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이야기가 들린다
청명하게 푸른 하늘에 오색으로 나부끼는 타르초. 그 타르초에는 티벳의 불교 경전이 씌어 있다고 한다. 바람을 따라 경전의 말씀이 세계의 곳곳으로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은 것이다. 아름다운 이야기다. 그래서 가끔씩 눈을 감고 상상하곤 했다. 평소에는 잘 들리지 않는 이야기들이 이렇게 바람을 따라 세계로 퍼져간다면 어떨까.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면.
요즘 내 귀에는 바람(風/願)을 타고 이 세계를 떠돌고 있는, ‘낡았지만 새로운’ 이야기들이 들린다. 그 이야기는 수백년 혹은 수천년을 반복되어왔기 때문에 낡았으나, 이제까지와는 다른 인식론과 다른 매체, 그리고 다른 역능을 따라 이 세계로 퍼지고 있기 때문에 완전히 새롭다. 강남역 10번 출구를 비롯해서 전국 곳곳에 마련된 추모의 공간에 여성들이 붙이고 있는 색색의 포스트잇 위에 씌어진 여자들의 이야기, 나는 그 이야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우리는 살아남았으며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언니 나는 잊지 않을 거예요 / 내가 살해당했다면 네가 이 자리 이곳에 와주었겠지 / 나는 여전히 알고 싶다. 네 꿈은 뭐였니? / 살여(女)주세요. 넌 살아남(男)잖아 / 오빠가 지켜주는 사회 필요없고요. 물론 오빠도 필요없음 / 내가 될 수 있었던 그 죽음, 다음엔 내 차례일 수도 있다는 공포 / 다른 여자 대신 우연히 살아 있습니다 / 여성은 ‘퀘스트 보상’이 아닙니다. 당신과 같은 ‘플레이어’입니다 / 남자들은 여기서도 여자들을 가르치려 한다 / 우리는 살아남았으며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stop misogyny!”
타르초와도 같은 포스트잇에는 애도, 슬픔, 불안, 공포의 마음들과 당신이 바로 나라는 각성, 잊지 않겠다는 선언, 그리고 세상을 바꾸어나가겠다는 다짐 등이 깨알같이 쓰였다. 우리는 그녀의 이름을 모른다. 그녀는 하나의 이름이 아니라 ‘여자’라는 이름으로 이 세계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였고, 너였거나, 그렇게 우리였다. 그래서 ‘우리’는 말한다.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여성들은 강남역 사건을 ‘여성혐오 살인사건’이라고 명명함으로써 그 이면에 놓인 거대한 구조인 가부장제를 드러냈다. 그리고 이렇게 세계를 보는 관점에 젠더라는 문제의식을 기입한 것은 공식적이며 이성적인 언어를 통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난 몇년간 온라인을 중심으로 퍼지기 시작한 여성들의 재잘거림(tweet), 소문, 언어유희(mirroring)와 같은 이야기들을 통해서 시작되고 벼려진 통렬한 자기 인식과 각성의 결과였다. 그래서 ‘가부장제’나 ‘남성중심주의’ 등 한국사회의 성체계를 설명하는 다른 어떤 용어보다도, 최근 여성 대중 사이에서 흔하게 사용되고 있는 ‘여성혐오’라는 개념이 선택됐다. ‘여성혐오’라는 규정은 여성들의 공유된 기억으로부터 터져나온 일종의 외침이었고, 그렇게 여성들이 그간 어떤 삶을 견뎌왔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구호였다.
낡은 인식을 뒤바꾼 여성들의 외침
이 사건이 여성들에게 무엇보다 ‘여성혐오’ 사건으로 닥쳐온 계기 중 하나가 언론의 선정적이며 남성중심적인 보도였음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언제나처럼 언론의 언어는 남성의 좌절된 꿈과 생활고, 정신건강 상태를 강조했다. 그 기록 안에 여성은 존재하지 않았고, 여성의 이야기는 말소되었다. 그렇게 남성의 언어는 이 사회의 낡은 성체계인 가부장제를 드러내는 사건의 충격을 흡수하여 이번 ‘5‧17페미사이드’를 젠더계급과 무관한 사건, 이 사회의 일탈을 보여주는 하나의 돌출된 ‘사고’로 기록하려고 했다.
이와 함께 ‘법리적 해석’이나 ‘정신의학’과 같은 과학의 언어는 단편적인 정보와 지식에 기반하여 이 사건을 여성혐오가 아닌 ‘정신질환자의 우발적 범행’으로 몰아갔다. 그리고 그 단순하기에 오히려 엄밀해 보이는 말들은 결국 ‘정신질환자 감금 확대’라는, 장애인 혐오에 기반한 또다른 폭력의 재생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언어가 지배층에게 이 사건을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변명거리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여성혐오 범죄임을 인정하지 않는 그 여성혐오적 태도는 또다른 혐오로 계속해서 확장되어간다. 여성차별과 억압의 구조라는 근본적인 문제의 맥락을 회피하고 단순화시킬 때, 우리가 맞이할 세계는 혐오와 증오를 지배의 기술로 선택한 파시즘의 사회일 뿐이다.
그러나 여성들의 기억은 이야기를 만들어냈고, 그 이야기는 살아남아 이 사건을 새롭게 기록하고 있다. 좌충우돌 끝에 언론은 비로소 다양한 추모의 공간에 용기를 내어 나선 여성들의 움직임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여성들의 이야기가 사건의 해석을 바꾸어낸 것이다. 포스트잇은 이처럼 기존의 언어와는 완전히 다른 기록이다. 그것은 공식적인 기록과 역사에 틈입하는 새로운 아카이브다.
더 많은 목소리를 기다리며
“너의 잘못이 아니야 / 이젠 컵라면 드시지 말고 맛있는 거 많이 드세요 / 비정규직은 혼자 와서 죽었고, 정규직은 셋이 와서 포스트잇을 뗀다.”
그리고 2016년 5월 30일, 구의역, 스크린도어 위. 또다른 포스트잇이 붙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죽음을 조건으로 하는 노동으로 내몰렸던 또 하나의 생명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강남역 살인사건 희생자를 비롯하여 한국사회에 만연한 죽음들이 고통스럽게 외치고 있는 하나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다시 전한다. “평등해야 안전하다.” 그의 죽음은 노동자에게 ‘생존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내놓고 일하라고 강요하는 국가와 자본’의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이 아이러니를 둘러싸고 생성되고 있는 이야기들은 과연 이 사회에 도달할 수 있을까. 더 많은 지워진 이야기들이 세상에 들려오기를 바란다. 그리고 변화가 이 이야기들의 역능과 함께 시작되기를.
손희정 / 문화평론가
2016.6.1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