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한정영 『짝퉁샘과 시바클럽』
그 많던 ‘꾸러기’들은 어디로 갔을까?
-한정영 『짝퉁샘과 시바클럽』
“꾸리꾸러기러꾸 날주아리아리꾸 우리는 꾸러기 꾸러기.” 1986년부터 1988년까지 방송된 일일극 <꾸러기>는 초등학생(당시엔 국민학생)은 물론 중학생에게까지 인기있는 프로그램이었다. 가물가물한 기억을 돌이켜보면, 이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꽤나 반항적이었다는 게 그 매력이 아니었을까 싶다. 당대의 아역배우 이민우를 필두로 한 ‘꾸러기’들 속에는 모범생도 장난꾸러기도 있었지만, 순종적이거나 고분고분한 아이는 없었다. 오히려 어른들 눈을 피해 각종 사건사고를 일으키는 것이 이 아이들의 특기였다.
순종이 미덕으로 여겨졌던 시대에 순종하지 않는 아이들이 주가 된 이 드라마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이었던 것 같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개최를 전후로 한 고도성장에 대한 사회적 기대감과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으로 촉발된 6월항쟁의 비장함으로 이어지는 모순된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낸 결과물은 아니었을지. 아이들의 도전과 모험이 정부의 정책적인 홍보대상이었다 해도, ‘꾸러기’라는 비순종적인 캐릭터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동시대의 열띤 민주화투쟁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았으리라. 비록 그 끝은 어른들의 말씀이 곧 진리라는 교육적인 메시지로 끝났을지라도 말이다.
한정영의 청소년소설 『짝퉁샘과 시바클럽』(시공사 2015)은 그러한 <꾸러기>와 참 많이 닮았다. 일상에서 떠오른 의문을 그저 묻어두지 않고 탐정단을 조직해 진실을 추적하려는 태도, 어른들의 충고나 만류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자기들 힘으로 진실에 접근하려는 의지,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목표를 끝까지 추적하는 강인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의심이 사실상 오해였음을 알게 되었을 때 자기모순까지도 인정하는 ‘쿨’함까지. 어느 순간 우리 곁에서 사라졌던 ‘꾸러기’의 귀환은 그만큼 반가웠다.
모든 사건은 물음표에서 시작된다
자칭 시바클럽, 타칭 씨발클럽의 리더인 미소의 캐릭터는 통통 튄다는 말로 쉽게 전환될 수 없다. 웹툰작가 조용석의 삽화에 묘사된 미소의 모습은 이 캐릭터의 특성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장난감총 ‘덕후’인 다림이를 째려보는 미소의 얼굴은, 딱 보아도 보통내기는 아니겠다는 느낌을 준다. 이런 미소와 다림이에 비하면, 책을 들고 서 있는 모범생 세민이나 아무에게도 관심없다는 눈빛으로 전면에 서 있는 태극이의 모습은 평범할 지경이다.
삽화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짝퉁샘과 시바클럽』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무엇보다도 캐릭터이다. 시바클럽은 태권도 유망주에서 한낱 ‘일진’으로 전락(?)한 태극이와 그런 태극이를 감싸고 도는 콩글리시 전파자 ‘짝퉁샘’의 비리를 추적하겠다는 목표하에 조직되었다. 세 멤버-미소, 다림, 세민은 결코 무던하지 않은, 그러나 무언가 한가지씩은 부족해서 흥미로운 캐릭터들이다.
이러한 『짝퉁샘과 시바클럽』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꾸러기들의 귀환을 선언하지만, 보다 가깝게는 최근 십여년간 진행된 한국 청소년문학의 서사적 외연이 얼마나 확장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에 대한 불평불만으로 똘똘 뭉친,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청소년의 기원은 김려령의 『완득이』(창비 2008)일 것이다. 짝퉁샘의 캐릭터나 베트남 혼혈인 태극이 캐릭터에 『완득이』의 똥주선생과 완득이가 겹쳐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시종일관 진지하려고 하지만 결코 진지할 수 없을 만큼 어설픈 탐정인 시바클럽의 좌충우돌한 정탐과 활극은 박하익의 『선암여고 탐정단』(황금가지 2013~15)에 더 가깝다.
탐정서사는 의문에서 시작된다. 이 작품은 그러한 공식에 충실하다. 제목에 주인공 태극이의 이름이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그가 이 작품 속에서 정탐되고 분석되어야 할 대상, 즉 일종의 텍스트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태극이가 환기하는 다양성의 문제야말로 이 작품의 전체 서사가 추구해야 할 목표, 그 자체로 물음표가 된다. 왕따라는 학내 폭력의 문제로부터 한부모·다문화 가정, 도시개발에 따른 빈부격차, 더 나아가 베트남전쟁과 라이따이한이라는 역사적 문제까지.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들이 태극이를 통해 엮여져 나오지만, 작가는 이 작품의 실질적인 독자가 십대 초중반 학생들임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 끝까지 명랑함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작품이 가진 가장 큰 미덕이다.
무슨 가족이라도 되는 양 친밀하게 달라붙은 여러 음식 재료 이름도 그렇고, 익숙하지만 사전을 찾아봐도 나오지 않는 속담. 게다가 무국적 신조어와 영단어가 국제적으로 뒤엉킨 화려한 수식어까지. 접시를 내려다보니, 무슨 체육 시간도 아니고, 계란말이와 김밥, 라볶이가 ‘헤쳐 모여!’ 한 형국이었다. 계란말이라볶김밥이란 게 결국, 라볶이를 넣어 만든 김밥을 계란말이로 두른 것인데, 그 이상은 무어라 설명하기가 부담스러웠다.(43면)
따라서 작품의 주제도 결코 교훈적이거나 속칭 ‘꼰대’적이지 않다. 그저 미소네 둘리분식에서 선보이는 국적불명의 신 메뉴처럼 명랑하다. 감탄사를 연발하도록 만드는, 그러나 도저히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짬뽕메뉴가 가진 ‘맛’의 정체. 그것은 무엇보다도 ‘어우러짐’이다. 시바클럽과 태극이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 역시 각각의 개성 속에서 어울리지 않을 듯 어울리는 부조화의 균형인 것이다. 모든 사건이 끝나고도 여전히 까칠한 미소, 덕후 다림이, 모범생 세민이, 그리고 짐짓 어른인 척하는 태극이까지, 이들이 제 성격 그대로 반뼘쯤 성장한 것은 그것을 방증한다.
‘그들’을 만나자
2015년 11월 현재, 대한민국은 매우 혼란스럽다. 역사학자들의 집필거부와 각계각층의 반대성명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혼란은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교과서의 직접적인 소비자이자 국정화로 인해 가장 큰 피해자가 될 젊은 세대가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재치있는 문구로 시국을 비판하는 대학생들의 대자보와 학원으로 가는 발길을 돌려 손팻말을 들고 광장으로 나온 아이들. 이미 꾸러기들은 귀환했다. 명랑하고 재기발랄하지만 비장함을 잃지 않은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줄, 진짜 어른들의 ‘귀’가 절실하다.
류수연 / 문학평론가, 인하대 교양교육원 교수
2015.11.11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