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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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김사과 산문집 『0 이하의 날들』

어떤 자유는 젊음 바깥에 있다
-김사과 산문집 『0 이하의 날들』

 

 

jytjt김사과의 소설에는 언제나 작가의 육성이 실려 있었다. 그의 소설들이 남다른 흡인력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도 문면의 배후에서 들려오는 작가의 절박하고도 날선 목소리 때문이었다. “세상이 나를 향해 무너져내리고 있다.”(『02』, 70면) “삶이 점점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풀이 눕는다』, 161면) 이런 말을 고통스럽게 내뱉는 김사과의 소설은 동시대 젊은이들의 곤궁한 물질적·정신적 처지와 그들 삶의 근간을 이루는 사회적·경제적 현실을 날것의 생생함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다음과 같은 대목은 최근 유행중인 소위 ‘흙수저론’의 기본 정동을 일찌감치 파악한 것이기도 했다. “난 망해본 적이 없어. 망하는 게 뭔지 몰라. 왜냐면 처음부터 망했거든. 난 태어날 때부터 인생이 쭉 이런 상태였어.”(『천국에서』, 282면) 이런 맥락에서 김사과의 소설은, 그것을 쓴 사람에게나 읽는 사람에게나, 우리 시대의 각종 난제들이 뒤엉켜 만든 청년문제를 직시하여 해결해보고자 하는 일종의 도전과도 같았다.

 

그가 등단 십년을 넘기며 올해 초 내놓은 산문집 『0 이하의 날들』(창비 2016)은 각별하다. 소설 너머에서 들끓듯 들려오던 그녀의 목소리는 이 산문집에서 이지적으로 잘 정련돼 있다. 간결하면서도 예리한 논리의 전개를 보고 있으면 그의 소설에 대한 세간의 평이 이 작가가 얼마나 지성적인 작가인지를 알아보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언어, 공간, 예술, 세대, 테크놀로지, 감정, 가족, 연애 등등 글의 소재는 제각각이어도 김사과의 산문은 정확히 한 지점으로 곧장 나아간다. ‘지금-여기’라는 괴이한 시공간, 곧 망할 듯한 괴물 같은 ‘이 세계’의 핵심. 그곳을 파고들기 위해 김사과는 술주정뱅이, 게임중독자, 사이코패스, SNS와 스마트폰 사용자, 노인과 청소년, 테러리스트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이같은 문제적 인간형의 등장과 확산이 방증하는 우리 시대의 무의식을 간취해낸다.

 

우리 시대의 무의식, 내재된 가능성

 

문화비평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한 독창적이고 설득력있는 분석이 이 책 곳곳에 흩어져 있는데, 그중에서 영화 「다크 나이트」의 악당 ‘조커’를 재해석하는 대목은 어쩐지 김사과의 소설에 대한 작가 자신의 설명인 듯도 싶어 흥미롭다. 조커가 돈에 불을 지르는 유명한 장면에서 김사과는 왜 조커가 흔해빠진 악당과 다른 존재인지를 분석한다. 궁극적으로 기껏해야 돈을 추구할 뿐인 악당은, 게임의 룰을 벗어나 있지 않은, 그래서 체제에 근본적인 위협이 될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게임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의 욕망, 즉 이 세계를 불태워버리고 싶다는 (그러니까 김사과의 소설에 자주 나오는 인물들의 그)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조커는 경제학이 상정하는 합리적‧효율적 인간상을 무너뜨리는, 엄청난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는 것이다. 이런 주체가 그토록 끔찍한 악당으로 그려진 것이야말로 자본주의체제가 자신의 내부로 수렴되지 않는 기이한 주체에게 느끼는 공포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지금보다 나은 세계를 바라는 한 사람의 입장에서 조커의 그 섬뜩한 미소를 좀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조커의 미소에 놀라 굳어버리는 우리들은 겁에 질려 진정한 가능성을 혼란과 파괴로 오해하고, 일시적인 평화를 위해서 기꺼이 외부의 권위에 복종하는 오판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늘어선 감시카메라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게 아니라 공포의 실체와 대면하는 게 아닐까. 조커의 일그러진 미소에서 왜곡되어버린 자유와 저항의 가능성을 발견할 때, 비로소 고담 시는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189면)


조커의 저 ‘섬뜩한 미소’를 우리는 김사과의 소설들에서 익히 본 적이 있지 않은가. 그 섬뜩한 미소를 피하지 말고 자세히 들여다보라는 말은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는 자신의 소설을 제대로 읽어달라는 요청으로도 들린다. 그리고 그 섬뜩한 미소 속에 ‘자유와 저항의 가능성’이 담겨 있다고 말할 때, 이것은 김사과의 기왕의 소설들에 대해서 우리가 부여할 수 있는 최대치의 찬사가 무엇이었던가를 다시 떠올리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것을 거꾸로 뒤집으면 영화 속 조커의 한계가 곧 김사과 소설의 난관과 다르지 않다는 말도 된다. 그의 소설은 불행한 젊은이들의 분노를 동력으로 삼아 그들을 억압하고 구속하는 이 세계와 기성세대를 향한 한편의 복수극으로 달려가곤 했다. 그를 두고 지금-여기의 바깥을 사유하고자 하는 본래의 의도를 충분히 실현시키지 못하는 서사라고 유보적인 태도를 표명하는 평자들도 있었다. 저자가 이 책의 서문에서 자신의 20대를 돌아보며 쓴 “무모함과 무기력의 악순환”(8면)이라는 표현이 그의 소설과 무관하지 않게 들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성숙한 자유와 저항의 길

 

그러나 어쩌면 이제 김사과는 좀 다른 소설을 쓰게 될 것 같다. 그것을 우리는 이 책의 앞부분을 읽으면서 예감할 수 있다. 2장에서 ‘무엇을 쓸 것인가’라는 질문을 본격적으로 던지는 김사과는 세계와 잘 싸우는, 설득 가능한 비전을 품은 소설을 쓰고자 하는 리얼리스트로서 결심한다. 손쉬운 허무주의와 비관주의를 경계하겠다고, 또 ‘문학적 윤리’를 일종의 알리바이로 삼아 안주하는 태도도 지양하겠다고. 그리고 다음과 같이 스스로에게 묻는다. “여기는 대체 어떤 세계이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다시 말해, 무엇을 써야 하는가?”(92면) 그리고 3장에서 그가 들려주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그가 앞으로 쓸 소설이 어떤 종류의 싸움을 하게 될지를 예측할 수 있게 한다.


젊음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인 이유는 그 시기에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일종의 면제 상태, 무죄의 시기. 젊은 시절의 자유란 그런 것이다. 그것은 한 개인의 통제 밖에 놓인 행운이다. 하지만 그런 선물 같은 자유만이 자유인 걸까? 반대로 긴 시간을 통해서, 사회적 속박과 개인의 일차원적 욕망에 함몰되지 않기 위한 노력을 통해 실현 가능한 자유가 존재하며, 그것이야말로 가치 있는 자유가 아닐까? 그렇다면 자유야말로 노인의 덕목이자 성숙의 징표일지도 모른다. (…) 그동안 나는 젊음이라는 한 종류의 자유에 지나치게 속박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것이 언젠가 사라질 것을 슬퍼하고 또 두려워했다. 하지만 사실 그럴 필요가 없다. 다른 종류의 자유를 찾으면 되니까.(170면)


이 글을 두고 김사과가 자신의 이십대에 보내는 만가(輓歌)처럼 보인다고 말하면 과장이 될까. 요컨대 지금껏 김사과는 젊은이들에 대해 젊음의 형식으로 이야기해왔다. 무책임할 수 있었고, 그래서 무엇이든 말할 수 있었고, 그렇게 자유로웠다. 그러나 삼십대가 된 김사과는 그런 “선물 같은 자유”에 만족하지 않겠다고, “다른 종류의 자유”를 찾아가겠다고 말한다. 진정한 의미의 자유는 어쩌면 젊음 바깥에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그의 발견이 내게는 의미심장해 보인다. 그리고 그런 자유는 “긴 시간을 통해서” 획득될 수 있을 것이라는 그의 짐작도 내게는 소중하게 여겨진다. “사회적 속박과 개인의 일차원적 욕망에 함몰되지 않기 위한” 투쟁은 그야말로 일정기간 동안 행해지고 끝나는 한바탕 불꽃놀이가 아닐 것이다. 내 인생을 걸고, 내 인생 위에서 펼쳐야 할 그 긴 투쟁은 눈 딱 감고 돈에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 젊은이들은 너무 오랫동안 젊기만 했기 때문에, 젊음의 형식만이 유일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지금-여기에서 실현 가능한 혁명의 새로운 형식을 고안해낼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긴 시간을 통해 실현 가능한 자유, “노인의 덕목이자 성숙의 징표”인 그 자유를 찾는 길을 이 작가가 더듬어 나간다면, 나는 앞으로도 계속 그의 성실한 독자로 남아 그를 응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고뇌는 바로 나의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신샛별 / 문학평론가

2016.3.9.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