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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류 포터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이사야 벌린 『낭만주의의 기원』

모더니티와 화해하기
-앤드류 포터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이사야 벌린 『낭만주의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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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이란 어려운 말을 끌어들이지 않고는 지적인 대화에 끼어들 수 없던 1990년대 말의 일이었다. 그때에도 나란 인간은 농담을 만드는 일에 열중하였고(성공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마침내 내 딴에는 제법 재미있고도 지적인 우스개 하나를 만들었다. "있잖아, ‘ㄱ’자로 시작하는데 듣는 사람을 헐뜯는 말이 뭔지 알아?" 친구는 눈을 부릅뜬 채 나한테 쏘아붙였다. “그래 알지, ‘김태권’!”

 

물론 내가 바란 답은 그게 아니었다. ‘ㄱ’자로 시작하는 헐뜯는 말이 시대마다 변했다는 말이 하고 싶었다. ①거리에서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던 90년대 초에는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에 ‘겁쟁이’라는 말이 나빴고, ②문민정부가 시작되던 90년대 중반에는 전향을 거부하는 단호한 태도가 칭찬받았기 때문에 ‘개량주의자’라는 말이 욕처럼 쓰였다. ③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하던 90년대 말에는? 모더니티를 청산해야 할 적폐로 보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정답은 ‘근대주의자’였다.

 

겁쟁이와 개량주의라는 말에서 헐뜯는 느낌이 사라진 지 오래다. (김태권이라는 말도 이제 좋은 뜻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그런데 근대성, 모더니티라는 말을 싫어하는 분은 요즘에도 가끔 마주친다. 여러 성인병이 현대 문명 때문이라며 서양 의학을 거부하고 자연 치유를 고집하는 분이 많다. 나라면 그런 승률이 낮은 도박에 내 인생을 걸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다. 어떤 분은 자녀의 인생도 베팅한다. 일전에 만난 분은 아이에게 대안교육을 시키며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TV, 인터넷, 모바일을 접하게 하지 않겠다’고 각서를 썼단다. 아이가 자란 다음에는 어찌하실 생각인지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근대성에 사로잡힌 꽉 막힌 사람으로 보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모던한 사회의 우울한 우리

 

모더니티가 악당 취급을 당하는 이유가 뭘까. 오늘날 우리 사는 게 즐겁지 않아서다. 모던한 생활의 짜증나는 이모저모에 대해 끝도 없이 긴 목록을 만들 수 있다. “우리는 가짜인 것, 포장된 것, 인공적인 것들이 넘쳐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어디로 눈을 돌려도 터무니없는 광고나 거짓말을 일삼는 정치인을 피할 길이 없다. (우리는 비슷비슷하게 생긴 집에서 살고) 영양가 없는 패스트푸드를 먹고, 짜인 각본대로 흘러가는 ‘리얼리티’ TV쇼를 보고, 패키지 여행상품으로 휴가를 즐긴다.” 앤드류 포터(Andrew Potter)의 『진정성이라는 거짓말』(노시내 옮김, 마티 2016)이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인데, 구절구절 공감이 간다.

 

이 책은 모던한 사회에서 정작 우리는 즐겁지 않다는 사실을 직시하면서 시작한다. 남이 보면 아주 잘 살고 있는 사람도 정작 자기 자신은 겉돌고 있다고 느낀다. 이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 있다. “비판자들은 근대의 이런 모든 문제점을 간단히 ‘소외’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모더니티 때문에 우리가 느끼는 불편함을, 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질병이 없는 건강한 상태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영미권의 많은 사람이 이를 ‘진정성’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정말 그런 상태가 존재할지에 대해, 이 책은 회의적이다.

 

적지 않은 만화가가 그렇다고 알고 있지만, 나는 저녁마다 피곤하고 드러눕고 싶다. 알려지지 않은 질병 때문일지도 모른다(사실은 운동부족 때문이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건강한 상태가 된다면 하늘을 날 수 있을까? 그런 날은 오지 않을 터이다. 원래 내 몸에 날개는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원래가 이렇게 생겨먹은 존재다.

 

날개의 비유는 내가 만든 이야기지만, 질병과 건강의 비유는 이 책에 나오는 말이다. 세상 모든 시름이 사라진 건강한 상태는 원래 없었다는 것이다. 세상 일이 다 그렇듯 모더니티에도 좋은 면과 나쁜 면이 있다. 모던한 생활이 마냥 즐겁지 않다는 점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인류가 겪어온 단계를 돌아보면 이보다 나쁜 생활이 많았다. 최선이 아니라 차악이랄까. 그래서 어쩌라고? 어지간하면 모더니티와 화해하라고, 그게 현명한 길이라고 이 책은 권고한다.

 

두꺼운데다 밀도도 높은 책이다보니, 책장이 술술 넘어가지는 않는다. 그래도 독서가 궤도에 오르면 손에서 놓기 싫을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이 책의 매력은 무엇일까? 우선 재기발랄한 문장이 돋보인다. 특히 6장은 ‘정치에서 진정성 따위 찾지 말라’는 내용인데, 오바마의 선거운동도 비판하고 페일린의 선거운동도 비판하고 두루두루 씹어대는 맛이 일품이다. 또 그 신랄함이 독자 자신을 겨누고 있다는 점도 좋다. 번드르르한 말로 독자한테 아첨하는 책들이(다른 말로 ‘진정성 넘치는 책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읽다가 뜨끔 마음이 찔리는 책이 좋다. 무엇보다도 근대 이후 서양 사상사의 방대한 흐름을 쭉 훑어주는 점이 이 책의 매력이다. 특히 루쏘부터 찰스 왕세자를 거쳐 할리우드 재난 영화까지 이어지는 2장과 디드로에서 시작해 리바이스 청바지를 찍고 베블런의 과시적 소비 이론까지 연결되는 4장이 인상 깊었다.

 

모더니티의 대안

 

이렇듯 얼음에 박 밀 듯이 통쾌하게 풀어가는 글쓴이의 솜씨로 보나, 또 반지성주의 사조에 대한 탐구라는 주제로 보나,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의 『낭만주의의 뿌리』(강유원·나현영 옮김, 이제이북스 2005)을 떠올렸다. 사실 비슷한 내용이다. 모더니티가 등장하며 불편함을 느낀 사람들이 낭만주의에 매달렸고, 그 흐름이 오늘날 진정성을 강조하는 트렌드로 이어지니 말이다. 『낭만주의의 기원』은 과거를,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은 현재를 강조했을 뿐이다.

 

두 책의 한계도 비슷하다. 큰 그림을 그리는 기획이라 당연한 일이겠지만, 디테일이 성글다. 이를테면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의 7장을 보면, 로컬 푸드나 유기농 음식이 진정성 있다고 칭찬받지만 사실 대량으로 생산하고 유통하는 식재료와 큰 차이가 없다고 꼬집는다. 하지만 그 정도 차이는 나처럼 먹는 일에 집착하는 사람한테는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또 마지막 장에서 반전운동을 하다가 이슬람 원리주의에 솔깃한 상태로 넘어가는 지식인의 사례를 들어 그 모순을 지적했는데, 이 부분도 조심해서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전평화운동에 공감하는 사람이 모두 이렇게 어리석지는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이 책이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하며, 책의 주제가 워낙 방대하니 작은 문제도 생긴다고 이해하기로 했다. ‘생은 다른 곳에’ 있다고 믿고 싶지만, 내 삶은 이곳에 있는 지금 이 삶뿐이다. 어디선가 진정성 넘치는 계기 덕분에 내 삶이 뾰족하게 좋아질 일은 없다. 그러니 지금 이 삶이나 충분히 음미하면서 살아보자. 최선이 아닐지는 몰라도 최악도 아니니 말이다. 물론 권태와 우울은 우리 몫으로 고스란히 남을 테지만.

 

 

김태권 / 만화가

2016.4.2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