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좌파 정치인의 약진, 그러나 아직은 부족하다!
우리 시대 지식인들은 신자유주의라는 시장맹신주의가 초래한 실업, 고용불안, 빈곤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점잖게 타이른다. 시장이라는 현실, 지구적 경쟁이라는 현실은 당연한 기정사실이며 이를 부정하는 건 가능하지 않고 가능한 일이란 그저 그 현실을 약간씩 고치는 것뿐이라고. 그리고 훈계한다.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라고. 그리고 노파심에 한마디 덧붙인다. 자본주의를 근본에서부터 비판하는 사회주의는 시대착오적이라고. 그들 스스로는 기존 질서가 너무나 당연해서 의심할 수 없다는 아주 오래된 편견에 갇혀 있으면서 말이다.
사람들은 더이상 끝없는 경쟁과 희생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진 몸과 마음이 저도 모르게 이기적인 소비자와 투자자로 행동하게 만들지만 말이다. 2008~2009년 금융위기로 신자유주의적 교의가 산산조각 난 후에도 시장과 경쟁의 원리를 종교처럼 따르는 한국의 기득권층을 신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걸 부정하고 대체하기에는 이미 원자화되어 집합적인 의사표현의 통로를 차단당한 스스로가 너무 무기력해서 욕지거리를 내뱉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느끼지만 말이다. 지금과는 다른 삶을 열망하지만 신자유주의적으로 훈육된 우리의 정신은 그건 가능하지 않다고 자체 검열해버리고 만다.
시장과 경쟁이라는 ‘당연한’ 현실을 넘어서기
서유럽과 북미라고 다를 것은 없다. 2차대전 이후 구축된 복지국가체제(물론 나라마다 편차는 있었지만)는 1980년대초부터 시장의 이름으로 단죄되고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30년 동안 정치적 스펙트럼의 가운데서 좌우로 나뉘어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맞추었던 보수정당과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이제 자리를 더 오른쪽으로 옮겨 지구화된 자본주의 세계체계에 적응하는 방식을 둘러싸고 경쟁하기 시작했다. 시장과 경쟁이라는 ‘당연한’ 현실을 부정하는 사람들과 정치세력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낙인찍혔고 철저하게 소외되었다(얼마 전 영국 노동당 당수가 된 제레미 코빈이 그렇게 소외되었던 사람 중 한명이다).
하지만 그들이 만들어놓은 ‘당연한’ 세상에 살면서도 그들이 약속했던 삶의 질의 향상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좌절하고 절망했다. ‘이것 말고는 대안이 없는’ 그런 사회에 살지만 이 체제가 약속한 인간다움의 실현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것이다. 투기 거품으로 파산한 은행과 보험회사는 구제되어야 하지만 그들의 돈 잔치를 위해 희생된 사람들을 돕는 것은 비도덕적이라고 지탄받는다. 하지만 이미 철저하게 고립된 개인으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에 빠져든다. 어쩌면 이것이 신자유주의가 거둔 결정적인 승리, 이데올로기적 승리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의 불만(열망)과 시장질서를 당연하게 받아들인 ‘(무늬만) 진보’인 정치세력 사이에서 정치적으로 빈 공간은 ‘조직화되지 못한’ 수많은 목소리와 몸짓으로 가득 차게 된다. 정치적으로 무력하지만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현실의 체험으로부터 터져나오는 몸짓, 그리고 목소리.
이제 그러한 목소리와 몸짓이 제도정치 안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그리스의 시리자(SYRIZA, ‘급진좌파연합’의 약칭), 스페인의 뽀데모스(Podemos, ‘우리는 할 수 있다’는 뜻의 신생정당)를 통해, 그리고 제레미 코빈과 버니 쌘더스(미국 민주당 대선후보)의 이름으로. 아직은 갈 길이 멀다. 보장된 것은 하나도 없다. 정치적으로 철저하게 소외되었던 좌파 정치인이 노동당의 당수가 되고 스스로를 좌파로 내세우는 정치인이 미국 대선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현상이 그냥 ‘현상’으로 끝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불만과 열망의 목소리와 몸짓이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는 현상은 새로운 정치가 출현하는 계기여야 하지만 거기서 멈추고 정치인 개인에 대한 파상공세에 무력화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스펙트럼에서 비어버린 왼쪽을 채우고 있는 다양한 목소리와 몸짓은 조직화되어 모아져야 하고 그 힘은 정당정치 안의 좌파에 힘이 되어주는 동시에 그들을 압박해야 한다. 그럴 때에야 코빈과 쌘더스 현상은 예상치 못한 극적인 사건에서 대안적이고 위력적인 삶의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모든 것이 무정형이다. 시리자의 치프라스 정부는 유럽 채권단의 압박의 무게를 버거워하면서 갈지자 행보를 보이고 있다. 당 내외에서 쏟아질 코빈에 대한 공격은 노동당의 좌파적 재편을 가로막을 뿐 아니라 노동당-사회운동(녹색당)의 연대를 방해할 것이다. 쌘더스는 미국인들이 가진 불만이 단발성으로 표출되는 한번의 해프닝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기대와 희망보다 걱정과 우려가 앞서는 이유이다. 하지만 기대와 희망은 코빈과 쌘더스 개인이 아니라 그들에게 희망의 실마리를 본 사람들의 집단적 실천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지 못할 때 기대는 더 큰 절망의 수렁으로 바뀔 뿐이다.
한국의 진보정치, 무엇을 할 것인가
이제 한국을 돌아본다. 한국사회를 가득 메우고 있는 불만의 정도는 저들의 것보다 더 높다. 기득권 세력의 뻔뻔함과 몰염치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진보’를 자처하는 야당은 이미 ‘맛이 갔다’고 평가받았던 영국의 전 총리 블레어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들은 이미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나누는 기득권의 논리에 동조하는 지배세력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진보정당은 기존 보수정당의 ‘코스프레’ 정치를 넘어서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닮으려고 할 뿐이다. 그 반대편에 저항과 열망의 몸짓과 목소리가 가득 차 있는데도 말이다.
진보정당은 그 목소리와 몸짓을 대표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무정형의 목소리와 몸짓이 꼴을 갖춘 정치적 힘이 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진보정당은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비공식적이고 사적인 영역으로 강변하는 곳들을 정치의 주제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보수정당의 게임규칙을 수용하면서도 이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이다.
이 목소리와 몸짓을 모아줄 우리의 ‘제레미 코빈’은 없는 걸까? 한국의 코빈을 자처하는 ‘정치꾼’ 말고, 그 언저리에서 보통 사람들의 좌절과 열망을 기득권을 유지하는 투표함에 가두는 데 일조하는 사이비 지식인 말고, 함께 미래를 만들어갈 진정한 좌파 정치인과 지식인 말이다. 최소한 시장 말고는 대안이 없다고 주장했던 스스로가 유토피안이었다고 자기반성하는 사람들을 기대해본다.
서영표 /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2015.9.30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