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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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김병익 『기억의 깊이: 두런거림의 말들』

^60C60C5FA51A893AF5A147A6CA0376DC694D5E5C7B4EFBF84C^pimgpsh_fullsize_distr-600x899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이어야 합니까, 선생님

-김병익 『기억의 깊이: 두런거림의 말들』, 문학과지성사 2016

 

김병익 선생님, 처음 인사드립니다. 저는 평론을 쓰고 있는 신샛별이라고 합니다. 글로나마 먼저 인사를 드리기로 마음먹은 것은 선생님의 신간 『기억의 깊이』를 읽은 기쁨을 말씀드리고 싶어서이기도 하고 아울러 선생님이시라면 후배 평론가의 고민을 귀담아 들어주실 것 같다고 미루어 짐작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최근 저는 한국문학을 향한 비난과 조롱의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비평의 역할과 의의를 폄하하고 부정하는 글도 빈번히 만났습니다. 비평을 하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 일의 즐거움과 보람이 무엇인지 또 문학이라는 행위가 어떤 신념을 바탕으로 실천되는 일인지를 이제 조금이나마 깨닫기 시작한 저로서는 요즘의 상황이 난감하기만 합니다. 세간의 흉흉한 소문처럼 비평은 이제 우리 삶과 세계에 아무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교묘한 시장의 논리를 따라 움직일 뿐인, 그야말로 무용한 것일까요. 문학의 위상이 그 어느 때보다 위축되어 있는 지금-여기에서, 한때 ‘88만원 세대’라 불렸고 이제는 ‘n포 세대’라 불리고 있는 저와 같은 세대의 비평가들은 모종의 불안을 느끼고 있습니다. 애초부터 대단한 인정과 보상을 바란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그 공공적 가치마저도 의심을 받고 있는데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 것인가 자문하는 일이 많아진 것입니다. 그 와중에 선생님께서 출간하신 『기억의 깊이』(2016)를 몇해 전 나온 두 책 『이해와 공감』(2012), 『조용한 걸음으로』(2013)에 연이어 읽었습니다. 다른 책을 제쳐두고 이 세권의 책을 탐독한 것은 선생님의 글에서 어떤 답을 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희 세대의 곤경 속에서 문학과 비평이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있는 제게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선생님께서 평생 해오신 일을 4·19세대의 역사적 사명으로 규정하시면서 그 성과를 자부하시는 대목이었습니다. 『기억의 깊이』의 허리에 해당할 ‘표현의 자유를 찾아서’(2장)와 ‘시대 속으로’(3장)에 묶인 글들에서 선생님은 한국문학과 비평의 업적을 한국현대사의 주요 변곡점들과의 관련 속에서 짚어주셨습니다. 선생님께서 4·19세대의 생애와 대칭구도를 이루도록 배치해놓은 한국사회의 역사적 맥락과 정치적 환경을 염두에 두면 “출판업이란 단순한 상업 행위가 아니라 정치적 저항과 사상의 자유 전사인 동시에 교양인의 내면적 세련을 위한 안내자”(143면)였다는 의미 부여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그리고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찾아서」의 요지, 즉 “식민 체제의 극복과 6·25 전후 체제의 해소 (…) 미래 전망을 위한 모색”(158면)을 목적으로 창간된 『창작과비평』과 『문학과지성』이 지식 사회를 이끌며 평등과 통일, 자유와 민주를 제창한 덕분에, 또 그로부터 창출된 지적 담론과 문학적 상상을 거점으로 하여 수많은 언론인‧출판인‧편집자‧작가‧지식인들이 군부 정권과 유신 체제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고통을 감내했기 때문에, 오늘날 민주주의의 이념이 우리 사회에 정착되고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라는 말씀에도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의 말미에 젊은 세대를 향해 선생님께서 적어두신 당부, “불과 반 세대 전의 한국 지성 사회가 젖어 있던 어둡고 막힌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싸운 노력과 수고 들을 기억하여 가장 아름다운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아름답게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171면) 앞에서는 안타깝게도 자꾸만 주춤거리게 됩니다. 선생님의 소망과 격려야 말할 나위 없이 정당한 것이지만, 자유와 민주라는 큰 선물을 받았음에도 오늘날 젊은 세대의 처지는 비참하기만 합니다. 선생님 세대가 경험하신 것과는 좀 다른 억압을 경험하면서 지금-여기의 젊은 문학은 새로운 역할을 요청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세대에서 문학은 현실에서 실제로는 온전히 가져본 적 없고 실현해본 적이 없는 개념(가치)인 ‘자유’와 ‘민주’를 선취해볼 수 있는 사상의 실험실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문학은 미래를 향한 기획(project)을 열정적으로 투사(pro-ject)해볼 수 있는 고유하고 자율적인 영역으로 마땅히 옹호되어야 했습니다. 자유와 민주라는 가치의 실현을 상상적으로 가능하게 해주는 문학의 성취들을 디딤돌 삼아서 비평가들은 “유신 시절의 정치적 억압에 저항하며 근대화로의 전망에서 평등주의와 자유주의의 비전을 제시하여 현실 타개의 길을 모색”(30면)할 수도 있었던 것이겠지요.

 

그러나 저희들이 처한 상황은 그때와 다르고, 문학의 임무도 달라지게 됐습니다. 저희들은 자유와 민주라는 가치를 일상적인 것으로 경험해왔습니다. 저희들의 힘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이미 존재하는 가치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자유와 민주라는 가치들은 더이상 상상의 여지가 없는 개념들이 돼버린 듯합니다. 선생님의 세대와 그 이후의 선배들이 이룩해놓은 현실을 ‘자유’와 ‘민주’가 최대치로 실현된 상태라고 간주해버림으로써 현실의 전면적‧급진적 변화란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섣부르게 체념해버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세계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동력이란 바로 자유와 민주라는 개념의 새로운 가능성, 아직 다 실현되지 못한 그 개념들의 잠재적 진가를 상상하는 능력에서 비롯되는 것일 텐데, 어쩌면 저희는 현실의 완강한 부동성 속에서 그와 같은 상상력을 박탈당해버린 듯합니다. 그렇다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라도 문학은 다시 한번 옹호되어야 하겠습니다. 문학만큼 어떤 가치를 창조적인 방식으로 상상하고 질문할 수 있는 영역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패배주의와 허무주의에서 벗어나, 자유와 민주라는 개념의 깊이와 넓이를, 그 가치가 발휘되는 자장(磁場)을 무한정 확대해보려는 실험이 젊은 세대의 문학에 요구된다면, 저희 세대의 비평은 그와 같은 요구를 동시대의 창작자들에게 전하고 비평 스스로가 그 요구에 응하는 과제를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선생님의 책에서 답을 찾으며 제가 도달한 것은 이와 같은 생각입니다.

 

『조용한 걸음으로』의 프롤로그에서 선생님은 전후(戰後)의 폐허 속에서 “나의 이십대에도 희망은 오히려 더 없었다”(17면)고 회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절망적인 삶에 희망을 가져다준 것은 ‘삶에 대한 번민과 사유’뿐이었다고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기억의 깊이』에서는 ‘나의 삶 나의 길’을 주제로 쓰신 글에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삶’이라는 제목을 붙인 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혀두셨습니다. “나는 의도적이든 무심코든 간에 ‘그럼에도’라는 말을 많이 썼고, 그 용어에 대한 내 나름의 애착을 가져왔었다. 그것은 반어이면서 긍정이고 양보절이면서 변증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463면) 저는 선생님의 책을 읽으며 문학과 비평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제 삶을 이해해보고 싶었습니다. 선생님과의 대화 속에서 저는 자유와 민주라는 개념의 내포와 가치를 오늘날 현실화된 것보다 더 깊고 넓게 상상하는 것이 저희 세대의 과제라는 결론에 도달했는데, 거기에다 ‘삶에 대한 번민과 사유’라는 꾸준한 노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요약될 어떤 낙관적 의지를 더해야 한다는 사실을 마지막으로 깨닫습니다. 오늘날 현실을 인정하되, 그럼에도 희망을 찾으려면 우리가 마주한 지금-여기를 끊임없이 번민하고 사유해야 한다는 것을, 또 우리시대 일부 평론가들의 냉소와 절망에 투항하지 않으려면 어떤 상황에서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으로 되돌아가는 변증적 의지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을 선생님께 드리는 편지에 적으면서 저는 스스로에게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 맨 앞에 걸어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이어야 합니까, 선생님’이라는 질문의 속뜻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이어야 한다’라는 한 젊은 비평가의 소박한 다짐일 것입니다. 내내 건강하십시오, 선생님.

 

신샛별 / 문학평론가

2016.7.13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