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최낙언 『식품에 대한 합리적인 생각법』
결론으로 읽을 것인가, 프롤로그로 읽을 것인가?
-최낙언 『식품에 대한 합리적인 생각법』
위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물에 잉크 한 방울만 떨어져도 맑은 물이라고 보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어떤 이들은 백 퍼센트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지 않으면 위험한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특히 가습기살균제 사태처럼 사회 시스템 안에 정직하지 않은 행위자가 있을 경우 이같은 ‘절대 안전’에 대한 욕구는 더욱 커진다.
물론 현실에서는 ‘백 퍼센트 안전’한 것은 없고, 위험이 어느 정도의 확률로 나타나는가 그리고 그것을 어느 정도로 통제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중요하다. 확률은 객관을 표방하는 데이터지만, 그 데이터를 보고 통제 가능한 위험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은 개인의 주관과 신념에 달린 일이다. 따라서 위험에 대한 개인의 판단은 결국 어느정도는 믿음의 문제 또는 선택의 문제가 된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왜, 믿고 선택할 것인가?
위험에 대한 강박이 가리는 진짜 문제
여기, 항간의 식품안전에 대한 이야기 중 대다수가 ‘불량지식’이며 ‘괴담’이라고, 그런 이야기를 퍼트려 사람들의 불안감을 부채질하는 것은 ‘불안전문가’들이라고 몰아세우는 책이 있다. 안전한 식생활을 위해 생활 속에서 크고 작은 실천을 게을리 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도발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는 소리다. 지은이가 식품공학을 전공했고 식품회사에서 오래 일했다는 소개를 보면 더욱 강한 거부감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낙언의 『식품에 대한 합리적인 생각법: 위험정보 독해력, 불량지식 해독력』(예문당 2016)은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말에 들어맞는 책이다.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달래기에는 군데군데 말투가 거칠고 퉁명스럽지만, 이 책은 “산업화된 식품은 안전하니 닥치고 먹어라”라고 윽박지르는 과학만능주의 책이 아니다. 한두 사람의 체험담과 같은 단편적인 정보로 바로 판단을 내릴 것이 아니라 통계학 같은 과학의 도움을 받아서 과학적으로 생각하는 과정을 거쳐 위험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 이 책 전체의 주제라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질없는 기대와 환상”을 버려야 한다고 지은이는 역설한다. 특정 식품이 장수로 인도할 것이라는 환상, 식품으로 병을 고친다는 환상, 나아가 자연과 옛날에 대한 환상까지도 우리를 미혹할 뿐이라는 것이다. 지은이 스스로가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과학의 결과물보다 과학적 생각법”이라고 밝히고 있듯이, 위험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지인의 체험담이건 ‘권위자’의 주장이건 덮어놓고 믿어서는 안된다. 스스로 자료를 수집하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검증함으로써 스스로 독자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위험 독해력(risk literacy)이 중요하다는 것이 지은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고갱이다. 상당히 긴 분량을 차지하는 각종 ‘괴담’에 대한 반박과 폭로는 사실 이 주장을 입증하기 위한 예시 정도로 가볍게 지나쳐도 괜찮다.
특히 경청할 것은 위험과 불안에 대한 강박이 오늘날의 식생활에서 정작 중요한 문제를 가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현대 식생활의 문제는 뭐가 됐든 너무 많이 먹고 있다는 것인데, 미디어의 음식 관련 정보들은 그 문제를 지적하기보다는 건강과 안전의 문제를 특정 성분이나 제품의 문제로 환원시켜버린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가 없는(○○-free)’ 제품과 ‘○○를 보강한(○○-enriched)’ 음식 제품이 범람하는 미국에서 비만 문제가 가장 심각하다는 것은 이런 환원주의의 폐해를 잘 보여준다. 식생활이라는 복합적 문제를 수퍼마켓에서 무엇을 골라 소비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단순화시켜버리면 해결의 길이 보이지 않는데, 개별 성분이나 제품으로 위험 여부를 따지는 데 매몰되면 이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 불안을 버리고 안심할 수 있는 것인가?
하지만 이런 유용한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마음 편하게 읽지 못할 독자들도 많을 것이다. 특히 “한국보다 까다로운 식품법규를 가진 나라는 없다”라거나 “GM 식품은 불필요할지 몰라도 GM 기술은 반드시 필요하다”라는 주장, “유기농 식품이 반드시 건강이나 자연에 좋은 것일까?”라는 도발적 질문들은, 관련 운동에 몸담거나 한발 걸친 이들에게는 부당한 공격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면 왜 나는 이 책을 추천하고 있는 것일까? 과학만능주의의 편에서 독자들을 계몽의 이름으로 꾸짖는 데 동참하는 것일까? 그런 것은 아니다. 사실 어떤 독자들에게는 불편하게 읽힐 이 책을 굳이 추천하는 까닭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소위 ‘두 문화’ 사이의 골이 얼마나 깊은지 알리고, 거기에서부터 대화의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함이다.
우선 지은이가 곳곳에서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는 퉁명스러움의 정체부터 생각해보자. 실은 이것은 오랫동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다가 쌓인 피로감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 반대로 예를 하나 들어보자. 인문학을 업으로 삼는 이들에게 요즘 방송 등을 통한 “대중 인문학”의 유행은 전적으로 곱게 보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인문학의 본질이 의심하고 질문을 던지는 것인데 방송 시스템을 거치다보면 잘 정돈된 답을 전달하는 것으로 탈바꿈해버리곤 한다. 그렇게 인문학을 접한 이들 중 일부는 의심하고 질문을 던지는 경험으로까지 나아갈 수도 있겠으나, 그렇지 않은 이들이 인문학 전공자들에게 “쉽게 요약해달라”거나, “결론이 뭐냐”거나, 심지어 “그래서 누가 좋은 편이고 누가 나쁜 편”인지 답해달라 조른다면 전공자들은 상당히 곤혹스러울 것이다. 입장을 바꿔서, 과학 전공자들이 비전공자와 이야기할 때 힘들어하는 지점도 다르지 않다. 특히 식품과 같이 모두가 관심이 높고 쉬운 해결책을 바라는 주제라면, “그것을 먹어도 괜찮은가” “그것은 먹으면 어디에 해로운가” “피곤한데 뭘 먹으면 좋겠는가” 같은 질문은 가장 쉽게 나올 수 있는 것이자 전공자들을 가장 쉽게 지치게 만드는 질문일 것이다.
아툴 가완디(Atul Gawande가 최근 칼텍의 졸업식 축사 ‘과학에 대한 불신’("The Mistrust of Science," 2016.6.10)에서 역설했듯이, 과학적 사고는 “직감이 단지 가설에 불과함을” 가르쳐준다는 점에서 “부자연스럽고 비직관적”이며, “학습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과학을 배우는 과정은 나의 일상경험과 직관이 틀렸을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자신의 머리로 문제와 대결하고, 문제가 간단치 않음을 받아들이고, 어떤 문제는 아직까지는 아예 답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내가 애써 찾아낸 답이 언제든 더 나은 답으로 대체될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과학의 자세, 아니 모든 탐구의 자세다. 이상적인 과학자는 과학을 배울수록 오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겸손해지는 것이다.
불안에 압도되지 않으면서 불안을 안고 살아가기 위해
이 책에서 아쉬운 점도 사실 이 부분이다. ‘괴담’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는 활동이다. 그러나 근대과학이 성립한 뒤로 수백년 동안 이런 폭로가 이어졌지만 과학이 불러올 위험에 대해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함은 늘었으면 늘었지 줄지 않았다.
불안이라는 감정은 논리를 들이댄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이성이 인간의 중요한 정신작용이듯, 불안 또한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 진화를 통해 발달시킨 방어장치다. 불안을 비롯한 감정은 자연스럽게 들고 날 뿐이다. 거기에 옳고 그름의 잣대를 대는 것은 이성의 횡포가 아닐까? 합리성의 영역 안에서 출발하되, 인간존재의 불완전성을 직시하고 불안을 이해하고 보듬어 안는 것이야말로 과학자들에게 필요한 겸손한 자세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위험에 대한 논의를 결론짓는 책이 되기는 어렵다. 과학적으로는 이미 합의된 지식들을 소개하고 있지만, 과학계 내부의 합의로 과학계 외부 사람들의 마음속 불안까지 지워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책은 결론이라기보다는 대화를 시작하기 위한 프롤로그로 읽어야 할 것이다. 책에 담긴 양질의 정보를 살리고, 과학적 사고방식의 중요성만 인지한다면, 과학 전문가와 비전문가(시민)가 서로의 입장 차이를 잘 이해하는 가운데 진지하고 건설적인 대화를 시작할 디딤돌이 되는 책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김태호 /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HK교수
2016.6.22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