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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전쟁의 정치’와 8.25 남북합의의 역설

이승환

이승환

극적으로 고조되었던 한반도의 군사위기는 남북 고위급 긴급회담과 ‘8.25 남북합의’에 의해 일단 수습되었다. 국내외의 보수와 진보 일각에서는 8.25합의 내용을 두고 각각 ‘이게 무슨 사과냐’며 비난 혹은 조롱을 퍼붓고 있지만, 그러한 상황 자체가 이번 합의 내용에서 남북이 서로 타협하여 어느정도 균형을 맞춘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균형은 남북이 각기 자신에게 유리한 해석을 할 수 있는 여지와 공간을 남겼다. 8.25합의 이후 우리 정부는 “확고한 도발불용 원칙과 의연한 자세로 협상을 진행하여 지뢰 도발에 대한 북한의 사과 및 재발방지를 위한 실효적 조치를 확보”했다고 평가하고 있으며, 북은 “남조선 당국은 근거 없는 사건을 만들어 가지고 (…) 상대측을 자극하는 행동을 벌이는 경우 (…) 있어서는 안될 군사적 충돌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는 심각한 교훈을 찾게 됐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남북 각각의 국내정치용 수사가 담겨 있는 이런 주장들을 이유로 8.25합의 자체를 깎아내릴 일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지난 29일 주요 합의사항의 하나인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적십자 접촉이 남북 사이에 합의된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그러나 8.25합의에는 합의 자체의 성격, 합의에 이르는 과정 등 여러 각도에서 검토해야 할 문제가 많다. 특히 남에서는 이 합의를 ‘원칙 있는 대북정책이 거둔 성과’라는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기 때문에, 이 합의가 향후 남북관계와 국내정치에 미치는 영향을 비롯해서 향후 어떤 방향에서 후속조치가 이루어져야 할지에 대해 정부 홍보를 넘어서는 진지한 검토가 요구된다.

 

‘전쟁의 정치’

 

가장 먼저 검토해야 할 문제는 8.25합의 자체의 성격이다. 이 합의의 2항은 지뢰사건에 대한 북측의 유감표명이며, 이는 남북이 서로 타협한 균형점이다. 이를 제외하면 8.25합의의 핵심은 남의 확성기방송 중단과 북의 준전시태세 해제를 맞바꾼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산가족 상봉이나 민간교류는 현재의 남북관계 상황으로 보아 당국관계의 진전 정도에 따라 그 성격과 규모가 변화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8.25합의는 남북이 서로 긴급하게 처리해야 할 사안만 서로 교환하고 남북관계 발전과 관련된 나머지 문제들은 모두 8.25합의의 제1항 ‘여러 분야의 당국 간 대화와 협상’에 내맡긴 ‘긴급합의’라 보는 것이 정확하다. 이는 8.25합의 자체가 남북관계의 기준이나 지침이 되는 것이 아니며, ‘8.25합의에도 불구하고’ 향후의 남북관계는 당국 간 회담이 어떤 내용을 생산해내는가에 전적으로 달려 있음을 의미한다.

 

합의가 이루어진 과정에 대한 검토도 매우 중요하다. 이번 합의는 북 지도자를 비난하는 대북심리전, 즉 확성기방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북한이 포격에서 준전시상태 선언에 이르기까지 군사적 위협 강도를 높이면서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이는 8.25합의가 ‘대화의 정치’ ‘평화의 정치’가 아니라 ‘전쟁의 정치’의 산물임을 의미한다.

 

문제는 이러한 ‘전쟁의 정치’가 북한의 전유물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번의 군사위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우리 정부가 계속 강조해왔던 것은 이른바 ‘도발-긴장 고조-대화 제의’의 전형적인 북한식 패턴의 악순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간의 남북관계 상황을 보면 정부의 이런 주장은 현실과 큰 거리가 있다. 최근에는 우리 정부의 남북대화 촉구에 북한이 ‘대결앙심을 감추기 위한 사기극’이라며 거부해왔지만, 작년초 북한이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잠정 중단하면 올해 안에 한반도에서 많은 일들을 해결하는 게 가능하다”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대화를 제의했을 때 우리 정부는 이를 외면하고 오히려 한미합동군사훈련 규모 확대와 한·미·일 삼각군사동맹 강화 등 대북군사압박을 더욱 강화하는 조치로 응답하였다. 이번 군사위기 전개과정에서도 정부는 전군 최고경계태세 지시와 전투기 동원 무력시위, B-52전략폭격기 출동 검토 등 강력한 군사적 대응으로 일관했다.

 

즉 이번 군사위기는 일방의 도발의 결과가 아니라 위협의 상호작용 속에서 증폭된 것이며, 또한 우리 정부가 군사적 압박을 강화하여 북한으로 하여금 우리 정부가 원하는 ‘지뢰도발 사과’와 ‘이산가족 상봉’ 등을 다루는 의제의 대화공간으로 나오게 만든 성격도 함께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결국 8.25합의는 한반도 군사위기를 중단시킨 합의 자체의 의미와 별개로, 남북 모두 ‘전쟁의 정치’를 동원하여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추구한 것이라는 점에서 향후 남북관계와 국내정치 모두에 적지 않는 부담을 남기고 있다.

 

8.25합의의 불편한 역설

 

전쟁의 정치란 ‘군사력을 동원해서 위기를 고조시키고 이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어내는 것’인데, 사실 이는 냉전시대 분단체제의 전형적인 작동방식이었다. 위기가 고조되어야 대화가 이루어지고, 협상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상호신뢰를 구축하기 어렵고, “그러니 대화는 쉽게 중단되고 어쩌다 유의미한 합의가 나와도 끊임없이 그 실행을 둘러싸고 갈등이 재연”되는 냉전시대의 이 “이상한 공식”(홍석률 『분단의 히스테리』, 창비 2012)은 작년초의 남북고위급회담에서도 이미 재현되었다. 당시 남북 사이에서 ‘상호 비방·중상 금지와 이산가족 상봉’ 합의가 이루어지고 다시 무산된 과정은 이런 ‘이상한 공식’의 전형에 속한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전쟁의 정치’가 국내정치적 고려와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부가 이번 군사위기에서 ‘전쟁의 정치’를 동원한 핵심 이유의 하나는 두말할 것도 없이 국내정치적 고려였다. 국내정치적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북한의 사과라 할 수 있는데, 정부가 사과 문제에 집중했다는 것은 “사과 부분과 확성기 문제가 협상의 핵심”이었다는 통일부장관의 국회 보고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박근혜 대통령이 김관진 국가안보실장 등 회담팀에게 두번이나 철수를 지시한 것도 바로 이 사과 문제 때문이었다.

 

그리고 정부는 합의가 이루어지자 재발방지 문제보다는 오히려 이번 합의가 ‘북한이 갑이 되는 일방적 남북관계’의 잘못된 관행을 종식하는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성과 홍보에만 주력하고 있으며, 대화국면 전개과정에서는 청와대가 나서서 통일부의 남북대화 주도에 제동을 걸고 있다. 전문부서가 아닌 “청와대가 나서면 정치적 고려에 의해 휘둘릴 수밖에 없다”(장용석, 한국일보 2015.8.28)는 지적처럼, 남북관계에서 통일부를 무력화시켜가면서 진행되는 청와대 주도의 본질은 국내정치에 대한 고려일 수밖에 없다.

 

청와대에 의한 남북관계의 국내정치화가 ‘전쟁의 정치’와 결합되면 심각한 정치의 왜곡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전쟁의 정치’와 그 언어가 갖는 선동성은 ‘평화의 정치’와 관련된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될 것이며, 힘의 우위와 군사적 압박이 주는 달콤함은 군사주의에 대한 모든 제동을 무장해제 시키게 될 것이다.

 

‘전쟁의 정치’가 만들어낸 8.25합의는 아직은 ‘유리그릇과 같은’ 합의이며, 남북의 군사주의를 더 부추길 수 있는 역설의 합의이다. 북의 지도자는 이번 합의가 “자위적 핵 억제력을 중추로 하는 무진막강한 군력과 일심단결된 천만 대오가 있기에 이룩될 수 있었다”며 “국가방위를 위한 군사력 강화에 최우선적인 힘을 넣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반면 국방부는 8.25합의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심리전, 정보 우위, 정밀타격 능력과 함께 핵무기 사용 징후시 그 승인권자를 사전에 제거하는” 이른바 ‘참수작전’과 선제타격을 골자로 하는 ‘작전계획 5015’에 한·미가 서명했다고 발표하였다. 북은 한미의 작계5015에 대해 이미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것이 군사위기를 해소한 ‘8.25합의’의 ‘불편한’ 역설이다.

 

 

이승환 / 시민평화포럼 공동대표

2015.9.2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