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다른 두 세상 속의 두가지 삶, 그리고 청년수당
청년수당 집행을 두고 서울시와 중앙정부인 보건복지부 사이에 정면충돌이 임박한 모양이다. 청년수당은 취업, 교육, 직업훈련 과정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른바 니트(NEET,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 청년들을 위한 ‘청년활동보장정책’이다. 사회참여활동비로 매월 50만원씩 최장 6개월까지 지원한다. 사실 잠재적 정책 수혜 대상자가 10만을 훨씬 넘지만 예산이 90억원 정도여서 겨우 3000명 정도로 한정해서 시범적 수준으로 추진될 계획이다. 지난 7월 17일 접수마감을 했는데 정원의 두배가 넘는 6309명이나 지원했다.
지원서 내용을 심사한 관계자들에 의하면 접수된 사연들이 하나같이 절박하고 절절하여, 기본적인 서류미비 등을 제외하면 6000여명 가운데 누구를 제외할지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언론보도에 따르면 서울시 청년수당 지급에 대한 복지부의 저지 의지는 확고해 보인다. 복지부는 서울시가 지원 대상자 발표를 하는 동시에 시정명령을 내리고 사업을 직권 취소해 집행을 막겠다고 공언한 상태다.
악순환의 덫에 걸린 청년들의 삶
그런데 복지부가 이처럼 전례없이 지자체의 정책시행을 가로막고 나서는 명분은 무얼까? 가장 많이 언급되는 논리는 이른바 ‘복지 포퓰리즘’이다. 청년 문제의 심각성이라는 시류에 기대어 재정여력 등을 감안하지 않고 시류 영합적인 정책을 편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포퓰리즘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들이대기 이전에 확인할 것이 있다. 복지부나 중앙정부의 정책결정권을 쥐고 있는 기성세대가 과연 현재 청년들이 처해 있는 현실을 얼마나 제대로 공감하고 있을까? 우리 사회의 중심에서 의사결정을 내리고 있는 부모세대는 자신의 청년 시절 경험에 의지해서 지금 청년들의 삶을 과연 공감해낼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하여 세계적인 컨설팅조직인 매킨지 글로벌이 지난 7월에 발표한 보고서 「부모보다 가난해진다? 선진국에서의 소득 정체와 하락」(Poorer than their parents? Flat or falling incomes in advanced economies)은 주목할 만한 시사를 준다. 보고서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선진국 25개국에서 지금의 부모세대(40대 이상)가 사회활동을 시작하던 시기에는 단 2퍼센트 정도만이 소득이 늘지 않았을 뿐 대부분은 지속적인 소득증가를 이뤄왔다고 분석한다. 지금의 부모세대들이 청년 시절에는 비록 처음에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하더라도, 이후에는 계속 수입이 늘어나서 생활이 꾸준히 개선되어온 경험을 했다는 것이다. 청년 시절의 한때 고생과 어려움은 곧 이어질 물질적 풍요에 의해 보상받을 수 있다는, “아프니까 청춘이다” 식의 사고구조는 그들의 이같은 세대적 경험에 기반을 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생활주기가 마치 모든 세대에게 공통적인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이삼십대 청년들이 사회생활을 시작한) 2005년 이후에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이 매킨지 보고서의 지적이다. 최근의 사회인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소득이 늘어나는 것은 고사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거나 줄어든 경우가 무려 65~70퍼센트에 달하며, 특히 청년들이 그 정도가 심하다는 것이다. 그나마 정부가 (지금 논쟁이 되고 있는 청년수당과 같은 종류의) 각종 복지정책을 시행하여 그 비율을 20~25퍼센트로 줄이고 있는 실정이라고 보고서는 강조한다. 다시 말해 지금의 상황은 젊어서 어렵게 시작한 사회생활이 시간이 지나면서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어려워질 확률이 높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나마 정부 복지정책으로 다소 완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청년수당 지원자들의 지원동기를 보면 청년들이 어떤 악순환의 덫에 걸려 있는지 더욱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 서울시가 분석한 지원서 내용을 살펴보면, ‘졸업 직후 취업 실패로 인한 자신감 상실 → 취업 실패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 경제적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단기 아르바이트 → 불규칙한 삶의 패턴 가속화, 낮은 임금으로 인한 다수의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로 일상생활 붕괴 → 부족한 시간, 무너진 삶의 패턴으로 취업 준비 실패’라는 악순환의 굴레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청년들의 실상을 생생하게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정책결정권을 쥐고 있는 지금의 부모세대가 살아왔던 청춘 시절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인 것이다.
‘저지’가 아니라 ‘공감’이 필요한 때
그렇기 때문에 기성세대의 눈에 포퓰리즘으로 보일 수도 있는 정책이 사실 청년들에게는 극히 미흡한 임시처방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성찰해봐야 한다. 자신들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청년들에게 자신의 경험적 잣대를 들이대며 포퓰리즘 운운하는 것은 부모세대로서 다음 세대에 대한 책임있는 태도가 명백히 아니다. 중앙정부와 복지부의 의사결정권자들은 우선 지금 청년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서울시의 청년수당이라는 것이 사실은 그저 지금 청년들에게 약간의 숨 돌릴 ‘시간’을 주는 정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취업준비는 고사하고 당장의 생활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대신 자신의 미래를 위한 약간의 여유를 줘보자는 것이다. 수없는 취업 실패에 좌절하여 취업도 교육도 훈련도 받지 않고 사회로부터 멀어져가는 그들에게 사회로 되돌아올 다리를 하나 놓아주자는 것이다. 이는 세대를 뛰어넘어 청년이 놓여 있던 다른 현실을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의지가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복지부에게 절실한 것은 그래서 ‘청년수당 저지계획’이 아니라 청년의 현실에 다가설 ‘공감의지’다. 서울시 청년수당 집행 직권취소에 앞서 단 한번만이라도 세대 간 경험격차를 받아들이고 이를 뛰어넘어 청년들에게 공감하려는 성의를 보여야 한다. 그것이 부모세대로서의 도덕적 의무이다.
김병권 / 서울혁신센터 센터장
2016.8.3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