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경제질서와 진보적 지식인의 과제

임운택

임운택 /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

지난 5월 13일자 창비주간논평에 실린 문우식 교수 칼럼의 요지는 국제금융위기의 중요한 타개책이 치앙마이 다자기금에 기초한 아시아통화기금(AMF)의 설립이고, 그러한 정치적 공간에서 “우리나라가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치앙마이 다자기금의 사무국을 유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시각은 소위 현실주의적 입장에 선 국제정치학(IPE) 연구자들에게서 종종 듣는 대답이긴 하다. 더구나 최근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마저 열려 이제 거부할 수 없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는 듯해서인지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진보와 보수의 쟁점도 그다지 명확하지 않은 것 같다.      

바로 그 이유에서 필자는 이러한 상식의 세계에 반론을 펴고자 한다. 다시 말해 국제정치학의 현실주의자들이 보유한 해석적 독점권과 거리를 두고, 국제사회질서의 대안적 공간을 아래로부터 위로 재구성하는 일이 필요하며 또한 가능하다는 평범한 진보적 가치를 주장하고자 한다. 필자는 문교수의 논지에 두가지 측면에서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첫째는 국제경제질서에 대한 ‘현실주의자들’의 인식에 대해서이고, 둘째는 시민사회의 글로벌 거버넌스의 관점에서다.

아시아통화기금, 미국헤게모니 국제경제질서의 대안인가?

첫번째 쟁점은 어차피 국제경제질서가 북미, 유럽, 아시아의 삼각지역(triad)으로 재편된 마당에 동아시아경제권의 자립화는 어느정도 미국중심의 헤게모니질서에 대안적 성격을 가진다는 관점이다. 이러한 논의는 사실 오래전에 제기된 바 있다.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1997년 아시아 경제위기가 발발했을 때 국내에서 AMF 설립을 가장 먼저 주장한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김종필씨였다. 세계 경제위기를 기화로 동아시아 경제의 실질적인 채권자이자 조정권자가 되고자 했던 일본의 숨은 의도가 엿보인 한편, 한일 굴욕회담의 장본인이 또다시 일본의 대리인으로 등장했다는 데 반발이 일면서 일단 국내에서의 논의는 유야무야되었다. 여기에 더해 미국의 강력한 반대와 역내 국가들의 다양한 이해대립 때문에 통화기금체제는 결국 성립되지 못했다.

이후 2000년 5월에 향후 아시아지역에서 발생할 외환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통화스왑 형태의 역내 유동성 공급장치로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MI)가 구축되었다. 이를 토대로 최근 다시 AMF체제 논의가 탄력을 받고 있다. 상황은 달라졌지만 예나 지금이나 AMF체제를 선호하는 근거는 마찬가지인 듯싶다. 이러한 시각은 어차피 브레튼우즈체제 붕괴로 미국헤게모니 중심의 세계경제가 전후 냉전질서만큼 강건하지 못한 조건에서, 그 체제에 대한 종속성을 탈피하는 차선책으로서 AMF체제가 그다지 나쁘지 않은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인식에 기초한다. 문교수의 인식도 크게 보아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 듯하다. 그러나 치앙마이 이니셔티브가 역내 외환위기가 발생할 경우 구원투수 같은 역할을 하는 수준이라면 통화기금의 설립은 근본적으로 그 운영방식과 목적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완전히 다른 경제질서를 전제로 하는 사안이다.

금융자본 중심의 경제통합과 EU의 교훈

다시 말해서 AMF의 설립은 EU의 발전과정에서 보여주듯 금융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통합의 서막이다. 타산지석이라고 하는 유럽의 사례를 살펴보자. EC에서 EU로의 시장통합 과정을 보면 그 변화의 선두에는 언제나 국민국가 틀을 벗어난 시장확대를 추구하면서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은행, 보험 및 투자회사, 연기금 등 금융자본이 있다. 간혹 국내에서 EU의 통합에 대해 맥락 없이 암스테르담조약(1997) 본문에 삽입된 사회헌장을 들어 성찬을 늘어놓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변화는 1991년 급속도로 체결된 신자유주의적 마스트리히트조약에 대한 유럽 시민사회의 반향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더구나 그러한 신자유주의적 시장통합의 핵심은 다름아닌 유럽통화동맹(EMU)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사회지배전략은 그러한 점에서 탁월하다. (신자유주의적) 정치가들은 자국내에서 누더기가 된 사회정책으로 시민에게 립써비스를 하면서 실질적인 시장지배력은 신자유주의를 뼛속까지 체화한 유럽중앙은행 및 각국의 중앙은행 총재들의 손에 쥐어주었다. 형식상 정치적 독립성을 향유하는 이들은 EMU 실현과정에서 정부의 재정적자를 국내 총생산의 3%로 제한하면서 금융자본가와 자산자본가의 위험률을 최소화한 반면, 개별 정부가 사회정책을 위해 쓸 수 있는 비용은 엄격하게 제한했다. 바로 이 때문에 사회학자 삐에르 부르디외를 비롯해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유럽의 시민운동은 EU국가의 중앙은행 수장들(특히 당시 영향력이 가장 크던 독일 중앙은행 총재 한스 티트마이어)을 공격했던 것이다.

유감스럽지만 지금 동아시아에서도 점차 신자유주의적 국제주의자들의 연합(금융자본, 다국적 기업, 신자유주의적 지식인 같은 엘리트, 그리고 이들에 의해 조정되는 정부)에 의해 현실주의적 선택이라는 미명으로(물론 EU 같은 형태로의 발전은 아닐지라도) 역내 시장통합 또는 그 시발점으로서 역내 통화기금 설립이 제기되고 있다. 과연 그것이 아시아 사회의 안정을 추구할 수 있는 대안일까? 지금까지 북미나 유럽에서 진행된 경제통합을 보건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올바른 대답이라고 본다. 두 사례 모두 사회통합이나 정치통합이 전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자본세력을 위한 경제/시장통합에 머무르고 말았으며 그 대가도 엄청났다.

정치와 사회의 통제 벗어난 시장 확대

바로 이러한 점에서 두번째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세계화와 마찬가지로 동아시아의 지역통합은 시민사회가 거부할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그 해답은 이미 세계화 논쟁에서 수없이 지적된 바처럼 정치와 사회에 의해서 다시 시장이 통제되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이다. 문제는 그 영역이 과거 국민국가의 틀 내에서처럼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사정이 그러하기에 문교수가 주장하는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서’라는 전제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듯 ‘국가의 시장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이라는 해묵은 구호의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강조하건대 국가와 시민사회의 이익이 합치된다고 보는 시각은 백번 양보해서 전통적인 사민주의자들의 관점에 동의한다고 해도 냉전시대에나 타당한 낡은 틀이다. 그것은 냉전시대 양대 진영이 대립했을 때나 가능했는데, 국제정치학의 관점에서 볼 때 당시 자본주의 국민국가의 번영은 미국의 헤게모니 우산 아래서나 유효한 것이었다. 이른바 ‘국가독점자본주의론’으로 대변되는 반자본주의적 강령도 그러한 맥락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지난 20여년간 진행되어온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본질은 시장이 국민국가의 틀 안에 제한된 공간을 뛰어넘어 정치와 사회의 통제를 벗어나는 것이다.

고삐 풀린 자본 규제할 시민사회 연대

이제 우리의 진보적 시민사회운동도 그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새로운 대안을 발전시켜야 할 때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올해초 백낙청 교수에 의해 조명된 거버넌스 논의는 그 영역을 국내뿐 아니라 국외로도 확대할 필요가 있다. 당장은 비현실적으로 보일지라도 아시아에서 고삐 풀린 자본의 동력을 규제할 시민사회(아시아)의 연대를 재구성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단순한 상대방 이해하기 식의 시민사회 교류 틀을 벗어나 범아시아차원의 시민의회 구성 등 정치적으로 새로운 국제기구를 구축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국익이 아닌 우리와 아시아 지역 시민사회의 이익을 향유할 수 있는 글로벌 거버넌스 구조를 정착시키는 것이 절실하다. 강조하건대 세계화시대에 국내정치와 국제정치의 영역은 결코 분리된 실체가 아니다. 그러한 점에서 진보적 지식인의 과제는 국제경제질서의 변화를 해석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새롭게 창조하고 변화시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겠다.

2009.6.10 ⓒ 임운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