짚고 성찰하며 사유하지 않고서는 자이니찌의 슬픈 시선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살아온 이들이 최소한의 법적 권리만큼이라도 동등하게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하는 일은 결국 우리의 몫이다.
정지은 / 문화평론가
2015.8.26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