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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역사의 짐: 거제도 포로수용소와 한국문학

 

정홍수

정홍수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한국전쟁 기간에 북한군과 중공군 포로들을 집단 수용하기 위해 유엔군 관할하에 설치된 것으로, 1950년 11월에 공사가 시작되어 1951년 2월말에는 5만명의 포로를 수용했고, 같은해 6월까지 17만명이 넘는 포로가 수용되었다. 친공포로와 반공포로 사이의 대립과 갈등, 폭동과 유혈극은 거제도 포로수용소 하면 쉽게 떠오르는 연상이다. 북한군 의용대를 탈출한 김수영 시인이 수복 후의 서울에서 체포된 뒤 포로수용소에 2년 넘게 수용되었던 것도 웬만큼 알려진 사실이다.

 

최근에 발굴된 자료[김수영 「시인이 겪은 포로 생활」(『해군』 1953년 6월호), 「나는 이렇게 석방되었다」(『희망』 1953년 8월호); 이영준 「전쟁과 시인의 진실」(『세계의문학』 2009년 겨울호), 박태일 「김수영과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근대서지』 2010년 제2호)]에 따르면, 김수영의 경우 미군에 의해 ‘민간 억류자’(civilian internee, 남한 거주자가 북한군의 강압에 의해 의용군으로 끌려간 경우)로 분류되었으며, 수용소 생활도 대부분 부산 거제리(지금의 부산 거제동) 포로수용소(거제리 14 야전병원)에서 보낸 것으로 확인된다. 지금까지 알려져 있던 것과는 달리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잠시 이송되어 가 있었던 게 아닌가 추정된다.

 

‘자유’의 이름으로

 

그런데 포로 생활에 대해 쓴 시인의 글을 보면 친공-반공포로 간 갈등이 격렬하기로는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도 못지않았던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 앞날에 대한 막막한 불안과 함께 구금 상태에서 느낀 비참과 절망은 “한걸음이라도 좋으니 철망 밖에 나가보았으면” 같은 대목에서 절절히 드러나기도 한다. 그런 한편 미군 여성 장교에 대한 호감과 “임간호원이라는 30을 훨씬 넘긴 인테리 여성”에 대한 연정을 거침없이 토로해놓은 데에서는 그곳이 단순히 아수라의 현장만은 아니었음도 알게 된다. 물론 그런 마음조차 물러설 곳 없는 절박감의 표현이었을 수 있겠다. 정전협정 와중의 상병포로(傷兵捕虜) 교환을 보고 쓴 시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미발표작, 1953.5.5.)에서 ‘자유’의 이름으로 수용소의 혼돈을 고발하고, 다시 그 ‘자유’의 이름으로 수용소의 수난을 의미화하는 과정에서 ‘반공’이라는 표면의 이데올로기조차 무력하게 만들어버리는 힘은 아마도 김수영의 ‘자유’가 “포로수용소보다 더 어두운 곳이라 할지라도/자유가 살고 있는 영원한 길을 찾아”가려는 그 생생하고 절실한 시간에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이리라.

 

소설가 김소진의 등단작 「쥐잡기」(1991)에는 거제도 포로수용소 출신의 무력한 아버지 이야기가 나온다. 생전의 아버지가 화자인 아들 민홍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부친은 수용소에서 길들이던 흰쥐 한마리 덕분에 우연히 수용소 폭동 때 목숨을 부지한다. 포로 석방 절차가 진행되면서 남북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 흰쥐는 부친이 남쪽에 남게 된 결정적 빌미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수용소 복도를 사이에 두고 남북을 오락가락하던 부친의 눈에 꼬랑지를 살랑살랑 흔들며 이남 쪽으로 걸음을 떼고 있던 흰쥐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전쟁 전에 결혼해서 북에 이미 처자까지 두고 있던 아버지였다.


내이가 왜 그랬겠니? 여기 한번 나와 있으니까니 못 가갔드란 말이야. 어딜 간들 하는 생각 때문에 도루 못 가갔드란 말이야. 기거이 바로 사람이야. 웬 쥐였냐고? 글쎄 모르지. 기러다보니 맹탕 헷것이 눈에 끼었는지두. 언젠가 돌아가갔지 하며 살다보니……

--「쥐잡기」, 『열린 사회와 그 적들』, 문학동네 2002, 29면


김수영의 ‘포로 생활기’가 실린 지면이 휴전 직후의 『해군』지였던 데서도 얼마간 짐작할 수 있듯이, 그의 수기에는 ‘반공포로’로 스스로를 정체화하려는 과도한 강박 같은 게 어른거린다. 물론 그것은 시인 자신의 기질이자 신념이기도 했겠지만 이데올로기의 표지가 생존의 척도였던 시대의 불가피한 강박이기도 했을 것이다. 박정희 시대에 일층 강화되어 한국인의 삶과 의식을 양단하고 불구화한 그 좌우 냉전 이데올로기는 김소진의 소설에 뒤늦게나마 표현된 당연한 현실감각, 진실의 국면을 오랫동안 억압해왔다. 이데올로기가 ‘맹탕 헛것’일 수야 없겠지만, 분단현실의 장기적 악화는 마땅히 제거되어야 할 이데올로기의 허위를 얼마나 오래 분식(粉飾)해온 것일까. 이즈음에도 틈만 나면 창궐하는 붉은색 딱지 붙이기를 보노라면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인데, 사실 이런 허위는 알게 모르게 낡은 이분법적 도식 안에 현실을 가두는 또다른 쪽의 행태에도 얼마간 남아 있지 않은가.

 

역사의 시간과 문학의 상상

 

최근 출간된 최수철의 연작소설집 『포로들의 춤』(문학과지성사)은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담은 사진 한장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연작 중 가장 먼저 발표된 「거제, 포로들의 춤」이 그러한데, 나머지 두 연작 역시 인물과 상황의 변주는 있지만 첫 작품과 내적으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매그넘 포토스 소속의 사진가 베르너 비숍이 찍은 그 사진에는 ‘유엔 재교육 캠프에서의 스퀘어댄스, 거제도, 한국, 1952’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소설에 수록된 사진을 보면 엉성한 모양새의 모조 ‘자유의 여신상’을 배경으로 미군 군복을 입은 죄수들이 수용소 광장에서 둥글게 원을 그리며 춤을 추고 있다. 스퀘어댄스는 네쌍의 남녀가 서로 마주 서서 정사각형을 이루며 추는 미국의 대표적인 포크댄스다. 다들 섬뜩한 느낌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어떤 이유에서든 이 사진 한장이 작가를 사로잡으면서 한국현대사의 어두운 시간을 향한 탐사가 개시된다.

 

이번 연작소설집은 리얼리티의 포착을 가운데 둔 사진과 소설의 예술적 경합 혹은 질문으로 읽힐 여지를 포함하고 있고, 그런 한에서 리얼리티의 직접적 재현보다 리얼리티에 대한 방법적 회의를 이어온 최수철 문학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는 아물지 않은 현대사의 상처에 새롭게 주목하면서 ‘전쟁과 분단현실’에 대한 증언의 문학으로 작가적 관심을 확대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조심스럽게 작가의 변모를 이야기하는 것도 가능할 듯하다. 연작소설집 전체에 걸쳐 좌절된 사랑, 한 여인의 죽음이 철조망처럼 놓여 있는바 그 죽음이 친공-반공포로 간 극한의 대립과 야만의 사투가 벌어진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역사 속 시간과 이어지는 순간은 한 개인의 예외적이고 우연적인 사건일 리가 없다.

 

증언되고 재현되지 못한 역사의 시간이 있는 한 그 연속의 계기는 끝없이 상상되고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허니 바케쓰’(honey bucket, 수용소에서 똥통을 부르던 말)에 수시로 사람들의 잘린 팔, 다리, 머리가 담겨 버려진 역사의 시간이 남아 있는 한, 거제도 포로수용소 생존자의 다음과 같은 질문 역시 계속될 필요가 있다. “지금도 나는 나 자신에게 묻는다. 우리가 전혀 선택의 여지가 없이 어떤 행동을 했을 때, 과연 우리는 그 행동을 책임져야 하는가.”(153면) 강요된 스퀘어댄스를 추면서 신분 노출과 보복을 두려워한 가면 쓰기였을 테지만, 그 죽음 같은 가면의 춤을 ‘탈춤의 춤사위’로 바꾸어내는 상상이 거듭 긴요하고 절실한 것처럼 말이다. 한때 우리가 오해했듯 역사는 확정된 진리의 자리가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 문학의 질문과 상상은 여기서 계속되어야 한다. 무거움을 타매하는 게 유행이 된 시대에, 역사의 짐 속으로 기꺼이 걸어가는 작가의 도정이 특별한 감동을 준다.

 

정홍수 /  문학평론가

2016.8.1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