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노태우 시대를 돌아보게 하는 현 시대의 역행
1987년 민주정의당 대표 노태우의 6·29선언이 발표된 지도 어느새 29주년에 이르렀다. 내년이면 ‘한 세대’ 30년의 시간이 지나게 되는 것이다. 학계에서도 내년의 6월항쟁 30주년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진지하게 진행되고 있다. 우리가 여전히 1987년에 수립된 헌법질서, 소위 ‘87년체제’에 살고 있다는 현실을 감안하면 6월항쟁 30주년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고 미래의 도전적 과제를 제시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이명박과 박근혜 시대에 접어들어 1987년 이래 역대 정부와 시민사회가 꾸준히 추구해온 핵심가치들이 무시·파괴되거나 1987년 이전으로 역진(逆進)하는 현상이 벌어지다보니, 최근 진보진영에서도 ‘노태우 시대’를 적극적으로 재평가하려는 움직임까지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흥미롭게 느껴진다.
내가 겪은 에피소드들
얼마 전의 일이다. 종종 듣던 진보 성향의 팟캐스트 방송을 들으며 길을 걷고 있었다. 그저 걷기의 지루함을 덜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한순간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식간에 지나간 짧은 대화를 다시 들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노태우 시대 재평가해야죠. 노동자 실질임금이 매년 가파르게 상승하고, 복지도 확대되고, 남북교류의 물꼬도 트고.” “맞아요. 재평가해야죠. 지금에 비하면 그때가 정말 좋았어요.” 어떤 비판도 없이 노태우 시대가 그저 ‘좋았던 때’로 묘사되었다. 그것도 모든 출연자들의 절대적 동의와 함께.
비슷한 경험은 또 있다. 우연히 노태우정부의 통일정책 실무를 담당했던 분과 담소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평소 리버럴하면서도 어느정도 진보적 관점을 보여주었던 이 분은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때는 주요 정부정책의 분명한 방향성이 민주화, 남북화해, 교류협력에 있었어요. 그때라고 해서 기존 관료집단과 보수세력의 불만이 왜 없었겠습니까? 오히려 민주화에 대한 거부감이 지금보다 훨씬 강했죠. 그런데 관료집단의 권위주의적이고 상명하복적인 성격이 오히려 모순적이게도 민주주의의 성장에 기여한 부분도 있었던 거예요. 무슨 얘기냐면, 기성 관료집단의 저항이 있을 때마다 ‘대통령의 지시’라는 단서가 붙으면 그대로 관철되곤 했다는 거죠. 그리고 당시 정부의 ‘방향성’은 분명히 ‘민주화’에 있었던 거고요. 사실상 외부의 학생세력과 진보세력의 압도적 영향력 때문에 불가불 선택하게 된, 체제 유지를 위한 민주화였지만, 민주화는 민주화였죠.”
주체와 방향성의 문제
현 시대에 이르러 일부에서나마 노태우 시대에 대한 재평가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아마도 당대와 현 시대의 상이한 정책의 ‘방향성’ 때문일 것이다. 유신시대에나 등장했던 역사교과서 국정화 조치, 지방자치제의 위기, 남북교류의 단절, 세월호사건과 메르스 사태에 대한 책임회피와 적반하장의 태도, 경제민주화 공약 불이행 등은 현 정부가 87년체제(주권재민, 경제민주화, 평화적 남북통일을 지향하는 체제) 이전으로의 ‘롤백(rollback)’을 꿈꾸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기에 충분한 조치들이다(이남주 「수구의 ‘롤백 전략’과 시민사회의 ‘대전환’ 기획」, 『창작과비평』 2106년 봄호). 반면 노태우 시대에는 노동, 복지, 외교, 남북관계 등의 ‘방향성’에 있어서만큼은 최소한 역행이 아닌 진보의 순행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사실에 대해 부인하기가 쉽지 않다.
이를테면 앞서 팟캐스트 진행자들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노태우정부 5년 동안 소비자물가 상승을 반영한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연평균 9.6%, 명목임금은 17.7%씩 매년 상승했다. 집권기간 내내 매년 10%씩 노동자 실질임금이 상승했다는 것은 당시의 경제호황을 감안하더라도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사실이다. 1988년에는 최저임금제도와 전국민 의료보험제도가 최초로 실시되었다. 노동자들에 대한 소득분배가 제대로 이뤄지기 시작하면서 가계저축률이 큰 폭으로 상승했고, 여론조사를 하면 응답자의 과반수 이상이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응답하곤 했다. 노태우정부는 외교와 통일 문제에 있어서도 기존 정부들과 달리 적극적으로 대응해나갔다. ‘7·7선언’과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 소련·중국과의 수교,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남북 고위급회담 진전 등은 그 대표적 예일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노태우 시대의 진보적이거나 평화적인 성과들을 ‘노태우’ 혹은 ‘노태우정부’의 성취로 국한시킨다면 이는 매우 부적절할 뿐 아니라 사실관계에도 부합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노태우정부’는 앞서 언급된 노동과 통일 문제에 있어서도 자신의 공식 정책과는 모순되는 억압적 정책을 수시로 강행하기도 했다. 정부 주도가 아닌 민간 차원의 통일운동과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은 그 대표적 예이다. 당대 통계자료에 의하면 1988년 3월부터 1991년 7월까지 구속된 노동조합 간부와 조합원수는 모두 1539명(하루 평균 1.2명꼴)에 달했고, 1990년 한해만 따져보아도 이영일, 이근태, 박성호, 원태조 등의 노동자들이 정권과 기업에 저항하며 분신과 음독자살로 목숨을 거두었다. 더불어 남북학생회담과 같은 대학생들의 통일운동에 대한 탄압과 방북인사들에 대한 연이은 투옥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노태우정부는 통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민간’ 차원의 통일운동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탄압하고 배제해 나갔다. 이같은 강압적인 탄압의 사례들은 과연 당대 민중의 힘이 거대하지 않았다면 노태우정부의 제반 정책이 얼마만큼이나 진보적 성향을 띨 수 있었을지 충분히 의구심을 갖게 한다.
‘6·29선언’의 사례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노태우정부는 당대의 주도권을 장악한 민중의 목소리를 상당정도 체제 내적으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유지 자체가 쉽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 정부와 기업은 강력해진 노동자들의 목소리 때문에 소득분배에서 노동자들의 몫을 지속적으로 상승시켜주지 않을 수 없었고, 세계정세의 급속한 화해무드에 편승한 통일운동세력의 적극적 활동 때문에 ‘창구일원화’(통일 문제의 정부 주도)를 외치며 통일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상 노태우정부는 민중을 두려워했고, 그들과 치열하게 경쟁했으며, 그들의 목소리를 폭력적으로 억누르기도 했지만 실상 그 상당정도를 끌어안는 방식으로 체제를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요컨대 노태우 시대에 대한 지금의 재평가와 향수의 배경에는 당대 정책의 ‘주체와 방향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함께, 현 시대의 ‘역행’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동시에 자리잡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노태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범죄와의 전쟁」은 이 시대를 ‘나쁜 놈들 전성시대’(영화의 부제)라고 표현하지만, 어쩌면 이 시대야말로 진짜 ‘민중의 전성시대’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민중이 정권을 현실적으로 압박하고 주요 정책에서 치열하게 경쟁했던 시대, 민중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체제 유지 자체가 불투명했던 시대, 권위주의 시대의 강력함을 보여주지 못한 채 민중에게 끌려다닌다는 이유로 보수세력에게조차 ‘물태우’라는 별명으로 조롱당하던 대통령의 시대. 이 시대야말로 어쩌면 진짜 민중의 시대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87년체제의 위기와 시대 역행에 대한 담론이 등장하고 있는 요즘, 노태우 ‘시대’는 새로운 시대를 주도해 나가기 위한 변혁적 ‘주체’에 대한 고민이 중요한 이유를 강변하는 듯하다.
김태우 /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인문한국 연구교수
2016.6.29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