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어차피’ 오는 변화는 없다
사람은 물론 사방 만물은 무사한지 또 지구는 안녕한지, 그 모든 게 걱정될 만큼 길고 무더운 여름이었다. 하지만 이번 여름을 뜨겁게 달군 것은 기록적인 무더위만이 아니었다. 전격적으로 발표된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의 한반도 배치 결정을 비롯해 평생교육단과대학 신설을 둘러싼 이화여대 사태에 이르기까지 최근 일어난 여러 사건들은 책상 앞에서의 더위 타령이 민망할 만큼 엄중했고, 반대투쟁의 열기는 여전히 뜨겁다.
사드가 배치됐을 때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에 가해질 위협이나 유무형의 손실에 비해 남한이 얻게 될 안보적·외교적 이득은 극히 불투명하다는 우려가 높은 가운데서도 정부는 경북 성주를 배치지역으로 전격 발표했다. 처음 물망에 올랐던 지역들 대신 성주로 결정된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었을 텐데, 일단 항의방문한 지역민들 앞에서 국방부차관이 성주와 상주를 혼동해 소동이 났을 만큼, ‘중앙’에서 보기에는 성주가 대단치 않은 지역이었다는 이유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성주가 전통적으로 여권 지지세가 강한 지역이 아니었다면 아무런 사전협의 없이 지금 같은 방식으로 발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성주를 ‘만만하게’ 본 것이다. 하지만 지역 내 배치를 반대하는 데서 시작한 성주군민들의 투쟁은 이제 한반도 평화를 위해 사드 배치 자체를 원점에서 검토하라는 주장으로 확대 발전했으며, 지역을 고립시키려는 정부의 전술을 비웃듯 평화집회를 통해 ‘외부세력’과의 연대를 확장해가고 있다.
사드 배치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서도 성주의 투쟁을 둘러싼 속내들은 생각보다 복잡해 보인다. 투쟁 자체에 대한 냉소적 반응도 있는데, 이는 사드 배치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는 비관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심지어 이 모든 사태는 그동안 보수정당을 열렬히 지지해온 해당 지역의 자업자득이라는 비아냥거림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야당은 부정적인 여론에 편의적으로 기대고 있을 뿐, 사드 배치를 실제로 저지하겠다는 의지는 확실치 않아 보인다. 사드 배치가 심각한 문제라면서도 이미 기정사실로 수용하는 태도에서도, 그리고 현재 진행되는 투쟁의 잠재성을 믿고 연대하여 힘을 보태기보다 그 한계의 논평에 몰두하는 태도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어차피’의 정서다. 야당은 그들이 시대의 핵심적인 문제를 외면한다 해도 결국 선거에서 자신들을 지지할 사람들은 ‘어차피’ 지지할 거라고 생각한다. 정부여당 역시 아무리 홀대해도 자신들의 핵심지지층은 ‘어차피’ 이탈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 오만한 태도를 보여왔다. 최근의 한국정치를 지배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이 ‘어차피’의 셈법은 지난 총선을 통해 일정한 심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정치권에만 만연한 것이 아니다. 그동안 교육부가 재정지원을 무기로 밀어붙여온 대학개혁사업을 최초로 중단시킨 이화여대생들의 투쟁을 둘러싸고도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비슷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투쟁을 지지한다면서도 ‘어차피’ 특수한 사례라 아무리 해도 교육부의 정책을 변화시킬 수 없을 것이라 예단하는가 하면, 아예 학벌기득권 지키기로 치부하거나 시위에 참여한 여성들에게 비난과 조롱, 성희롱을 가하기도 했다. ‘어차피’ 대학교육 전반의 공공성 확대로까지 이어지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식이었다.
현실의 투쟁을 인정하며 저항의 목소리에 조심스레 귀 기울이고 연대를 모색하기보다는 그들이 ‘어차피’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부터 지적하고 논평하려는 태도는 해당 투쟁이 기존의 익숙한 운동문법에 부합하지 않을 때 더욱 도드라지곤 한다. 성주의 사드 배치 반대투쟁이나 이화여대생들의 투쟁에 선뜻 연대하기를 주저하는 반응이 속출했던 것 역시 이들 투쟁이 이제껏 줄기차게 여당을 지지해왔던 지역과 상대적 특권층으로 보이는 ‘명문’여대처럼 통념을 배반하는 현장에서 출현했던 탓이 크다. 하지만 성주의 투쟁이야말로 사드 배치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는 ‘어차피’의 논법에 정면으로 맞선 투쟁이며, 이화여대의 투쟁 역시 최근 대학들이 교육부가 내리꽂는 정치에 대해서는 ‘어차피’의 태도로 순응하면서도 학내에서는 전횡을 일삼아온 행태에 제동을 건 사건임이 분명하다.
‘메갈리아’로 대표되는 새로운 흐름의 여성주의운동에 대한 최근의 논란 역시 ‘어차피’의 정서를 극복하지 못해서 생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지난해 페미니스트가 싫다며 한국을 떠나 이슬람국가(IS)에 가담한 김군 사건과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라는 칼럼을 계기로 여성주의 활동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인터넷 커뮤니티 메갈리아도 이러한 흐름 속에서 여성혐오에 대한 투쟁을 명분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지난 5월 강남역에서 벌어진 여성피살사건 이후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느끼는 위협에 대한 증언이 이어졌고, 한국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에 주목할 필요성을 환기했다.
여성혐오에 맞서기 위해 남성들의 여성비하 언어를 그대로 흉내내 되돌려준다는 메갈리아의 전략은 사회적으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받은 대로 돌려준다는 운동방식이 문제시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메갈리아 역시 이제껏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이 상당부분 포기하고 감내해온 여성혐오적인 정동에 저항하면서, ‘어차피’ 정서에 균열을 낸 중요한 운동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이 운동방식의 한계를 비판하기에 급급한 세력들은 오히려 여성혐오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어차피’ 존재하는 사회현상으로 간주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도 지적하듯이,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주체들에 의해 예기치 못한 방식의 투쟁이 발생하는 시대이다(『창작과비평』 2016년 가을호 특집 참조). 따라서 통상적 관념을 벗어난 운동들이 가진 잠재성을 판단하고 확장하는 일은 체제의 근본적인 전환을 이루어내는 데 결정적이다. 하지만 다양한 투쟁들은 각자 그 내부에서 사용하는 언어나 문화적 관습이 서로 다를 수 있으며, 현장이 다르면 서로의 배경과 역사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고, 안다 해도 완전히 동의하기 어려운 경우가 종종 있을 수 있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도 시각의 차이가 있다지만, 기존 체제에서 배제되어온 다양한 소수자들의 운동이 체제를 주어진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저절로 이해될 리 없을 것이다. 따라서 점차 사회운동에서 중요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소수자운동과 제대로 연대하기 위해서도 익숙한 ‘어차피’의 유혹을 넘어서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함을 잊어서는 안된다.
결국 ‘어차피’의 정서로는 연대를 이뤄낼 수 없고, 연대의 가능성을 찾지 못하는 한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이 생길 리도 없다. 그러므로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내고 희망을 찾으려는 노력은 운동에서든 삶에서든 바로 이 ‘어차피’의 정서를 극복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현재의 투쟁은 언제나 부족할 수밖에 없고, 더구나 기존에 다뤄지지 않았던 문제를 새로이 제기하는 세력은 거칠고 모난 부분이 많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정해져 있는 투쟁도 없고, 모든 결과가 정해져 있는 삶도 없다. 따라서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믿고 ‘어차피’에 익숙해진 나를 돌아보고 새로이 하는 각고의 노력이야말로 대전환의 기초가 될 적공의 중요한 방식 가운데 하나라고 믿는다.
* 이 글은 『창작과비평』 2016년 가을호 '책머리에'의 일부입니다.
백영경 / 한국방송통신대 교수
2016.8.24.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