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부산대 교수의 죽음에 대한 서울대 교수의 연대 책임
지난 8월 17일 부산대학교 본관에서 이 대학 국문과 고현철 교수가 총장 직선제 폐지 추진에 항의하며 투신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그는 옥상에서 유인물로 뿌린 유서에서 민주주의가 흔들리는 엄중한 현실에 무뎌진 대학교수들의 실상을 비판하면서 “희생을 마다치 않은 지난날 민주화 투쟁의 방식이 충격요법으로 더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그 희생이 필요하다면 감당하겠다”라고 썼다. 고교수의 죽음 앞에 부산대 총장은 즉시 직선제 폐지 결정을 철회하며 사퇴했다. 곧이어 대학당국은 회장이 단식농성 중이던 교수회와 직선제를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왜 이처럼 쉬운 일이 50대 중진 교수의 목숨을 요구했단 말인가.
대학의 공공성과 자율성은 어디로
총장 직선제는 1987년 6월항쟁 덕분에 도입된 대학 민주주의의 상징이다. 어떤 제도도 완벽하지 않듯이 직선제도 폐해와 부작용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개선책을 모색할 이유일 따름이지 대학 구성원의 의사를 외면하고 직선제 폐지를 강요할 명분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이명박정권은 ‘대학 선진화’를 내세우며 직선제를 고수하는 대학에 재정지원을 끊는 등 부당한 압박과 간섭을 일삼았다. 결국 대학들은 현실론을 앞세우며 하나하나 백기를 들었다.
총장 직선제는 정말 대학의 발전을 가로막는 제도일까? 직선제 폐지론의 시각은, 직선제 총장은 표를 던져준 교수들 눈치를 보느라고 개혁에 나서지 못하며 그들의 기득권을 지켜주는 데 급급하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라면 유신과 5공 시절에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국론분열을 피하기 위해 대통령을 국민의 뜻을 묻지 않고 체육관에서 간선제로 뽑아야 한다던 궤변과 뭐가 다른가.
6월항쟁 직후 대학에 교수협의회가 부활하고 대학노조가 설립되는 등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한때 교수, 학생, 직원을 대학의 세 주체라고 불렀다. 나는 이 낯선 표현에 동의하기 어려웠고, 지금도 그렇다. 직원은 대학운영에 참여할 권리가 있지만 연구와 교육 활동을 지원하는 역할이라는 점에서, 학생 또한 발언하고 참여할 권리가 있지만 그가 배우는 입장이고 졸업하면 학교를 떠난다는 점에서 아무래도 주체라는 명칭은 어폐가 있다. 그렇다면 교수에게 어울리는 명칭은 무엇인가?
대학의 주인은 그 사회 전체이며 국민이다. 결코 특정 정권이나 교육부, 이사회를 장악한 사학 소유주나 특정 기업이 주인일 수 없다. 학문과 교육을 통해 공동체의 미래에 복무해야 할 대학의 공공성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공공성이 국공립 아닌 사립대학도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을 받는 근거이며, 대학이 당장의 정치적 필요나 목전의 수익에 휘둘리지 않도록 하는 자율성과 동전의 양면이기도 하다.
교수에게도 주인이나 주체의 이름을 붙이기 곤란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교수는 주인은 아니지만 대학의 공공성과 자율성을 지키는 ‘주역’이다. 작금의 직선제 폐지는 대학의 주역인 교수집단을 무력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주인인 국민을 섬기지 못하게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압축해 보여주었다.
서울대 법인화로 예견되었던 비정상적 대학 운영
나는 부산대에서 벌어진 비극에 서울대학교의 책임이 크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게 무슨 엉뚱한 얘기인가 할지 모르지만, 교수집단을 조역이나 객체로 전락시키는 일에 2010년 12월 날치기로 법을 통과시켜 강행된 서울대 법인화는 크나큰 역할을 했다. 알고 지내던 어느 국립대의 보직교수 한분이 서울대가 법인화된 얼마 후 마주친 자리에서 내게 가벼운 면박을 준 적이 있다. 서울대가 법인화로 국립대학에서 빠져나간 탓에 교육부와 국립대학 간에 이견이 생길 때마다 힘의 균형이 깨졌음을 실감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그만큼 서울대는 국립대학의 맏형으로서 자기 역할이 있었다.
서울대 교수는 서울대만이 아니라 한국 대학 전체를 위해 비중있는 역할을 부여받아왔다. 그러나 법인화 과정에서 그런 위상은 망각되었고, 서울대 교수들은 오늘의 한국 대학이 겪는 시련을 외면했다. 이주호 당시 교육부 장관이 국립대학을 모두 법인화하려다가 원하는 국립대학부터 법인화를 하겠다고 선회하자, 일부 힘있는 교수들 입에서 다른 국립대학보다 선수를 쳐야 재정지원을 선점할 수 있다는 부끄러운 말이 나오기도 했다. 또 2011년 봄에는 법인화를 원점에서 재검토하라는 성명서에 전체 교수의 10%에도 못 미치는 151명만이 서명했다. 그럼으로써 수많은 학생들이 법인화에 반대하여 대학본부를 28일간 점거한 초유의 투쟁이 고립되어 실패하는 과정에 일조하고 말았다.
법인화의 명분은 대학 자율성의 강화와 재정자립이었다. 그러나 법인화 이후 서울대는 정권과 교육부의 입김에 더욱 취약해져 자율성은 흔들리고 재정자립은 빈말이 되었다. 단적인 예로, 정부가 서울대를 공공기관으로 지정하려는 움직임마저 있었다. 만약 서울대를 한국가스안전공사나 한국투자공사와 동렬에 놓고 매년 경영평가에 따라 예산지급을 차등화하고 구성원의 급여가 오르내린다면 과연 연구와 교육의 질이 나아질까. 세계 유수의 대학 중에 이런 식의 근시안적 평가를 받는 경우가 과연 있는가. 대학의 사회적 책무라는 명분 아래 자율성은 짓밟히고, 서울대는 해마다 예산확보를 위해 정부와 국회를 상대로 치열한 로비를 해야 하는 신세가 되고 있다.
법인화 이후 서울대의 최고 의결기구는 신설된 이사회이다. 총 15명의 이사 중 8명이 서울대의 사회적 책무성을 높인다는 구실로 외부인사로 구성된다. 총장과 2명의 부총장, 상근감사를 제외한 11명의 이사는 회의참석 외에 별다른 임무가 없다. 15명의 이사 중 하루종일 학교일을 고민할 상근 이사는 서넛뿐이고, 절반이 넘는 이사는 학교발전에 크게 기여한 이력도 없고 내부사정에도 어두운 외부인사이다. 이런 조건에서는 소수에게 힘이 집중되어 민주적 대학운영과 멀어질 가능성이 높다. 특히 중요한 안건에서 당연직 이사인 기획재정부와 교육부 차관이 어떤 힘을 발휘할지 뻔하다. 이사 선출방식도 폐쇄적이어서 대학의 중대사가 교수진의 여론과 요구를 무시하고 결정될 구조이다.
이런 우려는 간선제 형식을 취한 작년 2014년의 총장 선출과정에서 이미 입증되었다. 어렵사리 직선제 성격을 가미한 교직원 정책평가에서 1등을 했고 (규정상 이사회가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총장추천위원회의 최종후보 추천에서도 1위를 한 후보가 있었다. 그러나 이사회는 다른 후보를 토론 한마디 없이 무기명 비밀투표로 뽑았고 그런 선택의 사유도 끝내 밝히지 않았다. 정부가 고등교육법을 개정하여 국립대학법인도 국립학교라는 면피용 문구를 삽입했지만, 현재의 서울대는 국립대학의 관료적 규제와 부패사학의 나쁜 점만 골라 모은 형국이 되고 있다. 서울대의 교수 위상이 이 꼴이니 다른 대학에 미치는 악영향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경북대, 한국방송통신대, 공주대가 올린 총장 후보자에 대해 교육부가 총장 임용 제청을 거부하면서 사유조차 밝히지 않고 있는 탈법적 사태는 두드러지게 치욕적인 사례이다.
전국의 대학교수들이 연대해야
대학의 민주주의가 마비되어 그 주역인 교수를 배제하면 자연히 대학의 공공성과 자율성은 무너지게 된다. 나아가, 총장 직선제가 상징하는 대학 민주주의는 우리 사회 민주질서의 시금석이기도 하다. 그래서 고현철 교수는 유서에 “대학의 민주화는 진정한 민주주의 수호의 최후의 보루”라고 적었던 것이다. 이제 서울대를 비롯한 전국의 교수들은 자신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남다른 연대의 노력을 해야 한다. 정말 대학의 주역으로 대접받으려면 정치권력과 관료, 학교를 장악한 기업과 사학 소유주가 진리탐구의 큰길을 가로막지 못하게 해야 한다. 사랑하는 제자, 미래를 책임질 푸르른 청춘이 권력과 자본의 횡포에 상처입고 좌절과 낙담 속에 방황하지 않게 해야 한다.
숱한 어려움을 버텨낸 부산대 교수회에 경의를 표하며, 다시 고인의 영전에 깊이 고개 숙여 명복을 빈다.
김명환 / 서울대 영문과 교수
2015.8.26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