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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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강준만 외 『빠순이는 무엇을 갈망하는가?』

빠순이를 발로 차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래, 나 빠순이다!”
--강준만·강지원 『빠순이는 무엇을 갈망하는가?』, 인물과사상사 2016

 

 

ktyjtr포털사이트에 ‘빠순이’를 검색해본다. “오빠와 순이의 합성어. 모든 일을 제쳐두고 운동선수나 가수, 배우 등을 쫓아다니면서 응원하는 여자들을 일컬음”이 가장 먼저 뜬다. 다른 결과들도 비슷하다. ‘맹목적’ ‘추종’ ‘극성팬’ 등의 단어가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 부정적인 단어 ‘빠순이’를 전면에 내세운 용감한(?) 책이 나왔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와 그의 제자이자 딸인 강지원이 함께 쓴 책이다.

 

이 책은 ‘오빠들’ 덕분에 행복했고 슬프기도 했고 즐거웠으며 화도 났던 시절을 추억하는 한편, 이제는 ‘함께 늙어가는’ 오빠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 잘 살기를 바라마지않는, ‘누군가의 팬’이었던 시절을 간직하고 있는 빠순이들에게 전하는 긴 고백이다. 그러면서 ‘빠순이’를 전면에 내세운 책답게 ‘빠순이’ 옹호에서 그치지 않는다. ‘팬질’은 특정 시기에만 하는 것이라는 통념에도 반기를 든다. ‘빠순이’를 사회적 논의 선상에 올리는 것 자체가 인권운동이자 민주주의 교육이며, 팬덤이 당당해져야만 책임의식이 커지고, 팬덤 문화의 진보도 이뤄질 수 있으리라는 것이 저자들이 이 책을 쓴 이유이자 결론이다.

 

「빅뱅이론」이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다. 「스타트렉」 등 만화와 게임에 열광하는 ‘덕후’ 괴짜 과학도 네명의 이야기를 그린 이 코믹 씨트콤은 10씨즌까지 제작되었을 정도로 인기다. 코스튬을 하고 게임을 하고 만화책가게에 매일 들르는 이들의 일상이 우스꽝스럽게 그려진다. 하지만 최소한 이들의 ‘덕질’은 ‘빠순이’들과는 전혀 다른 사회적 평가를 받는다. ‘똑똑함이 섹시할 수 있다’(Smart is new sexy)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 이 드라마는 너드(nerd) 캐릭터를 ‘뇌섹남’으로 재해석한 최초의 시도로 평가되기까지 한다. 똑똑한 남자들의 ‘덕질’은 ‘일탈’도, 숨겨야 할 그 무엇도 아닌 셈이다. 좀 특이하긴 해도 ‘취향’으로 인정받는 덕질과 ‘쓸데없는 짓’ ‘생각 없는 짓’으로 평가받는 여성 팬질의 차이라고나 할까? ‘대중문화를 키우는 젖줄 역할’을 했음에도, 한국의 대중문화에서 ‘빠순이’는 제대로 그려진 적이 없다. 팬픽을 쓰다가 문예창작과를 졸업해 방송작가가 되는, 드라마 「응답하라 1997」 주인공 성시원이 거의 유일한데, 팬질이 주인공의 인생을 바꾸었음에도 아이돌팬 간의 대결을 코믹하게 그리는 에피소드 정도로 소모된다. ‘덕후’의 정체성이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축으로 작용하는 「빅뱅이론」과는 너무 큰 차이다.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

 

이 책의 상당부분은 이런 현실을 비판하고 항의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렇다보니 ‘인정투쟁’ 성격이 강하다. “그래! 나 빠순이다!”라고 당당히 외치다가 “빠순이를 인정해달라!”라는 구호가 작은 목소리로 따라붙는 느낌은 아쉽다. 강준만의 지적대로 “팬덤은 어떤 어떤 사람이 살아가는 하나의 라이프스타일, 삶의 방식”일 뿐이다.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가능성’으로 팬덤을 주목하는 과도한 의미부여 대신 ‘취향의 공동체’ 자체로 존중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팬덤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대신 긍정적이니 부정적이니 판단하려 하고, 그런 정도의 다양성도 포용하지 못하는 한국사회에서 ‘빠순이’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나이와 상관없이 팬질도 마음놓고 하기 어려운 사회가 바로 한국이다. 외국어 공부, 인간관계 확장, 새로운 세계의 발견 등 개인들이 경험에 기반해 팬질의 유용성을 아무리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빠순이는 문제’라는 사회적 인식이 바뀌지 않고, 십대의 통과의례쯤으로 치부하는 한, ‘일코(일반인 코스프레)’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이는 여성들의 취향을 비하하고 가르치려 드는 전통과도 맞닿아 있다. 정치든 야구든 힙합이든 “남성적인 장르에 진입한 여성팬들에게는 비난이 쏟아진다.”(김수아의 SNS 글; 양성희「왜 여성 팬들은 자주, 쉽게 무시당하는가?」, 중앙일보 2013.6.29) 여성 수용자에 의해 흥행에 성공한 대중문화는 여성팬과 함께 폄하된다. 팬덤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라지도 않되, ‘팬질’에 대한 인정을 원하는 것은 과도한 요구일까? 최소한 ‘팬질’을 할 때 ‘일코’를 하지 않아도 되는 정도의 인정만으로도 충분하다.

 

팬덤이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움직이는 ‘큰손’임에도 소비자로서의 대우는커녕 ‘지갑’ 취급을 받는 상황에서 이들은 어떻게 사회적 인정을 획득할 수 있을까? 사회에 의해 ‘학습된 무력감’과 자신들을 ‘새우젓’(팬들 사이의 동질감을 구체화한 표현으로, 새우젓을 먹을 때 일일이 새우를 쳐다보지 않는 것처럼, 스타에게는 객석의 팬이 개인이 아닌 새우젓이라는 다수로 인식된다는 의미)이라고 표현하는 빠순이들의 냉정한 자기인식은 그 무력감을 더욱 키운다. “사회적 관심이나 계몽이 아니라, 취향에 대한 타인의 말없는 존중을 원한다”(이민희 『팬덤이거나 빠순이거나: H.O.T. 이후 아이돌 팬덤의 ABC』, 알마 2013)는 오래된 아이돌팬의 고백이 절절하면서도 안쓰러운 이유다. 그럼에도 그 사회의 인정을 굳이 받고 싶어하는 ‘빠순이’들의 노력이 눈물겹다.

 

그래서 이 책의 출간은 ‘빠순이 월드’에서 중요한 포인트다. ‘빠순이’를 발로 차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그래, 나 빠순이다!”라고 외치는 동시에, ‘빠순이’들을 본격적인 논의 대상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덕후’는 어엿한 ‘능력자’로 대접받는데 왜 ‘빠순이’는 계속 발로 차여야 하느냔 말이다. 한번도 무엇인가에 빠져본 적 없으면서 오늘도 타인의 ‘팬질’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그 누군가에게 “빠순이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는 시를 바친다. 그리고 수많은 현재진행형의 ‘빠순이’들에게 이 책의 저자들처럼 지지와 박수를 보낸다.

 

정지은 / 문화평론가

2016.8.1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