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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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시시하지 않은 사회를 위해

 

권지웅

권지웅

연일 ‘청년’에 대한 기사가 뉴스를 장식한다. 대통령도 담화에서 청년을 언급하고, 여당 야당 가릴 것 없이 청년에 대한 포부를 밝힌다. 대체로 청년을 바로 세워서 지속가능성의 위기를 헤쳐나가자는 것이 내용이다.

 

그런 가운데 서울시 청년활동지원정책(이하 청년수당)을 둘러싸고 보건복지부와 서울시의 갈등이 심화하고 있다. 지방교부금을 줄이겠다는 압박에 이어, 지난 14일 복지부는 서울시의회를 대상으로 대법원에 예산무효 소송과 예산 집행정지 결정을 신청했다. 사실상 청년수당을 막아서기 위해 온힘을 다하고 있는 형국이다. 복지부는 ‘복지’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사법부는 정책을 결정할 권한이 없이 정책의 정합 여부를 판단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우스운 일이다.

 

청년의 삶, 다른 질문으로의 전환

 

지난달 아픈 소식이 있었다. 한 대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연이어 공무원시험에 합격하지 않았지만 합격했다 말하고 일년을 출근해온 한 삼십대가 자살했다. 또 한쪽에선 스스로 회사를 나온다는 청년들의 소식이 종종 들린다. 높은 연봉을 주는 기업에서 나오는 친구들도 자신의 회사생활을 돌아보기를 꺼린다. 회사생활에 대해 저주에 가까운 욕이 오가고서야 회사를 나가겠다는 친구들과 모임은 끝이 난다.

 

회사를 나오는 청년, 삶마저 포기해야 했던 청년의 이야기가 그저 한사람의 예외적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그들의 소식에 그럴 수도 있다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 끄덕임의 공명은 무엇인가.

 

현재 한국사회가 주목하고 있는 위기는 부양인구집단의 붕괴, 그래서 ‘돈 버는 사람을 어떻게 많이 만들 것인가’로 진단되는 듯 보인다. 하지만 경제적 층위의 진단으로는 무언가 부족하다. 먹고사는 문제만으로 자신의 직장을 버리고,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다른 질문을 해야 할 때이다.

 

포착되지 않는 문제를 진단하기 위해 우리는 질문을 전환해야 한다. 내가 최근 주목하는 문제는 ‘살아가고 싶은 동기’ 그 자체의 붕괴이다. 예컨대 생존이 아니라, 생존해야 할 이유의 붕괴인 것이다. 한국사회가 주목해야 할 지속가능성의 문제를, 살아가고 싶은 동기의 상실·붕괴라고 정의하면 어떤가. 그래서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 사회를 만들 것인가’로 확장하면 어떤가. 그래야 지금 포착하지 못하고 있는, 어딘가 가려운데 설명하기 어려웠던 이야기를 찾을 수 있다. 구체적인 변화의 과정은 질문을 전환한 다음, 그 질문에서 찾아 나가면 된다.

 

다시, 청년수당으로

 

그런 관점에서 청년수당을 둘러싼 논란은 단순히 청년을 위한 복지정책을 시행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조금 더 나은 사회가 가능하다’는,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믿음과 맞닿아 있다.

 

작년 11월에 서울시가 발표한 이 청년정책(청년수당을 포함해서)은 지난 3년간 청년들이 직접 토론하고 협의하여 쌓아온 결과물이다. 모든 것을 바꾸지는 못해도 자신의 일상에서 시작해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사람들의 노력이다. 월차를 내기도 하고, 다음날 이른 시간 출근하면서도 저녁모임을 하고, 알바시간을 조정해가며 만들어온 것은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에 대한 기대였다.

 

복잡해서 당장은 풀지 못하더라도 그 자체가 좌절은 아니다. 그것이 조금씩이라도 개선될 수 있는 사회는 절대 시시하지 않다.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은 도리어 해보고 싶은 마음을 만들고 작게라도 기대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사회의 근본적인 역동성을 만들어낸다. 도리어 시시한 것은 좋은 상태 그 자체라기보다 더 변화할 것이 없는,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것에서 온다.

 

청년수당 논란을 두고 ‘한국, 참 시시한 사회다’라는 말을 한 청년이 남겼다. 정말 그렇다. 지금까지 우리가 본 사회는 정말 시시한 사회였다. 다만, 바람이 있다면 앞으로의 날들은 그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도 시시하지 않은 사회에서이길 바란다.

 

 

권지웅 / 서울 청년정책네트워크 운영위원장, 민달팽이주택협동조합 이사장

2016.1.20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