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유리 모딘 『나의 케임브리지 동지들』
문화, 전쟁, 사랑, 스파이
--유리 모딘 『나의 케임브리지 동지들』
“90년대에 대학 다니기 전까지 나는 피아노를 쳤어. 꽤 잘 쳤어. 그런데 대학에 와서 그만뒀지. 왜냐고? 그때 남자친구가 피아노는 민중을 위한 악기가 아니라고, 부르주아 문화라고 나를 설득했거든.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겠냐고 물으니……” “물으니?” “장구를 치라더라.” “장구? 진짜예요?” “응, 진짜야. 그래서 그때부터 몇년 동안 장구를 쳤어.”
실화다. 90년대 중반 운동권 사업에 한발을 걸쳤던 사람이라면 이 비슷한 일을 겪었을 것이다. 내가 아는 선배는 악기 대신 술을 따졌다. 맥주는 부르주아의 술이고 소주와 막걸리는 노동자의 술이라던가. 학교 곳곳에서 열리던 장터는 막걸리를 팔기 때문에 ‘건전한’ 공간이었다. 그런데 장터에서 민중가요 대신 동생과 함께 서태지 노래를 불렀더니 지나가던 얼굴 벌건 선배가 때리려고 하여 겁먹었던 기억이 있다.
아무려나 지나간 시대의 이야기다. 순진한 시대이기도 했다. 저런 시시한 일이 하나하나 쌓이면 정말로 세상이 뒤집어지고 이상사회가 온다고 믿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물론 나는 믿지 않았지만. (하지만 그런 나조차도 한때 개량한복을 입고 다녔다.)
온갖 문화와 예술을 즐기며 취향을 갈고 닦아도 아쉬울 나이인 20대에 왜 저러고 살았을까? 80년대말부터 90년대 내내, 우리는 한국사회의 분위기가 싫었다. 천민자본주의, 파쇼정권, 깡패정권, 군대문화의 잔재 등등. 그 무렵 자주 쓰던 말들이다. 군가와 건전가요에 맞춰 정신일도하사불성을 외치며 ‘헝그리 정신’을 강요당하는 사회에 영원히 갇히게 되면 어쩌나 두려워하여, 그 구린 취향만 피할 수 있다면 한동안 막걸리와 민중가요만 접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제 곧 진정한 문화와 예술의 시대가 올 테니 조금만 참자, 동지들(그때까지만 개량한복을 입도록 하자). 민망한 기억을 버르집자니 낯이 다 화끈거린다.
소련 스파이였던 영국의 엘리트들
왜 갑자기 옛날 기억이 떠올랐는가. 『나의 케임브리지 동지들』(조성우 옮김, 한울 2013)이라는 책 때문이다. 부제는 ‘KGB 공작관의 회고록’. 잠깐, KGB(소련 국가보안위원회)? 한때 CIA(미국 중앙정보국)를 뺨치던 바로 그 KGB 말인가? 그렇다. 이 책을 쓴 유리 모딘(Yuri Modin)은 전직 KGB 요원. 겉모습은 영국에 있는 소련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외교관이었지만 실제 신분은 첩보원이었다. 본국에 돌아간 다음에는 KGB 정보학교의 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벌써 이 책에 흥미가 생기지 않는가?
책 제목에 ‘케임브리지 동지들’이라고 쓴 까닭은, 이 책이 이른바 ‘케임브리지 5인방 사건’을 다루기 때문이다. 제2차세계대전과 초기 냉전 기간에 소련은 영국과 미국의 속사정에 밝았다. 케임브리지 대학을 나오고 정부 요직에 근무하며 고급정보를 주무르던 엘리트 다섯명이 수십년 동안 소련에 나라의 정보를 넘겼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다. ‘5인방’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킴 필비(Kim Philby). 그런데 가장 내 눈길을 끄는 사람은 앤서니 블런트(Anthony Blunt)다.
5인방은 댓가도 받지 않고 간첩질을 했다. 나라의 정보를 넘기는 첩자라면 왠지 막대한 보수를 받았을 것 같은데, 이들은 돈도 받지 않았다. 저자 유리 모딘은 돈을 주는 행위가 이들한테 모욕이 되었을 수도 있다고까지 말한다. 나중에 일이 틀어진 다음에 도주자금 따위를 신세지는 정도였다. 균형이 맞지 않아 보인다. 큰 위험을 감수하고 얻는 것은 무얼까. 명예와 사회적 지위, 심지어 목숨도 잃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받는 것은 없다. 5인방은 왜 스파이가 되었을까? 신념 때문이라고 저자는 단언한다. 투철한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에 자기 사상을 숨기고 정부 요직에 들어가 열심히 정보를 빼돌렸다는 것이다. 믿음이 곧 보상이었던 셈이다(종교 같다).
그런데 앤서니 블런트에게는 그런 믿음조차 없었다. 블런트의 겉모습은 성공한 미술사학자였다. 학계에서도 인정받고 대중적으로도 라디오방송 덕분에 인기가 많았다. 영국 국왕도 미술작품을 감상할 때 블런트를 친구 삼아 데리고 갔다. 정부 요인들만 아는 모습도 있다. 블런트는 성공한 정보부 요원이었다. 2차대전 때 영국의 방첩 매뉴얼을 이 사람이 짰다. 소련의 첩자라는 것이 밝혀지면 잃을 것이 한둘이 아닌 사람이었다. 그런데 정작 블런트는 공산주의 이념에 투철한 사람이 아니었다. “정치철학을 공부하는 초등학생보다는 심각하게” 관심을 보였을 뿐이라나. 이념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를 개인적으로 아는 나로서는 그가 공산주의의 몇가지 관점을 같이했을지라도 가슴 깊은 곳에서는 그렇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유리 모딘의 평가다.
예술과 사랑을 좇은 스파이
그렇다면 블런트는 어째서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에 목숨을 걸었을까. 한가지 이유는 그를 포섭한 케임브리지의 꽃미남 가이 버제스(Guy Burgess)의 주장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술은 부르주아사회 분위기에서 시들어버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이기적인 부르주아는 하류 사회계층의 문화발전을 돕지 않는다.” 현대 예술은 이미 쇠퇴하고 있다. 피카소의 「게르니까」 정도를 제외하고는 “위대한 고전 작품들과 같은 줄에 세울 걸작”이 더이상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기시감이 들었다. 블런트가 하던 생각이 옛날에 내가 했던 생각과 비슷해 보여서였다. 문화예술을 사랑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후진 감수성을 싫어한 사람이 반가웠다. 그러나 부끄럽기도 했다. 1930년대에나 주고받던 이야기를 90년대 한국에서 다시 발견하고 좋아한 상황 아닌가. 머쓱했다. 게다가 그 이야기에 솔깃한 블런트는 실패한 국가 소련을 위해 간첩이 된 셈이니, 이러나저러나 절망스러운 이야기다.
한가지만 덧붙이자. 블런트가 ‘혁명전선’에 투신한 진짜 이유를 저자는 다른 곳에서 찾는다. 저자가 보기에 앞서 말한 이유는 부족했나보다. (사실 저자는 소련에서 살았기 때문에 소련의 문화예술이라고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보다 특별히 낫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았을 테니 말이다.) 사실은 블런트가 그를 포섭한 꽃미남 버제스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둘은 한때 동성커플로 사귀기도 했다. 동성애에 대해 옛날 사람다운 편견을 드러내면서도, 저자는 가이 버제스에 대한 앤서니 블런트의 사랑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있다. 모든 것을 잃을 위험한 도박에 목숨을 걸게 한 그 사랑을.
아무튼 이 책에는 첩보전과 문화예술과 엘리트 청년들의 열정, 그리고 진정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스페인 내전, 2차대전, 냉전 등 KGB가 들려주는 20세기 역사 이면의 이야기도 가득하니, 관심있는 분은 이 책을 읽으며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에 관심없는 사람도 있을까!
김태권 / 만화가
2016.7.2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