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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권일 외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극우주의라는 오랜 현재
- 박권일 외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jyykr올 상반기 미국에서 가장 크게 일어난 소란 중 하나는 바로 미 공화당 측 대선후보로 나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일 것이다.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비롯한 부도덕한 언사를 쏟아내는 데 주저함이 없는 이 ‘부동산 졸부’를 향한 미국 백인 중도층 남성들의 지지는 그러나 새로운 것이 아니다. 나치의 인종차별적 정신을 계승한 것이 문제시되어 위헌 소송중인 독일의 네오나치(NPD), 신자유주의적 기조를 채택하며 도래한 경제위기의 원인을 이주노동자 문제로 돌리는 등 자국민중심주의를 통해 인기를 얻고 있는 프랑스의 국민전선(FN) 등, 극우정당이 득세하는 현상은 최근 세계 곳곳에서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민주정부 10년의 성과와 한계를 싸잡아서 ‘잃어버린 10년’으로 매도하는 한편, 북풍과 종북몰이를 통해 배타적 타자를 향한 증오와 원한을 키우는 등, 위기의 원인과 책임을 번번이 외부로 돌림으로써 권력을 잡는데 성공한 ‘이명박근혜’ 정권하의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이 사례들은 경제위기와 중산층의 몰락으로 인한 사회적 고통을 발본색원하기보다는 그에 대한 책임을 ‘외주화’하고 분노를 확대 재생산하는 것, 문제를 개선할 정치적 가능성을 불모화하고 대중의 정념을 사로잡음으로써 권력을 차지하는 것을 자체 동력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이는 다수의 합의가 곧 권력이 되는 민주주의에 내재한 제도적 모순으로 비친다. 그러나 더 우려스러운 상황은 제도정치, 정당정치의 차원을 넘어 말 그대로 ‘극우주의적’ 사고가 사회 전반에 만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를 예비하는 증세로서 우리가 목도한 것이 다름 아닌 ‘일베’라는 문제적 현상이며, 이 글에서 다루려는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자음과모음 2014)는 일베 현상을 중심으로 극우주의의 토양으로서의 ‘현재’를 탐색하려는 의도로 기획된 책이다.

 

근대의 한 귀결로서의 극우주의

 

저자들은 오늘날의 극우주의가 “개별자의 고유한 일탈이 아니라 겹겹의 맥락을 지닌 사회현상”(10~11면)이라는 합의하에 논의를 전개한다. 특히 5장과 6장에서 문순표와 이택광은 극우주의가 근대를 추동하는 계몽의 짝패에 다름 아니라는 견해를 공유함으로써 그것을 전근대적이거나 비합리적인 것으로 손쉽게 치부하려는 태도를 경계한다. 예컨대 19세기 제국주의적 자본주의가 세계전쟁이라는 파국으로 귀결한 상황에서, 민족(Volk)이라는 상상적 네이션을 동원하여 기존의 자본/국가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려는 시도로 창궐한 것이 바로 파시즘이라는 것이 문순표의 설명이다. 비록 그 결말은 더 큰 파국이었을지언정 그 발단은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려는 계몽주의적 사고방식에 있었다.

 

한편 이택광은 위로부터의 입법을 통한 ‘지배’와 아래로부터의 규범을 통한 ‘복종’이 상호작용하는 근대 민주주의 사회의 수평적 권력을 파시즘이 성립할 수 있는 근거로 들고 있다. 이때의 복종은 전근대사회의 수직적 군주권력에 대한 복종과 달리, 특정한 지배 제도나 장치에 국한하지 않고 도처에 편재하는 규율을 내면화하고 훈육된 주체가 지배세력의 입장과 교호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파시즘을 위시한 극우주의는 예외적인 일탈이나 광신이 아니라 “근대의 원리에 내재하고 있는 권력작용의 극단화”(222면)로 보아야 설득력있다고 이택광은 말한다.

 

스펙터클의 극대화로 지지율을 끌어올렸던 나치 전당대회에서 드러나듯이, 무엇보다 파시즘의 성공요인은 합리성의 자리를 정동(affect)으로 대체하는 ‘정치의 심미화’에 있었다. 이 또한 화폐라는 추상적 매개를 통한 상품화에 능숙한 자본주의 사회가 이성적 토론이나 대화가 아닌 정동의 교환을 통해 소통에 이를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226면) 페이스북의 더 많은 ‘좋아요’가 온라인상에서 논의의 흐름을 좌우하는 오늘날, 합리적 의사결정을 통한 정치의 가능성은 심미적 정치에 점점 더 많은 자리를 내어주고 있는 듯 보인다.

 

인터넷이라는 심미적 정동의 세계

 

일본의 ‘2ch’이나 한국의 ‘일베’에서 드러나듯이, 정동의 자유로운 교환에 탁월한 인터넷이라는 매체는 확실히 극우주의가 득세하기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 일베가 지역주의 같은 극우적 담론을 단순히 동어반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자발적으로 초과 실천하는 이유도 매체적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박권일은 1장에서 일베가 작동하는 양상을 상세히 조명하며 ‘주목경제’(attention economy, 43면)라는 개념을 언급한다. 일베의 유저들은 극우적 헤게모니를 차지하고 사회적 명성을 얻기보다는 주목받으려는 열망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사회적 금기를 위반하며 패륜을 서슴지 않는 그들의 태도 또한 주목경제하의 경쟁전략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관심을 받기 위한 욕망의 동인만으로는 일베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그들이 광주항쟁의 피해자나 세월호참사의 희생자 같은 약자들을 공격하는 또다른 동인으로 박권일은 ‘상상된 착취’(imagined exploitation)를 든다. 주류권력과 강자들에게는 스스로를 상상적으로 동일시하는 한편,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들이 자신의 몫을 부당하게 착복했다는 피해의식이 작용하는 것이다. 이때 실제로 자신의 몫을 앗아가는 주체는 바로 그들이 동일시하고 선망하는 강자, 즉 국가와 자본이기에 이 상상의 서사에는 출구가 없다. 피해의식을 승화시키기 위한 더 많은 정동의 분출만이 가능할 뿐이다.

 

정치적 반정치의 공회전을 멈추자

 

피해의식을 정동으로 굴절시켜 가상의 적에 투사하는 패악의 유희는 정치적으로 연소되어야 마땅할 에너지를 반정치적으로 불완전 연소시킨다. 이처럼 극우주의에 사로잡힌 대중의 반정치적 에너지는 한국사회에서 주류권력이 정치생명을 유지하는 연료로 오랫동안 기능해왔다. 3장에서 김진호가 상술하듯이 한국전쟁 직후 1960~80년대에 걸쳐 반민주정권이 장기집권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다름 아닌 반공주의라는 ‘증오의 정치학’이었다. 신권위주의체제로 정의되는 이 시기 동안 국가는 “한국전쟁을 ‘반공’이라는 증오의 감정으로 기억하게 하고, 그 증오를 사회 발전이라는 동력으로 전화”(112면)시킴으로써 체제를 정당화하였다. 국가는 북풍몰이를 통해 반공이라는 국민적 증오를 대행하는 주체로 자처함으로써 파괴적 증오를 생산적 증오로 통제 및 관리해왔다는 것이 김진호의 주장이다.

 

과거 반공주의로 상징되는 증오의 감정이 물리적으로 거리가 있는 외부의 적을 향했다면, 오늘날 특정 지역 출신이나 성소수자, 이성을 혐오하는 감정은 내부의 적을 향하는 형국이다. 즉 반정치적 에너지가 증오나 분노를 넘어 ‘혐오’로 갈음하고 있는 오늘날의 사정은 상상된 적과의 거리가 가까워진 데서 기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혐오의 대상 대부분은 당장 우리의 이웃이지 않나. 증오의 대상이 너무 가까울 때 그것은 벌레 만지듯이 몸서리치는 혐오의 대상으로 전화된다. 혐오의 만연은 나를 둘러싼 주변과의 어떠한 상호적 관계도 거부함으로써 반정치적 에너지를 자기파괴적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리는 위험한 상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혐오를 타이틀로 놓고 벌어지는 무수한 싸이버 내전들이 허구적이고 상상된 적에 실체를 부여하는 만큼 지배이데올로기 또한 공고해진다. 이 무익한 공회전의 틈바구니에서 지배권력은 언제나 그래왔듯이 이득을 본다. 언제나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만 같은 이 ‘오랜 현재’를 무너뜨릴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무언가를 ‘실천’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이은지 / 문학평론가

2016.6.15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