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이치노카와 야스타카 『사회』
역사적 성찰의 시선으로 보는 ‘사회적인 것’의 쟁점
-이치노카와 야스타카 『사회』, 푸른역사 2015
언젠가 21세기초 인류의 삶을 규정하는 가장 강력한 키워드들로 ‘쏘셜네트워크’와 ‘디지털 플랫폼’이 기억될 것이다. 페이스북과 카카오톡, 인스타그램 등의 이른바 ‘쏘셜네트워크’ 앞에서 이제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경영패러다임이 ‘금융/IT산업’으로 대표된 ‘지식기반경제’에서 ‘공유경제’로 대표되는 ‘연결’형 플랫폼 시대로 넘어가고 있음을 발견한다. 미국의 우버택시로 대표되는 만인의 불안정노동화는 이 플랫폼 시대의 지층을 이루는 공유경제의 ‘연결’이 무엇을 함의하는지 알려주기도 한다. 신문과 문학작품을 통해, 혹은 이념의 보편성을 통해 인민의 ‘사회’적 관계를 상상하던 시대는 이제 끝난 것일까. 한국에서 ‘사회’주의와 70~80년대 ‘사회’과학의 이름으로 그 정치적 자장을 만들어 내던 ‘사회’가 ‘사회적 경제’와 ‘쏘셜네트워크’의 21세기형 외투를 입었을 때 우리는 어떤 거대한 변화가 눈앞에 닥쳐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이렇듯 오늘날 ‘사회적인 것’의 위기를 성찰한다는 것은 세계의 이 거대한 변화를 그 맥락 속에서 사고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물어보자. 오늘날 ‘사회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일본의 사회학자 이찌노까와 야스따까(市野川容孝)의 『사회』(강광문 옮김, 한림대 한림과학원 기획)는 풍부한 문헌연구를 바탕으로 ‘사회(적인 것)’의 역사로 가는 견고한 길을 우리에게 안내한다.
사회(적인 것) 개념의 근대적 출발
우리에게 이제는 당연한 전제처럼 인지되는 ‘사회(적인 것, the social)’라는 개념이 공식 문헌을 통해 처음 사용된 것은 대략 17세기말이다. “사무엘 푸펜도르프는 1672년의 저작에서 ‘사회성’(socialitas)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 이를 ‘선의, 평화를 향한 사랑, 상호 의무를 토대로 만인이 만인에 대해 맺어진 상태’로 정의하고 여기에 법에 대한 하나의 기원이 있다고 했다.”(137면) 저자 이찌노까와에 따르면, 푸펜도르프 이후 계몽사상의 흐름을 경유하는 가운데 사회는 크게 네가지의 의미를 띠며 나타났다.
첫째, 사회는 자연(퓌지스)에 대립하는 인위적 세계다. 둘째, 그것은 개인과 대비되는 어떤 집합적 세계망으로 인식되었다. 셋째, 그것은 국가와 대비되는 것으로 간주되며, 19세기 이후에는 ‘시민적’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시민사회’라는 개념을 만들어낸다. 특히 이 시민사회는 18세기말 정치경제학의 등장으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작동하는 ‘시장’의 영역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넷째, 앞의 세가지를 모두 총괄하면서도 일정한 변주를 준 것으로, 사회는 인간의 인위적이고 집합적 노력으로 만들어진, 그러나 ‘시장’의 자유방임적 영역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연대성과 도덕의 상호구속적 관계망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이상 7~12면) 대체로 19세기말 사회보장체계의 탄생과 더불어 확산된 ‘사회(적인 것)’에 대한 이 네번째의 관념이 흥미로운 점은 그것이 ‘사회적인 사회’라는 동어반복적 표현을, 혹은 ‘사회적 국가’(이른바 ‘복지국가’)라는 다소 모순적인 표현을 가능케 했다는 점에 있다.
특히, ‘사회적인 사회’라는 관념을 가능케 한 18세기 계몽사상의 흐름은 ‘사회(적인 것)’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중요한 준거점이 된다. 당대 프랑스 및 영국의 철학적 사유를 지배한 개념 중 하나는 ‘연민’(compassion)의 개념이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 그것은 루쏘(J. J. Rousseau)로부터 영국 도덕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보편적 본성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동시에 18세기 사상가들의 경로를 가른 문제 역시 이 연민의 감정을 ‘소유’의 원리와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로크, 흄, 애덤 스미스 등 영국 도덕철학자들의 선택은 비교적 명확했다. 그들에게 ‘사회’에 가장 근원적인 것은 소유의 원리였으며, ‘연민’은 언제나 2차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루쏘의 선택은 혼란스럽다. 『인간불평등기원론』(1754)에서 루쏘는 연민을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감정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바로 그 이듬해에 출간한 『정치경제론』에서 그는 “소유권이 시민의 모든 권리 중에서 가장 신성한 것”이라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여기서 상기해야 할 점은 사회계약의 기초가 소유에 있다는 것[이다].”(이상 『사회』 143면에서 재인용) 비슷한 개념의 동요가 ‘사회’(civil, 문명)의 개념을 둘러싸고 『인간불평등기원론』과 『사회계약론』(1762)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전자에서 ‘사회적’인 것은 인간의 불평등을 초래하는 것에 불과했고, 따라서 우리에게 알려진 루쏘는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주문하는 낭만주의자다. 그러나 후자에서 루쏘는 ‘사회’적 계약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적 자유를 넘어 시민적 자유를 얻기를 요청한다.
‘연민’으로부터 ‘사회’적 계약으로, 사회로부터 사회를 초월한 사회로
이러한 루쏘의 동요가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 우리가 ‘사회(적인 것)’를 어떤 합의체이거나 정서적 공동체 이상의 심급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 있다. ‘소유’가 없는 자연상태에서는 평등과 불평등이라는 것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연민’에 의한 타자와의 완전한 동화 상태는 타자 자체의 존립을 불가능케 할 것이다. 요컨대 경계를 모르는 자연인은 타자에게서 오직 자기 자신의 얼굴을 발견할 뿐인바 루쏘가 『사회계약론』에서 자연을 넘어 사회적으로 재규정된 평등의 세계를 사고하고자 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넓게 볼 때 오늘날 ‘사회적인 것’에 대한 다수의 논의들은 이러한 루쏘적 긴장의 자장 속에서 동요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사회’란 합의와 공감의 결사체로 간주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자기-동일성 속에 맹목적으로 폐쇄되지 않기 위해 다른 힘에 의해 재규정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니클라스 루만은 1968년 독일사회주의학생동맹의 저항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이의신청운동(Protest)의 커뮤니케이션은 확실히 사회 속에서 일어난다. (…) 그러나 그것은 마치 사회 밖에서 일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사회를 위한, 동시에 사회에 반대하는 책임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사회』 117~18면에서 재인용) 자연의 평등이 사회적인 것에 의해 재규정되어야 하듯, 사회는 또한 사회 안에서 사회를 초월하는 그 무엇에 의해 재규정되어야 한다.
사회적인 것의 근본 문제설정
이러한 사회적인 것의 내적 긴장에 대한 인식은 이 책 전체를 가로지르는 이찌노까와의 근본 문제의식이다. 그러나 때로 그의 문제의식은 로자 룩셈부르크와 한나 아렌트 등에 대한 해석을 경유하며 일정한 오해를 수반하기도 한다. 특히 룩셈부르크와 레닌을 각각 민주주의자와 독재자로 규정하여 대립시킨 것은 ‘정치’ 자체가 필연적으로 정세 개입(막대 구부리기)의 행위이며, 사회적인 것의 바깥으로부터만 올 수 있다(아렌트)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혼란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상의 쟁점에도 불구하고 자명한 한가지는 오늘날의 사회적 경제나 쏘셜네트워크 모델처럼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단순한 공감의 공동체나 공유의 세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자연인)이 인민이 될 필요가 있듯, 새로운 세계 역시 새로운 경계설정 속에서 기획되어야 한다. 루쏘적 동요는 오늘날 우리들의 사회적인 것에 대한 물음 속에서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정현 / 정치철학 및 매체학 연구자, 제5회 사회인문학평론상 당선자
2016.1.13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