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상섭 문장 전집』

김수림

문장에 담긴 각오
– 『염상섭 문장 전집』

 

 

yumsang문장으로 만나는 염상섭

 

『염상섭 문장 전집』(전3권, 이혜령·한기형 엮음, 소명 2013~14, 이하 『전집』)이 완간되었다. 이로써 과거 민음사판 『염상섭 전집』에 실리지 않았던, 소설을 제외한 염상섭의 여러 글을 모은 결과물을 얻게 된 셈이다. 다소 특이하게도 이 책은 수필이나 비평, 정론 등과 같은 일반적인 분류방식을 적용하는 대신에 ‘문장’이라는 이름하에 1918년부터 1962년에 이르기까지 염상섭이 쓴 글들을 시기별로 모아 수록했다. 편집자들은 염상섭의 문장들을 하나의 “전체상으로 이해”하고 “사안의 맥락에 대한 심각한 고뇌로부터 글쓰기를 시작하는 사상가로서의 염상섭을 만날 수” 있기 위해서는 이러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서문에서 밝혀놓았다.

 

이러한 취지와는 별개로 ‘문장 전집’이라는 제목은 아주 평범하고 기본적인 사실을 환기시켜준다. 즉 소설이나 비평, 에세이는 물론 아무리 위대한 사상이라 할지라도 결국 문장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작가의 개성이나 사상을 만나기 위해 가는 길에서 우리는 언제나 문장과 마주친다는 사실을. 한국문학사에서 염상섭은 흔히 자연주의 소설에서 출발한 이후에 이를 극복하고 사실주의를 개척한 작가로 이해되고는 했지만, 자연주의도 자연주의의 극복도 사실주의의 개척도 문장을 생략한 채로는 이루어질 수 없고 표현될 수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전집』은 염상섭이라는 작가와 마주치는 또다른 도정을 안내한다.

 

문장가의 고뇌

 

염상섭의 소설작품을 읽는 일이 수월하다고 말할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염상섭의 문장을 읽는 일도 수월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김동인은 그 이유를 염상섭의 작품들이 무거운 고뇌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찾았다. 그가 염상섭의 문체를 두고 “동통(疼痛)과 같은 무게”가 느껴진다고 표현했던 것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김동인이 육체적인 통증에 비유했던 고뇌의 표현이 결국 문장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과연 어떤 문장일까.

 

그러한 고뇌를 반드시 「표본실의 청개구리」 같은 작품에서 광증을 초래했던 것과 같이 심각하고 극단적인 경우에 국한할 이유는 없다. 고뇌라는 것이 자신과 타인의 관계, 그 관계를 둘러싼 사태를 구석구석 이해하고 그로부터 어떠한 입장을 취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심사숙고하는 일을 뜻한다면, 그러한 고뇌에 뿌리를 둔 문장이 무언가를 일도양단하는 문장이 되기는 어렵다.

 

그래서 염상섭이 자신의 대상을 한두마디로 단언하거나 직설적으로 설명하는 경우를 찾아보기란 힘들다. 전체를 긍정하거나 전체를 부정해버리는 경우도 드물다. 그 대신에 그는 세심한 망설임과 함께 “미미한 현상”들을 응시한다. “손톱 밑의 가시도 염통 밑에 신경은 직결되어 있”(「가두만필」, 1948, 『전집』 3권)기 때문이다. 만연체의 표본처럼 거론될 만큼 긴 호흡을 가지고 이리저리 굴절되는 그의 문장은 거기에서 비롯된다. 『전집』을 읽으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고뇌가 소설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문장’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리얼리스트의 초상화, 리얼리스트의 각오

 

『전집』을 읽다보면 이 문제와 연관된 인상적인 초상화를 발견할 수 있다. 해방 이후 발표한 「노안을 씻고」(1948, 『전집』 3권)라는 글에서 염상섭은 노안으로 근시와 원시를 겸하게 된 자신의 모습을 문장에 담아 보여준다. 그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는 끊임없이 “안경을 썼다 벗었다”를 반복하는 모습이다. 그는 누군가 명함을 건네면 그 명함을 읽기 위해 안경을 벗고, 그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서둘러 안경을 다시 쓴다. 자신의 늙은 모습을 타인 앞에 드러내는 것이 싫으면서도 그는 안경을 쓰고 벗는 일을 반복한다.

 

이 노안의 작가는 그 어떤 “미미한 현상”도 놓치거나 무심코 지나쳐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해방 이후 격변하는 상황과 맞물려 사람들의 직함과 얼굴 표정이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세태를 생각하면 더욱 의미심장한 일화이지만, 정말로 놀라운 것은 자신의 초상화를 어느새 작은 풍속화로 뒤바꾸어놓는 그의 문장이다. 자기가 마주한 상황의 작은 편린조차 놓치지 않으려 하면서, 동시에 현실의 몇몇 조각에 치우치지 않고 전체를 응시하려 하는 자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리얼리스트의 초상화이고 리얼리스트의 문장이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한국현대사의 이념지형에서 흔히 ‘중간자’라고 지칭되어왔던 염상섭의 보다 구체적인 초상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염상섭은 오오사까 한국 노동자 일동 대표로 3·1운동에 참여했을 만큼 사회주의운동에 깊숙이 개입했으면서도 카프(KAPF)에 가담하지 않은 채 프로문학의 공식주의·도식주의를 비판하며 카프 문인들과 계속해서 논쟁을 펼쳤고, 그러면서 동시에 우익문학이나 부르주아 문학의 존재를 긍정하지도 않았다. 말하자면 그는 “안경을 썼다 벗었다”를 반복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의지의 작용이 필요하다. 마치 자신이 마주한 인물을 두루 파악하기 위해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해야만 하고, 그러한 행위는 자신이 늙었다는 사실을 남에게 내보이기 싫다는 감정을 억눌러야만 가능하듯이, 중간자라는 위치는 이념적인 지형에 휘둘려 입장을 결정하고 사태를 재단하는 손쉬운 방법을 거절하는 의지를 필요로 한 것이었다. 그러한 거절에는 각오가 따르는 법이다. 그것은 아마도 리얼리스트의 각오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염상섭의 ‘문장’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그러한 각오의 편린들과 마주치게 되는 셈이다.

 

 

김수림 / 문학평론가

2014.10.8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