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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가 인공지능에 관해 던지는 질문들

배명훈

배명훈

세상에는, 차지하고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이 그로 인한 이익보다 훨씬 커서 점령하기를 포기해야 하는 대상들이 존재한다. 세상 자체도 그중 하나다. 지구를 점령하는 일은 인간이 만든 제국의 관점에서도, 머나먼 우주를 날아온 외계인에게도 그다지 이득이 되는 장사가 아니다. 인간성을 초월한 기계에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간이 기계에 지배당하는 날이 온 것일까?” 알파고가 이세돌 9단에게 압승을 거둔 날 언론매체 곳곳에서 튀어나온 물음이다. 생각보다 얻을 게 많은 질문은 아니므로 일단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보자. 사람들은 왜 저런 질문을 던지는 걸까? 더 적절한 질문이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질문이 나온 데는 SF의 책임도 적지 않을 것이다. 과학소설(Science Fiction)이 독자적으로 만들어낸 질문은 아닐지라도, 이 질문이 구체적인 모습을 얻게 된 데에는 과학소설에서의 사고실험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지겨울 정도로 오래 지속된 사고실험이었으니까.

 

인간을 지배하기 전에 기계가 거쳐야 할 과정들

 

인간을 지배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사게 되기까지 기계는 최소한 두가지 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리고 이 각각의 단계를 형상화하기 위해 과학소설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첫번째는, 기계가(로봇 혹은 인공지능이) 마침내 인간성을 획득하는 과정이다. 과학소설의 세계에는 이런 형식의 이야기가 수없이 많다. 심지어 “어떤 방식으로든 집안일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로봇이 인간성을 획득하는 ‘소설’”로만 한정지어도, 금세 짧지 않은 목록을 작성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거기에 또 신작이 나온다. SF 창작자들에게 이 문제는, 더이상 유사성이나 진부함을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핵심적인 탐구 대상이 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런 형식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기계가 인간성을 획득하는 순간 자체가 아니라, 그런 본질적인 변화를 촉발하는 최초의 작은 계기다. 우연히 들은 한 곡의 음악이 될 수도 있고, 대기 상태에 들어가 있는 동안 알 수 없는 오류로 인해 꾸게 된 꿈일 수도 있다. 그 계기가 만들어낸 작은 파문이, 마침내 영혼 없는 기계를 돌이킬 수 없는 모종의 결정적 변화로 이끌어내는 과정을 묘사하면서, 작가는 우리 인간성의 본질에 관해 이야기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묻게 되는 하나의 질문이다. “무엇이 존재를 인간으로 만드는가?”

 

두번째는, 그렇게 인간성을 얻게 된 기계가, ‘기계’로 통칭되는 고유의 효율성과 초월성, 혹은 존재론적인 방대함 등을 통해 인간의 지성이나 인지능력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새로운 단계의 존재로 넘어가는 순간이다. 농담을 이해하고 혁명을 돕는 슈퍼컴퓨터나 행성의 반구 하나씩을 책임지고 있는 단 두대의 컴퓨터, 인류의 유전정보를 모두 보존한 채 멸종 이후 지구의 절대고독을 굳건하게 견뎌내는 관리자 시스템 등은 모두 이런 상태에 접어든 존재들이다.

 

박성환의 단편소설 「레디메이드 보살」에 등장하는 인간성을 획득한 청소 로봇이, 비단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열반에 이르는 단계에까지 치달아가듯 이 두번째 단계와 첫번째 단계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둘은 성격이 다르다. 인간성의 발견이 주는 경이로움도 물론 울림이 크겠지만, 이 두번째 경이로움은 좀더 독특한 방식으로 아름답다. 우리 인간은 끝내 직접 느껴볼 수 없는 새로운 영역에 펼쳐진 경이로움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바로 또다른 질문이 등장한다. “그 존재는 과연 무엇을 보고 느끼는 걸까?”

 

대결이라는 형식의 상호작용

 

이 두 가지를 전제하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인간을 지배하는 기계를 상상하게 된다. 과학소설에서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인도 신화에 나오는 악마들처럼, 그 기계는 그렇게 단련되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은 기계여야 한다.

 

여기에 다시 승부의 문제가 제기된다. 사람들이 알파고의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게 된 것은 그 능력이 펼쳐지는 장이 승부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문제가 된 인공지능이 최고의 소설을 써내는 기계였다면 이 존재가 이루어낸 성과를 지금처럼 이론의 여지없이 빠른 시간 안에 평가해낼 수 있을까. 쉽지는 않을 것이다. 문학의 성취와 그 성취를 평가하는 일은 경기의 승패와 경기 해설처럼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는데 평가할 수 있을까? 예술은 그러기 어렵다. 그런데 바둑에서는 가능한 모양이다. 심지어 그 압도적인 승리와 패배로 인해, 그동안 축적된 인간의 이해를 오히려 재검토해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될 지경이다. 승부가 지배하는 영역의 장점인 셈이다.

 

물론 단점도 생각해볼 수 있다. 지배와 피지배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 역시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이 승부의 형태를 취한 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경기에서의 승부는 전쟁과 지배의 승부가 아니다. 승리는 달갑고 패배가 씁쓸하기는 하겠지만 이 승부에서는 승자와 패자 중 어느 한쪽도 완전히 부정될 필요가 없다. 전쟁이 아니라 경기이기 때문이다. 어떤 수사로 묘사되든 경기의 본질은 승패를 가르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상호작용이다. 승리와 패배 양쪽 모두로부터 위대함을 발견해낼 가능성이 있는 통제된 투쟁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질문을 던지는 게 맞을까?

 

경이로움을 빚어내는 기계

 

SF가 현실화되어 생중계된 세상이다. 인간의 지평을 뛰어넘는 수, 실수인 듯 보이지만 충분히 진행되기 전까지는 실수인지 묘수인지 판단할 수 없는 움직임, 어디가 한계인지 알 수 없는 깊이, 기존의 방식으로는 이해하기조차 쉽지 않은 압도적인 경이로움을 지닌 어떤 존재, 그리고 그 존재를 어렴풋이 이해하기 시작한 빼어난 한 사람. 낯익은 이야기가 기시감처럼 흘러가지만, 진부하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은 경이로움이다. 몇번은 더 반복될 이 순간을 앞에 두고 과학소설 작가가 던질 질문은 아무래도 이 두번째 질문일 것 같다. “그 존재는 과연 무엇을 느끼고 본 것일까?” 물론 인간의 방식이 아닌 그 존재 나름의 방식으로.

 

인간에 대한 무언가의 지배는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 중이다. 그 무언가의 자리에 기계를 놓을 수도 있음은 물론이다. 그렇다고 그 지배가 『터미네이터』 시리즈에 나오는 것과 같은 극단적인 방식일 리는 없다. 이 두가지를 염두에 두고, 이런 결론을 내려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을 넘어, 알파고가 가닿아 있는 그 경지 또한 인류문명이 이루어낸 위대한 성취의 하나일 거라고.

 

 

배명훈 / 소설가

2016.3.16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