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버스’ 공약을 근심하는 이들에게

김종엽

김종엽 /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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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곤 전 교육감이 새정치민주연합의 경기지사 후보 출마를 선언하며 내놓은 ‘무상대중교통’ 공약이 논란거리다. 보수신문과 종편은 말이 나오자마자 ‘공짜 버스’ ‘포퓰리즘’ ‘졸속공약’ ‘노이즈 마케팅’ 운운하며 거의 융단폭격을 퍼부었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타자의 반응을 살펴야 할 때가 종종 있는데, 이 경우가 그런 것 같다. 보수언론의 예민한 반응은 그들을 두렵게 하는 무엇이 이 공약에 들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이 없다면 보수언론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맹공을 퍼부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무상급식이라는 하나의 성공에 이어 등장한 유사한 공약이, 유사하기 때문에 성공할지 아니면 유사할 뿐이어서 실패할지 예단하긴 어렵다. 공격이 계속되고 약점이 지속적으로 부각되어 사람들의 생각 속에 파고든다면 실패할 수도 있지만, 재빨리 구체성과 실행력을 갖춘 정책이 제시된다면 성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공의 향배와 무관하게 또는 그것보다 중요한 일은 ‘무상’ 자체의 의미 그리고 그 안에 내연하고 있는 윤리적 상상력에 대해 탐문해보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무상버스 공약에 대한 수많은 공격, 그러나…

 

무상대중교통에 대한 보수언론의 일차적 공격은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맞는 주장일 게다. 하지만 무상버스에 들어가는 돈만 생각하는 것은 단견이다. 교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도로를 더 깔 수도 있고, 무상버스를 통해 대중교통수송분담률을 높일 수도 있다. 둘 가운데 어떤 것이 더 낫고 경제적인지는 정말 꼼꼼하게 계산해봐야겠지만, 도로 많이 깔고 전철을 더 깐다고 해서 교통문제가 해결되는 건지, 그게 무상버스보다 더 좋고 값 싼 해결책인지 단언하긴 쉽지 않다. 예컨대 용인경전철이 무상버스보다 싸고 좋은 것일까?

 

보수언론은 엄청난 예산 운운하며 세금 인상에 대한 우려를 부추기기도 한다.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에게 “당신은 자가용 탈 건데 무상버스를 위해 세금을 더 낼 거야” 하는 심리적 압박을 은밀히 가하고 있다. 무상버스 비용을 누가 부담할지는 중요한 문제일 텐데, 아마 담세능력을 고려하면 부유층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유층이 일방적으로 손해인가? 그렇지 않다. 무상버스를 위한 세금을 부유층이 더 낼지 모르지만, 그렇게 해서 대중교통수송분담률이 올라가면 그들의 자가용은 더 잘 뚫리는 길을 질주할 수 있다. 연비도 좋아지고 시간을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으니 그들은 아무 혜택 없이 세금만 더 내는 것이 아니다. 아니 좀더 공세적으로 말하면 무상버스란 자신이 쓸 수도 있는 도로의 지분을 다른 시민에게 양보하고 버스를 탄 이들에게 제공되는 혜택이다. 그런 견지에서 보면 무상버스는 실은 유상버스이기도 하다.
 
보수언론은 무상대중교통 혹은 무상버스를 금세 ‘공짜’ 버스로 바꿔 말했는데, 이는 정책의 성격을 쉽게 이해시켜주려는 것보다는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공짜’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활성화하려는 의도인 것 같다. 그런데 공짜가 정말 나쁜 것인가? 조금만 생각해보면 삶에 주어진 정말 좋은 것들은 대부분 공짜임을 알 수 있다. 햇볕도, 맑은 공기도, 울창한 숲도, 굽이굽이 펼친 산맥도, 강물도, 바다도 다 공짜다. 아니 그런 자연의 은혜를 향유하는 내 생명조차도 공짜였고, 나를 품어 먹이고 키운 어머니의 사랑도 거저 주어진 것이다. 우리의 자유, 우리의 평등 또한 억압과 투쟁한 누군가가 우리에게 준 선물인 것이다. 그러니 무상(無償)이야말로 우리 삶의 무상(無上)의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윤리적 상상력으로 가닿을 수 있는 다른 현실

 

이렇게 내 삶에서 좋은 것이 거저 얻은 공짜였음을 아는 일은 우리가 이 세계에 무엇인가를 주기 전에 이미 받아왔으며, 그런 의미에서 세계에 대해 원초적 부채를 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이 점을 인정할 때 우리는 다른 누군가에게 무상으로 어떤 선물을 보내야 할 것 같은 감정 혹은 의무를 느끼게 되며, 그럴 때 무상이 무상을 이끌고, 선물이 선물로 이어지는 세계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혹자는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정치적 문맥을 벗어나는 일이고, 우리가 지금 다루는 것은 자연의 은혜도, 개인적 사랑도, 혹은 이미 유명을 달리한 헌신적인 선조들의 이야기도 아니며, 우리의 돈으로 우리의 생활을 조직하는 문제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영역에서는 “공짜 점심은 없다”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 그 점심은 햇살도 어머니 사랑도 아니며, 사회 안쪽이되 가족 바깥의 문제이긴 하다. 하지만 누군가 결국 비용을 치러야 하며, 그 비용이 더 클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하는 ‘공짜 점심론’의 냉정한 현실주의는 인색하고 근시안적인 것이다. 누군가 비용을 치르겠지만 그 덕분에 배고픈 이들이 지금 우선 점심을 먹을 수 있다. 그들은 기운을 차리고 기회가 닿는 대로 이 세상의 선의에 응답할 것이며, 못 갚는 이들이 있으면 또 어떤가? 이런 과정이 인색한 이들에게는 대출과 후불의 잔치로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가 비용을 선물로 만들면 그것은 다시 선물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이것이 세상이 선의를 파종하고 갈무리하는 방식이다.

 

김상곤 후보는 초등학생과 장애인 그리고 노인부터 공짜 버스를 태우겠다고 했다. 노인들이 전철을 무료로 탈 수 있는 나라에서 전철이 모자란 경기도의 노인들에게 공짜 버스를 제공해서 안될 이유가 무엇인가? 공짜 버스 혹은 공짜 점심을 얻었던 초등학생들이야말로 나중에 공짜 점심에 저녁을 얹어 되갚을 이들이 아닌가? 그러니 공짜 점심에 눈을 부라리는 인색한 이들이여, 한번 더 생각해보길 바라네. 생의 어느 한 모퉁이에서 공짜 점심 한 그릇 먹은 적 없는 삶, 어떤 허기진 이에게 공짜 점심을 건넨 적 없는 삶, 그런 삶이야말로 정말로 가련하다는 것을.

 

2014.3.26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