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자크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

백지운

문명의 역전(逆轉) 앞에서
-마틴 자크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

 

 

rettre세계사적 전환기를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중국의 부상을 예사롭지 않게 주시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아직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지난 이백년 간 우리 안에 굳어진 서구중심주의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서구적 근대에 익숙한 우리에게 중국이 너무나 불가해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탓인지 중국이 글로벌 파워로 떠오를 미래에 대한 의심과 우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경제력은 강할지 몰라도 민주주의나 인권 같은 보편적 척도에 미달한다는 것이 그 이유다.

 

중국을 보는 관점의 이동

 

영국 저널리스트 마틴 자크(Martin Jacques)의 베스트셀러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 패권국가 중국은 천하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When China Rules the World, 2009, 한국어판 안세미 옮김, 부키 2010)는 그런 의심을 안일한 서구중심주의라며 가차없이 일갈한다. 이 책의 주제는 명료하다. 서구적 틀로 중국을 해석하고 비판해온 종래의 관행에서 벗어나 중국이 중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중국이 세계를 어떻게 보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가까운 미래에 중국이 경제뿐 아니라 마인드 차원에서도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말하자면, 저자에게 중국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느냐 아니냐는 이미 논의대상이 아니다. 문제는 중국이 어떻게 세계를 지배할 것이며 그런 세계는 지금까지의 세계와 어떻게 다를 것인가이다.

 

많은 면에서 이 책은 죠반니 아리기(Giovanni Arrighi)의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를 떠오르게 한다. 제노바-네덜란드-영국-미국이 주도해온 자본주의 근대가 이미 회복할 수 없는 퇴조기에 빠져들었으며, 앞으로 중국이 서구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재편하리라는 주장에서 두 책은 비슷하다. 또한 두 저자 모두가 좌파 지식인이라는 점도 유사하다. 아리기가 뉴 레프트 진영의 대표적 인물이라면, 마틴 자크는 1980년대 영국 공산당 저널 『맑시즘 투데이』(Marxism Today)를 전성기로 이끈 편집자였다. 그런데 중국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이 두 서구 지식인의 관점은 비슷한 듯 다르다. 두 사람 모두 중국을 거대한 연속성으로 파악하고 그로부터 서구 근대와 본원적으로 다른 이질성을 발견하지만, 중국의 이질성을 ‘비자본주의적’인 것으로 계통화하고 거기서 자본주의 근대의 폐해를 극복할 단서를 찾았던 아리기와 달리, 자크는 그것을 근대의 확장이자 다양화라는 맥락에서 파악한다. 중국의 부상이 인류 역사에 바람직한지에 대해 자크는 중립적인 편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중국의 부상이 기정사실화되고 있는 지금 그로 인해 달라질 세계를 우리는 어떤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가이다.

 

이 책은 가공할 속도로 치고 올라오는 중국에 대해 놀라울 만큼 무지한 서구 독자들을 위해 씌어졌다. 서구와 다른 DNA를 가진 중국을 서구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판단하는 고집스런 서구중심주의를 근원에서 재고하지 않는 한 중국에 대한 진단은 언제나 오류일 뿐이라고 저자는 단언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비판과 충고는 서구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중국 부상의 최대 수혜자이자 중국과 가장 가까운 우리에게도 중국을 보는 관점은 많은 부분 서구적 틀에 제약되어 있지 않은가. 그 점에서 중국 독해를 위해 이 책이 제시하는 키워드들은 운명적으로 중국과 한배를 탄 우리에게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문명국가’ 중국

 

저자가 제시하는 중국 독해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문명국가’(civilization state)다. 그는 중국에는 서구보다 훨씬 앞서 근대국가의 기본체제가 구축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멀리는 한(漢) 이래 국체관념, 민족관념, 도덕체제, 제도적 틀을 다져온 중국은 유럽에서 17세기 이후에야 수립되기 시작한 국민국가(nation state)와는 다른 형태로 근대국가의 길을 걸어왔다. 서구 열강에 무릎 꿇은 19세기말부터 2001년 WTO 가입에 이르기까지 ‘국민국가’라는 국제적 표준에 맞추기 위해 부단히 애써왔지만, 어디까지나 중국은 국민국가의 얼굴을 한 문명국가일 뿐, 글로벌 강국으로서 지위가 확고해지는 날 문명국가의 본색을 세계에 발산할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여기서 저자가 문제 삼는 것은 ‘근대국가=국민국가’라는 단일 전제다. 그는 근대국가에 국민국가뿐 아니라 중국 같은 ‘문명국가’도 있음을 받아들이라고 역설한다. 중국을 ‘국민국가’라는 표준에 미달하거나 일탈한 존재가 아닌, ‘문명국가’라는 또다른 형태의 근대국가로 인식할 때 서구에 유포된 중국 오독이 불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민주주의다. 중국에 민주주의의 뿌리가 빈약하다는 비관론이나 중국이 결국엔 민주주의의 길을 갈 거라는 낙관론 모두 중국을 국민국가로 전제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저자는 서양에서 중국과 비교 가능한 정치체가 있다면 유럽연합이라고 말한다. 유럽연합처럼 힘의 크기가 고르지 않은 국가들로 구성된 거대한 정치체에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듯, 대륙적 규모와 다양성을 지닌 중국에 민주주의의 적용은 복잡할 수밖에 없다. 장기적으로 중국이 지금보다 더 투명하고 합리적인 정치문화를 만들어가야겠지만 그것이 꼭 지금의 민주주의일 필요는 없다.

 

문명국가라는 각도에서 이 책이 시각의 교정을 요구하는 또 하나의 쟁점은 ‘주권’이다. 인민주권이 정치사상의 핵심인 서구와 달리 중국에서는 늘 국가주권이 중심에 있어왔다. 서구에서 상인·엘리트·종교 집단이 국가와 권력을 두고 경쟁해왔다면, 중국에서는 모든 권력이 국가로 수렴되어왔다. 중국에서 국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방대한 문명을 수호하고 단일성을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에 왜 시민사회의 기반이 약한지도 설명해준다.

 

민족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저자에 따르면 중국에는 근대적 민족관념이 생기기 훨씬 전부터 한족(漢族)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단일정체성이 형성되어 있었다. 한족이라는 유구한 문명정체성에 근원을 두는 중국의 민족주의를 근대적 의미의 민족주의와 동일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13억 인구의 90퍼센트가 넘는 사람들이 자신을 단일한 민족이라 믿는 이 난센스야말로 중국의 민족주의가 문명정체성에 기반한 것임을 말해준다.

 

중국을 문명국가로 보아야만 비로소 납득할 수 있는 사례로 저자가 거듭 강조하는 것이 일국양제(一國兩制) 시스템이다. 중국에 반환되면 곧 사회주의화되리라는 서구인들의 예측과 달리 홍콩의 자본주의 시스템은 지금껏 유지되고 있다. 저자는, 일국양제 시스템은 일국가-일체제라는 국민국가적 발상으로는 이해할 수 없으며 일국가-다체제를 허용하는 문명국가의 관점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유교적 국제질서의 부활

 

국민국가라는 서구적 관점에서 벗어나 ‘문명국가’로 중국을 읽으라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이 책을 읽는 내내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도대체 ‘문명국가’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다만 ‘문명국가’의 핵심에 유교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통일을 중시하는 사상, 중앙집권적 특징, 국가권력의 절대화, 중화사상, 가족과 국가의 연계 등 유교는 중국의 국가관념 및 제도 형성의 핵심에 있다. 저자는 중국공산당의 통치 기술과 이념에서도 유교적 연속성을 발견한다. 아리기도 유교전통과 사회주의혁명의 연관성에 주목했지만, 그가 사회주의혁명에 무게를 두었다면 자크는 유교를 더 강조한다. 자크에게 사회주의는 유교적 문명국가라는 거대한 체제가 연속하는 한 형태이다.

 

장래의 국제관계가 베스트팔렌체제에서 조공(朝貢)체제로 대체될 것이라는 대담한 예측도 중국이 유교적 문명국가라는 전제에서 나온다. 저자는 중국이 부상하면 적어도 동아시아에서는 조공체제가 부활할 것이며, 호주, 뉴질랜드, 아프리카, 남미까지 조공체제로 빨려들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한다. 그런데 조공체제의 부활을 예견하는 저자의 태도는 굳이 말하자면 낙관적이다. 조공체제란 중국의 우위를 전제로 한 위계질서에 기반하므로 대등한 국가관계를 기초로 하는 지금보다 더 안정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유교적 정치질서의 핵심이념으로 지적한 ‘조화(調和)’는 주목을 요한다. 유교에서 조화는 차이를 필수적 전제로 한다. 말하자면 조화란 평등하고 대등한 대상 간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힘의 차이를 인정했을 때 나오는 관념이다. 그 점에서 본다면 후 진따오(胡錦濤) 정권 이래 중국이 강조해온 ‘조화’는 중국 내부만을 향한 이념은 아닌 것이다.

 

‘탈구입아(脫歐入亞)’의 사상

 

어쩌면 마틴 자크의 주장은 서구보다 동아시아에서 더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역사의 방향이 중국을 향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접어야 할 것은 서구인의 자존심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의 관점에서 중국을 보자는 저자의 주장이, 의도야 어찌됐건, 지금 중국의 관방(官方)담론이나 주류학계의 주장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적잖은 것도 사실이다. 또한 저자 자신도 티벳이나 신장 지역의 충돌과 대만 문제 등의 심각성을 인지하면서도 그것을 문제 삼기보다 중국의 특징으로 이해하려 드는 점도 거슬릴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약점들은 견조(堅調)한 현실주의라는 이 책의 미덕에 대부분 상쇄된다. 저자가 강조하듯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선 중국의 부상이라는 현상의 본질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일이다. 필리핀 뉴스 전용 방송 ANC와의 인터뷰에서 자크는 남중국해를 둘러싼 중국의 패권주의를 어떻게 보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대답했다. 즉 필리핀이 동아시아에서 미국 대변인을 자임해온 구태를 깨고 중국과의 대화해(rapprochement)라는 큰 맥락에서 남중국해 문제를 풀어가라는 것이다. 그것이 무턱대고 중국에 굴복하라는 뜻이 아님은 물론이다.

 

역설적으로 자크의 주장은 130년 전 후꾸자와 유끼찌(福澤諭吉)의 「탈아론(脫亞論)」을 떠오르게 한다. 이 글에서 후꾸자와는, 문명은 천연두와 같아서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차라리 적극적으로 맞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훗날 일본 아시아 침략주의의 시원으로 악명 높았던 이 글에 대해 타께우찌 요시미(竹内好)는 적어도 이 시기의 후꾸자와에겐 사상가로서의 긴장이 살아 있었다고 간평한 바 있다. 뒤집어보면 이는 결과적으로 ‘탈아’가 문명을 사상화하는 데 실패했음을 뜻한다.

 

바야흐로 이제 문명은 중국을 향하고 있다. 이를 두고 위협론, 대안론, 기회론 등 논의가 분분하다. 중요한 것은 이 거대한 전환을, 어떻게 지난 두 세기의 근대를 돌아보고 미래를 가늠할 사상 형성의 계기로 삼을 것인가이다. ‘탈구입아(脫歐入亞)’로 치우치지 않되 서구만 바라보는 시대착오를 견제하면서 현실을 보는 냉철한 눈이 어느 때보다 종요롭다.

 

 

백지운 /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2015.5.2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