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알렉산드르 뿌시낀 『대위의 딸』
역사는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가
- 알렉산드르 뿌시낀 『대위의 딸』
나는 긴 소설을 사랑한다. 삼사백면 정도 되는 일반적인(?) 분량의 장편소설이 아니라 칠팔백면이나 천면이 넘어가는 장대한 소설들. 멀고 먼 결말을 향해 거침없이 치닫다가 끊임없이 길을 잃고 방황하며 지속적으로 결론을 유예시켜 도무지 언제 끝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긴 이야기 말이다. 소설은 길면 길수록 진실과 가까워진다. 긴 이야기를 작위적으로 쓰는 건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요즘에는 늘 짧은 소설을 선택하게 되는데 그 원인은 물론 조급함이다. 쉬지 않고 끝을 망각하는 소설들에 온몸을 던지기에는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다는 게 문제다. 나는 토요일마다 로또를 사면서 만약 당첨된다면 세상의 긴 소설들을 모조리 읽어버리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웬일인지 로또에는 좀처럼 당첨이 되질 않는다. 물론 나는 이 모든 게 변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 문제는 나에게 있다.
알렉산드르 뿌시낀(Aleksandr Pushkin)의 『대위의 딸』(1836, 한국어판 김성일 옮김, 창비 2015)은 긴 소설이 아니다. 부록을 제외하면 이야기는 겨우 194면에서 끝난다. 그러나 이 소설은 결코 짧지 않다. 그 안에는 질주하는 서사가 있고 드넓게 펼쳐진 대지가 있으며 일생과도 같은 시간이 있다. 『대위의 딸』은 짧지만, 동시에 장대하다. 그리고 장대한 소설은 늘 나를 매료시킨다.
이것은 옛날이야기다
『대위의 딸』은 ‘뿌가초프의 난’이 일어난 1700년대 러시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인 뾰뜨르 안드레예비치 그리뇨프는 명망 높은 군인인 아버지의 부지런함 덕에 아직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장교가 된 인물이다. 그런 그가 열일곱살이 되던 해 본격적인 군복무를 위해 오렌부르그로 향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뾰뜨르가 길을 떠날 때 어머니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외투는 새것일 때부터 아끼고 명예는 젊어서부터 소중히 하라는 속담을 기억해두어라.”(16면) 추상적 개념마저 근검절약을 종용하는 알뜰한 어머니의 이 말은 꽤나 인상적일뿐더러 의미심장하기까지 하다. 그녀는 명예라는 것이 얼마나 닳기 쉬운 물건인지, 그리고 닳아버린 명예를 회복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대위의 딸』은 어린 귀족 장교 뾰뜨르 안드레예비치 그리뇨프가 젊어서부터 명예를 지켜내고자 노력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모두가 예상하는 대로 이 불쌍한 어린 귀족의 명예는 해질 대로 해지고 만다. 어쩔 수 있나, 소설이라는 게 애초에 그런 것임을.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도 없다. 나중에 가면 잃어버린 명예를 덤까지 더해서 모두 도로 되찾아오니까. 옛날이야기라는 게 원래 다 이런 식이다.
그렇다면 ‘대위의 딸’은 누구인가? 그녀는 뾰뜨르가 사랑하는 여인으로, 그의 실추된 명예를 되찾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뾰뜨르는 오렌부르그로 향하는 도중 눈보라 속에서 우연히 한 부랑자를 만나 도움을 주게 되는데 나중에 그가 농민운동의 수장이자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는 뿌가초프였음이 드러난다. 그와의 인연으로 인해 뾰뜨르는 매우 많은 일을 겪지만 그 이야기를 여기에 다 쓸 수는 없으니(그러기엔 너무 방대하다!) 핵심만 말하자면 그는 뿌가초프 덕분에 목숨을 부지하지만 후에 변절자로 몰려 모든 걸 잃을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때 활약하는 것이 현명한 대위의 딸 마리야인 것이다. 뾰뜨르의 반려자인 지혜로운 마리야는 모스끄바까지 머나먼 여정을 떠나 잃어버린 그의 명예는 물론 자유까지 몽땅 되찾아온다. 『대위의 딸』의 인물 구성은 경제적이면서 탁월해 소설을 통틀어 허투루 버려진다거나 생기로 넘치지 않는 인물이 단 한명도 없다. 지혜로운 반려자 마리야, 충직한 조력자 싸벨리치, 적대자 시바브린, 자유로운 정신을 계승해준 스승 므시외 등 모두가 각기 매력적이며 진실된 인물들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중요할뿐더러 매혹적이면서 다채로운 인물은 바로 뿌가초프다. 그는 농민봉기의 리더로서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귀족들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교수대에 매달아버리는 냉정한 인물이면서 은혜를 갚을 줄 알고 순간을 즐길 줄 아는 호탕한 사내이기도 하다. 그는 또한 사랑 예찬론자이기도 해서 뾰뜨르가 시바브린에게서 대위의 딸 마리야를 구해 나올 때 결정적인 도움을 주고 결혼을 권유하기도 한다. 역사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신념을 믿고 자유분방하게 행동하지만 동시에 잔인하게 무고한 시민들을 죽이는 양면성을 지닌 뿌가초프를 바라보는 뾰또르의 시선 변화는 이 소설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것은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대위의 딸』은 역사소설이다. 이야기의 큰 줄기는 기록된 역사를 따라가고, 소설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은 실존인물이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는 근대의 역사라기보다 신화시대의 영웅담과 같은 면모가 엿보이기도 한다. 뾰뜨르가 겪는 모험, 성장, 시련, 부활 등을 보고 있자면 이 소설을 영웅서사의 교본으로 써도 충분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 짧은 소설에 서사의 원형이 거의 모두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뾰뜨르가 오직 마리야를 구하기 위해 병사를 이끌고 오렌부르그에서 벨로고르스끄 요새로 향하려던 장면에서는(이 시도는 결국 출발도 못한 채 좌절되고 만다) 헬레네를 되찾기 위해 벌어진 트로이 전쟁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신화나 고대의 영웅 이야기와 이 소설의 다른 점은 뾰뜨르의 행위가 역사를 결정짓는 것과는 무관한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라는 데 있다.
뿌시낀은 『뿌가초프 반란사』(1834)라는 역사서를 쓰고 난 뒤 『대위의 딸』을 썼다. 전자가 공적 역사의 영역을 다루고 있다면 후자는 사적 역사의 영역을 다룬다. 이 소설에는 틈날 때마다 다음과 비슷한 문장들이 등장한다. “오렌부르그 봉쇄에 대해서는 쓰지 않으려고 한다. 그것은 역사에 속하는 것이지 일개 가정의 수기가 기록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130면) 이것은『뿌가초프 반란사』와 『대위의 딸』이 완전히 다른 관점을 가지 고 쓰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말은 후자가 전자보다 더 넓은 영역을 아우르고 있다는 뜻도 된다. 언제나 사적 영역은 공적 영역보다 더 넓은 세계를 포함하는 법이니까. 우리는 그 개인(또는 가족)의 역사 속에서 각자 스스로의 명예(신념, 자존심 혹은 그게 뭐가 됐든)를 지켜낸다. 결국 『대위의 딸』이 말하고자 하는 건 그것일지 모르겠다. 우리가 품고 있는 것을 지키는 일이 세계를 바꾸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사실.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엄마 말을 귀담아들어서 명예를 소중히 하는 습관을 들이자. 젊음은 길지 않으니까.
정영수 / 소설가
2015.9.16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