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박태균의 이슈 한국사』
영화 『암살』 『국제시장』 『변호인』의 세가지 공통점은?
-『박태균의 이슈 한국사』를 읽고
최근 3년 동안 개봉한 영화 『암살』(2015) 『국제시장』(2014) 『변호인』(2013)의 세가지 공통점을 꼽아본다면? (힌트: 1.누적 관객수 2.논쟁 3.조연)
먼저 세 영화는 모두 천만 이상의 관객몰이에 성공했다. 심지어 역대 영화 누적 관객수 10위권 내에 올라 있는 대 흥행작들이다. 한국 인구가 5천만명 정도니까 단순 계산하면 적어도 다섯명 중 한명 꼴로 이 세 영화를 최근 3년 내에 모두 봤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영화들이 한국인에게 어떤 울림을 던졌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그 울림의 진원은 어디일까?
흥미롭게도 세 영화는 모두 한국 근현대사를 다루었다. 『변호인』은 1980년대 전두환정권 시기 ‘부림사건’을, 『국제시장』은 한국전쟁부터 베트남전쟁, 1980년대까지 주요 현대사를 다루었으며, 『암살』은 일제 식민지 시기 무장독립투쟁과 정부수립 직후 설치된 반민족특별조사위원회 등을 핵심 줄거리로 삼았다. 천만 이상이며 누적 관객수 순위 10위 이내인 이 최근 세 영화가 모두 근현대사를 다루었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 다른 국가와 비교를 해봐야겠지만, 크게 흥행한 영화의 상당수가 자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경우는 한국처럼 흔치 않으리라 생각한다.
2. 논쟁
더 흥미로운 공통점은 세 영화 모두 ‘정치적’ 논쟁에 휩싸였다는 사실이다. 정치권과 언론 등은 각 흥행작의 ‘색깔’이 무엇인지 판독하려고 하거나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유리한 쪽으로 영화를 해석하려고 애썼다. 이는 한국현대사의 주요 이슈인 독립운동과 친일,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경제발전, 민주화운동 등이 여전히 각자의 입장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거나 현재의 정치적 입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방증이다. 물론 한국현대사 연구가 아직도 밝혀내지 못한 사실이 많고 입장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는 여지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영화를 둘러싼 논쟁은 한국현대사 연구가 1980년대 이후 본격화한 이래 30여년 동안 상당한 연구성과가 축적되고 학계에서 어느정도 정리된 논쟁이더라도 이것이 연구 영역을 넘어 대중적으로 소개되지 못한 때문이기도 하다. 팩트가 연구를 통해 이미 밝혀졌음에도 그 팩트를 체크해서 대중적으로 널리 알리는, 연구자와 대중을 연결해주는 고리가 매우 약한 게 한국현대사를 둘러싼 생산과 소비의 현주소다.
한국현대사에 대한 대중적 수요는 높지만 그것을 제대로 충족시켜줄 연구자는 태부족인 척박한 현실에서, 1차 사료에 기반한 학문적 연구에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지속적으로 대중서[『한국전쟁』(2005) 『사건으로 읽는 대한민국』(2013) 『베트남전쟁』(2015) 등]를 꾸준히 써온 박태균은 한국현대사 연구자 중에서 매우 이례적이라 할 만하다. 특히 최근 발간된 『박태균의 이슈 한국사』(창비 2015)는 일련의 대중서 작업의 연장선에 있는 책이지만 라디오에서 이미 대중과 만났던 내용을 다시 책으로 엮었기 때문인지 지금-여기에서 가장 뜨거운 한국현대사의 주요 논쟁들을 다루었을 뿐 아니라 현재 학문적 연구에 기반하여 무엇이 문제의 지점인지 명확히 제시한다. 따라서 이 책을 읽다보면 세 영화를 둘러싸고 뜨거웠던 한국현대사의 논쟁점들을 상당부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한국현대사가 논쟁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1945년 해방 이후 한국의 역사가 그야말로 ‘글로벌’했기 때문이다. 해방과 분단, 정부수립과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 수많은 굵직한 현대사의 사건에 관여한 국가들이 많았고, 각 국가 내의 다양한 행위자들이 또 존재했다. 따라서 각 행위자의 행동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공개되고 동시에 이들이 가지는 당시의 역할과 위상이 정리될 때에야 여러 논쟁점들이 그런대로 해명될 수 있다.
저자는 한국현대사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쳐온 한미관계를 중심으로 연구를 해온 만큼 이 책에서도 한국현대사에 놓인 국제관계와 정치·외교의 구조와 성격을 잘 드러내준다. 특히 이슈를 중심으로 한 책의 콘셉트에 걸맞게 어떤 문제가 이후 어떻게 전개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는지 통사적으로 연결함으로써 시야를 넓혀줄 뿐 아니라 저자 나름의 역사적 성찰까지 던져준다. 예를 들어 1965년 체결된 한일협정은 해방 이후부터 변화해온 한·미·일 관계의 연장선이며 이후 한일관계의 문제의 출발점임을 지적한다. 나아가 한일관계가 이후 어떻게 굴곡을 겪었는지를 살펴보면서 올바른 해결책으로서 김대중정부의 ‘신한일관계 선언’(1998)을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3. 조연
연구자들은 익히 알고 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알기 쉽게 정리한 것은 이 책의 큰 장점이다. 그러나 내게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 부분은 근현대사 전체를 통으로 설명하는 저자의 시야다. 다만 욕심일 수도 있지만 이 시야에서 다루어지지 못한 한국현대사 속 ‘조연’들의 이야기까지 담겼다면 어땠을까. 다시 앞서 제시한 세 영화의 공통점으로 돌아가보자. 세 영화에 모두 출연한 조연배우가 있다. 바로 오달수. 『변호인』에서는 송우석(송강호 역) 변호사 사무실의 사무장이자 가족과 자신의 이익에 충실한 인물로서, 송우석이 대기업의 스카우트 제안을 뿌리치고 국밥집 아들의 재판 변호인으로 나서는 것을 말렸다. 그는 또한 『국제시장』에서는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친구 덕수(황정민 역)와 달리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인물이었고, 『암살』에서는 청부살인업자 하와이 피스톨(하정우 역)을 모시는 이로서 대한독립보다 돈벌이와 신분관계에 충실해 ‘도련님’을 보호하려는 인물이었다.
한국현대사를 움직여온 사람들은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가장(家長), 민주화운동가 같 은 주인공만이 아닐지 모른다. 대다수 한국인은 오달수 같은 조연이거나 엑스트라이거나 심지어 배역조차 얻지 못한 수없이 많은 이들이다.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노력이 한국현대사 연구에서도 2000년대 전후부터 사회사와 구술사라는 방법론을 통해 상당히 축적되어왔다. 저자는 국제관계와 한미관계 같은 한국현대사의 구조를 중심으로 선정한 주제들을 다루다보니 조연이나 배제된 자들의 목소리를 이 책에 담기는 힘들었던 듯하다. 만약 한국현대사의 큰 흐름과 함께 당대인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다면, 저 영화들만큼이나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책에서 다룬 한국현대사의 구조들이 당시를 살아갔던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어떻게 맞물렸는지 그 부딪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저자의 후속 대중서를 기대한다.
김도민 / 서울대 강사, 한국현대사 전공
2015.9.9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