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어버이연합’, 늙은 허수아비가 아닌 신종 극우파
모든 사람은 부모가 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식을 갖는다. 하지만 특정 집단이 사회적으로 부모를 자처하며 젊은 세대에게 정치적 ‘회초리’를 드는 일은 드물다. 세계현대사에 수많은 극우조직과 우파단체가 존재했지만 ‘어버이연합’이란 이름은 찾을 수 없다. 이 기괴한 이름의 극우집단이 한국사회의 이른바 ‘보수’세력의 전위가 되어 아스팔트를 활보하며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시민사회를 교란한 지도 벌써 10년이 되었다.
‘어버이날’을 맞는 즈음 이제라도 ‘어버이연합’의 흉물스러움이 좀 드러나니 다행이다. 청와대와 국정원과 전경련으로 이어진 커넥션에 대한 질타가 줄을 잇고 있다. 심지어 어버이연합 주변의 극우조직과 ‘보수’세력 들도 그들의 전위와 거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민주적 정상화가 그리 간단하게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에는 지배권력이 다시금 ‘꼬리를 자름’으로써 위기를 모면할 것이고 어버이연합의 역사는 또다른 이름의 ‘아스팔트 노인’ 전위의 등장으로 새롭게 계승될 것이다.
‘아스팔트 우파’의 선봉이 된 노인들
어버이연합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후원한 지배엘리트들을 비판하고 진상을 규명하고 관련 범죄자들을 처벌하는 것은 중요하고 시급하다. 하지만 청와대가 내린 검은 지시의 향방과 전경련이 푼 검은 돈의 흐름만 따질 일은 아니다. 그동안 한국에서 ‘아스팔트 우파’로 성장한 다양한 세력과 집단은 역동적 발전을 거듭하며 이제 내적 분화와 상호 경쟁의 단계로 진입했다.
‘어버이연합 게이트’에 대한 보도를 통해 나는 오히려 그동안 생겨난 극우집단들의 이름을 보며 놀란다. 분단체제가 빚은 기왕의 전투적 반공주의 세력에 더해 기독교 집단의 극우정치 세력화도 주시해야 하고, 일부 청년세대에게서 폭발적으로 등장한 타자 혐오주의의 성장도 여전히 위험하다. 종편방송의 ‘괴물’화와 극우 지식인들의 다양한 결집도 놀랍기만 하다. 게다가 우려했던 대로 탈북자의 일부가 ‘생계형 극우’로 자리잡는 과정도 순식간이다. 야당의 무능력과 비판적 시민사회의 취약을 계기로 한국사회 정치지형의 오른쪽은 끝도 없고 틈도 없다.
그렇기에 ‘어버이연합 게이트’를 통해 정부와 자본권력의 음험함을 고발해 징벌하고 경계하는 것만으로는 이 극우세력들의 역동성과 확장을 막기는 어려워 보인다. 냉전과 분단이 낳은 적대적 타자상과 전투적 반공주의가 다양한 사회적 불만과 집단적 위기의식과 결합하면서 다원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무차별 공격으로 분출되고 있다. 신종 행위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사실 ‘어버이연합 게이트’는 그들 간의 상호 연루와 지원의 과정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경쟁과 암투도 드러냈다. 그 수많은 극우 단체와 조직이 모두 자본과 권력의 조종이나 지시를 받는다면야 해결책은 비교적 간명하겠지만, 문제는 그들이 지닌 고유의 행위동기와 결집욕구가 만만치 않다는 사실이다.
언론이 밝힌 대로, 10년 전 결성된 어버이연합은 초기에 일당 알바가 아니라 노인들의 ‘순수한’ 자발적 열정에 의거했다. 그들은 초라해진 자신의 삶을 긍정해줄 무언가가 필요했고 현재 삶의 불만을 폭발시킬 대상을 찾았다. 그런 그들이 일약 ‘아스팔트 우파’의 선봉대가 된 것은 자본과 권력의 후원 이전에 유희와 결합한 행동이었다. 그들은 피켓이나 플래카드만이 아니라 모형 로켓이나 가면, 심지어 관(고 노무현 대통령의 관)을 들고 나와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나중에 ‘일베’가 고스란히 따라한 그 조롱과 유희의 정치를 선보인 것이 ‘어버이연합’이었다.
그들의 동기를 이해하고 대응해야
중요한 것은 그런 행동을 통해 노인세대 중 일부가 정치적 사회화의 새로운 경험을 만끽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거리에서 고함치고 노래 부르고 퍼포먼스를 하며 웃고 ‘으샤으샤’ 하면서 경험공동체를 만들었다. 그것을 통해 노인들은 그들 나름의 새로운 집단적 정체성을 학습했다. 이번 사건이 발생한 뒤 어버이연합 대표가 보인 어설픈 말들과, 사건의 원인이었던 그들 내부의 돈싸움은 이 행동을 통한 정치화와 정치경험을 통한 집단적 정체성 형성을 가린다. 사회분석에 기초한 정치적 주장이나 강령적 요구가 아니라 다원주의 거부와 타자 배제를 전면에 내건 행동주의, 그리고 그것을 통한 새로운 정체성 탐색에 주목한다면 그들은 20세기 냉전의 유제(遺制)가 아니라 오히려 21세기 지구적 현상으로 등장한 신종 극우파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어버이연합이 ‘어버이 세대’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국 곳곳에서 종일 종편 에 눈과 귀를 맡기거나 소일거리를 찾아 떠도는 노인세대가 새롭게 정치적 사회화를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얼마 전에도 종로의 한 까페에서 나는 한 노인이 다른 노인을 ‘의식화’하는 것을 보며 그들의 ‘젊은’ 혈기에 화들짝 놀랐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흘깃 본 그들의 탁자에 놓인 커피는 분명 한잔이었다. 노인들은 가난해 보였고 ‘화려한’ 과거에 대해 오래 얘기했다.
과연 우리는 늙음이 강령이 되고 과거가 무기가 되는 이 현실을 극복할 수 있을까? 위기와 불만의 시기에는 누구나 자신의 생애사와 현재의 삶이 지닌 의미를 새롭게 찾는다. 노인들이 마냥 ‘박정희 향수’ 때문에, 탈북자가 순전히 일당 때문에 ‘아스팔트’로 몰려왔다고 볼 수는 없다. 그들 또한 고유한 동기와 나름의 사연을 가진 독자적 행위자다. 그들이 자신의 삶이 놓인 현대사의 얽힌 연관관계를 이해하도록 보조해주어야 한다. 그들이 집단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삶의 불만과 위기가 사회적으로 소통되도록 안내해야 한다.
우리가 ‘아스팔트 노인’들을 한낱 권력과 자본의 주름진 허수아비로 보는 순간 그들은 다시 모여 앉아 ‘노병은 죽지 않는다’(어버이연합의 초기 구호)고 서로 격려하며 새로운 소외의 경험을 모을 것이다. 그리하여 정치와 사회, 가족과 지역 공동체에서 마땅한 자리를 갖지 못한 그 ‘지공선사’들은 곧 다시 종로로 몰려들 것이다. 그들을 낡은 냉전의 늙은 퇴물이 아니라 신종 극우파로 대접하자. 그래야 제대로 대결해 극복할 수 있고 안내하고 보조할 수 있다.
이동기 /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
2016.5.4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