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창비주간논평

송기역 『유월의 아버지』

“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

송기역 『유월의 아버지: 박종철이 남긴 질문, 박정기가 답한 인생』

 

yuwol이 책을 훌쩍이며 읽었다. 가슴 한쪽이 시렸다. 눈물 흘리라고 쓴 책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랬다. 앉은 자리에서 읽다가, 그 자리에서 누워 읽다가, 다시 앉아 읽다가 보니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게 되었다. 책을 덮고 마냥 막막했다.

 

‘박종철이 남긴 질문, 박정기가 답한 인생’이라는 부제가 달렸으나, 이 책은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의 평전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식이 부모의 생을 읽는다는 것만큼 찡한 일이 어디 있을까. 나는 그저 이름 없이 살아가는 한 아들로, 박종철의 아버지로 알려진 박정기의 이야기를 읽었다. 아들을 먼저 보내고 자신의 이름으로 살기보다는 ‘박종철’의 아버지로 살았던 인간 박종기, 내가 슬픔을 느낀 건, 어쩌면 박종철이 살았던 시대와 박종기가 투쟁했던 날들 훨씬 이전에 있었던 한 가정의 따스한 저녁밥상이 떠올라서였는지도 모른다.

 

잠시 후 그가 갑자기 주먹을 쥐고 과장된 몸짓으로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지켜보던 아들과 아버지가 깜짝 놀랐다. 박원택이 두 사람을 빤히 응시했다.

“보세요! 놀라셨죠? 이렇게 책상을 ‘탁’ 하고 치니까 ‘억’ 하고 쓰러졌어요. 심장마비로 쓰러진 겁니다.”(49면)

 

아들이 꿈꾸던 세상

 

박정기와 박종철의 형 박종부 부자 앞에서 경찰은 당시 상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재현한다. 불과 하루 전에 박종철이 고문으로 죽었는데도 경찰은 얼토당토 않는 거짓말로 사건을 덮으려고 했다.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509호실에서 박종철은 고문 끝에 사망했다. 1987년 1월 14일이었다. 1월 16일, 박정기는 부검을 마친 아들을 염하고 벽제화장터에서 화장했다. 그는 임진강에 아들의 뼛가루를 뿌렸다. 그날 밤, 박정기는 경찰이 마련한 대형버스를 타고 집으로 내려간다. “버스에는 가족과 친척뿐만 아니라 경찰과 기관원도 타고 있었다.” 그리고 “기관원들은 이날부터 참여정부가 들어서기까지 꼬박 15년 동안 그와 가족 주변을 감시했다.”(61면)

 

언론은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을 집중 보도했다. 아들의 죽음은 6월항쟁의 불길로 번졌다. 사람들은 “박종철을 살려내라!”라는 구호를 외쳤다. 박정기는 6월 26일 34개 도시에서 150만여명의 시민이 거리를 메웠던 ‘전국민평화대행진’을 이렇게 회상했다. “처음으로 가슴 저미는 감동 같은 것을 느꼈다. 어디서 그 많은 사람들이 밀려나오는 것인지…… 저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민주주의 하자고 모이는 것이고, 거기에 종철이가 많은 기여를 했다는 생각에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132면)

 

박정기는 그날 결심했다고 한다. 아들이 꿈꾸던 세상을 만들기 전까지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6월항쟁은 평범하게 살기를 바랐던, 은퇴하면 목욕탕을 열고 싶었던 한 아버지의 삶을 바꿔놓았다. “6월항쟁은 내 인생을 변화시켰고, 유가협으로 가는 징검다리였어. 내 삶이 다시 시작되었지.”(133면) 삶이 변화된 건 아버지만이 아니었다. 전 계층, 전 지역 시민들의 거센 저항은 마침내 6·29선언을 이끌어냈다.

 

유가협은 그뒤 유가족 회원의 범위를 꾸준히 넓혀왔다. 현재 마지막으로 회원이 된 이들은 2009년 1월에 발생한 용산참사 희생자들의 유가족이다. (…) 국가와 자본의 폭력에 의한 희생자가 있는 한 앞으로도 꾸준히 외연을 넓힐 것이다. 하지만 박정기의 바람대로, 유가협이 꿈꾸는 세상은 ‘회원이 늘지 않는 세상’이다.(208면)

 

박정기가 본격적으로 유가협(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활동을 시작했다. 우리 현대사의 가장 가슴 아픈 곳, 분신과 의문사가 있는 곳, 저항이 필요한 자리마다 박정기와 유가협은 가장 먼저 찾아왔다. 어느덧 88세에 이른 박정기. 그는 여든 중반까지도 각처에서 싸우는 이들과 함께했다. “그는 유가협을 이끄는 지난 세월, 아들 철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비가 되고 싶었다. 동지가 되어달라는 아들의 부탁을 이제야 들어준 것 같다. 인생에서 다시 오지 않을 행복한 날이었다.”(309면) 죽은 아들과의 약속이었기에 박정기는 평범한 삶 속에서는 볼 수 없었던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다. “아부지, 참말로 고생 많었어예.”(309면)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던 박정기. 그는 그렇게 아들의 아버지로, 박종철의 아버지로 살았다.

 

막막한 세상을 건너가는 지금

 

인간답게 살기 위하여 싸웠던 이들에게 지금의 이 시대가 부끄러운 건, 여전히 계속되는 국가의 폭력 때문일 것이다. 국가는 죽은 자를 지우고, 죽인 자는 반성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인구 10만명 당 28.7명, OECD 평균의 2배가 넘고 11년째 1위라고 한다. 박종철을 죽인 세상과 박정기가 투쟁한 세상과 지금의 이 세상은 아직 막막하다. 저항했던 이들, “박종철을 살려내라!”라고 외쳤던 이들, 일부는 전향을 했고 일부는 평범한 삶을 택했고 일부는 무기력하게 계속 지면서 살아간다. 이 책의 저자 송기역은 박정기와 대화를 나눌 때마다 막막함을 느꼈다 전한다. 송기역은 후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이 책은 그 막막함의 증거이고 기록이다. 말과 말 사이 흐르던 침묵을 언어화하는 일은 내게 너무 벅찬 일이었다.”(311면)

 

1965년 4월 1일생. 2000년이 36세라고 한다.

깜짝 생각만 하면 정말 자지러진다.

마음이 매우 아프다. 나이 36세이면 과연

무엇을 하고 어떤 생각으로 살 것이며

사회에 어떤 봉사자로 임하고 있을지.

 

철아, 그래도 아버지는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너무도 그립구나. 한참 더 생각해도.

 

―박정기의 일기장, 2000년 4월 1일(315면)

 

백상웅 / 시인

2015.10.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