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의 현대적 부활을 제안함

임형택

임형택 | 성균관대 한문교육과 교수

글이라면 대개 그 나름으로 주의주장을 담기 마련이지만, 나는 여기서 하나의 특정한 제언을 하고자 한다. 무언가 하면, 산문을 글쓰기 방식의 하나로서 확인하고 나아가 문학양식으로서 되살리자는 것이다.

‘산문을 되살리자’라니 무슨 생뚱맞은 이야기고 그러면 대체 어떻다는 건지 고개를 갸우뚱할 사람이 적지 않을 듯싶다. ‘되살리자’고 한 뜻은 원래 산문이 문학사에 방대한 축적을 가진 것이 객관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줄곧 있었던 것이므로 오늘날에도 당연히 있어야 한다는 논리를 물론 세울 수 있겠으나 그런 차원 이상으로 글쓰기 방식으로서의 산문은 현대사회에서 필수불가결로 요망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당면한 문학의 위기는 산문이란 존재가 근대문학에서 애매하게 된 거기서 기인했으며, 또 지금 관심사로 떠오른 인문학의 위기현상도 따지고 들어가면 산문의 실종과 꼭 무관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때문이다.

대개 산문이란 말은 운문에 상대되는 문체론적 개념으로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散文’이란 이름으로 정지용의 작품집이 1949년에 버젓이 간행된 바 있으니 시에 상대되는 양식개념으로도 전혀 쓰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6·25전쟁통에 정지용이 남한사회에서 실종됨에 따라 문학양식으로서의 산문도 실종된 꼴이 되고 말았다.

산문은 예전에 ‘文’이라고 일컫던 것이다. 본디 문은 시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다. 전통사회에서 문학이라면 으레 ‘시문’이었으며, 소설은 후발주자로서 시문에 견주어 위상이 훨씬 떨어져서 문학으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글쓰기 행위라는 면에서는 시에 비해 문이 좀더 기본적이고 일상적인 표현형식이다. 일기·서간·기행은 물론 철학적 사색이며, 정치사회적 견해, 자연에 대한 관찰과 감흥이라든지 하는 모두가 우선 문으로 기록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은가. 우리가 역사상에서 문인학자로 기억하는 인물들–위로 최치원에서 이규보, 이색, 아래로 박지원, 정약용, 김정희에 이르기까지–은 대체로 시작품도 남겼지만 문의 창조역량이 탁월했고 문에서 그 존재가 빛났다.

문은 근대로 와서 어디로 갔는가? 문학의 근대적 범위에서 문은 문학의 장외로 밀려난 신세가 되고 말았다. 기껏 수필이란 이름으로 곁방살이를 하는 셈인데, 수필은 종래의 문의 큰 그릇에서 작은 한 부분이었다. 요컨대 근대문학이 문예주의를 취함에 따라 문은 극히 위축된 모양으로 잔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문학은 종래 문이 가지고 있었던 역량과 역할을 스스로 방기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것이 내가 무엇보다도 주시하는 문제점이다.

우리와 같은 동양권으로 한자문화를 공유하였던 중국의 경우를 잠깐 돌아보자. 근대 중국은 종래의 문을 산문이란 개념으로 호출한다. 그리하여 중국 근대문학에서 산문은 당당하고 우뚝하게 서 있다. 중국의 근대정신을 개척한 루쉰을 우리는 대개들 《아Q정전》의 작가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실은 그의 작가로서의 본령, 낡고 비뚤어진 중국의 사회와 문화를 개조하기 위한 필봉은 주로 산문이란 형식으로 발휘되었다. 유사한 문화전통과 유사한 시대상황에 처했던 근대 한국이 산문양식을 일으켜 세우려는 노력이 뚜렷하지 않았던 것은 근대주의-문예주의로 경도된 때문이요, 작가들의 창작자세 역시 철저하지 못했다는 반증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우리의 근대적 지식제도에서 문학은 ‘문예’로 편협해진 한편, 분화된 학문은 과학성을 맹종하여 문학성을 금기시하기에 이르렀다. 지금 인문학의 위기는 소급해보면 역사적 근대의 출범과 함께 시작되었다. 주지하듯 근대는 사회과학의 논리에 의해 주도되고 과학기술이 떠받쳐주었던 터이기에 전통적 인문학은 ‘찬밥신세’로 전락하는 것이 거의 불가피하였다. 게다가 인문학도 과학성을 추구해야 한다면서 문학성을 스스로 금기시한다. 인문학과 산문의 아름다운 만남의 길이 원초에 차단된 것이다. 문이 근대적 호출을 당하지 못한 채 기껏 수필로 잔존하게 된 요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시대에서 산문은 부재했다고 나는 보지 않는다. 현실에 대응하여 진실하고 투철한 글쓰기를 하다보면 저절로 훌륭한 산문이 나올 수 있다. 그런 성과를 파악하는 개념이 부재했을 뿐이다. 나는 그 적절한 사례의 하나로 리영희를 중시하고 있다. 마침 리영희가 지난 6월에 심산상을 받게 되어 내가 그의 저서에 대한 논평을 맡게 되었다. 나는 산문작가로 리영희를 이렇게 그려보았다.

“리영희, 그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문필가다. 그는 20대 통역장교로 근무할 시절 ‘소총 위에 올라앉은 앵무새’로 도안된 병과마크를 옷깃에 붙여야 하는데 모멸감을 느꼈다고 고백한 바 있지만 지금 그의 일생의 상징을 ‘펜’이라고 한다면 스스로 흡족해하는 미소를 짓지 않을까.

그는 전장을 뚫고 다닌 7년의 군복무를 청산하고 민간인으로 복귀하면서 기자로 출발하였다. 그것도 아침저녁으로 세계소식을 받아서 전하는 외신부였다. ‘저널리스트로서 펄펄 뛰는 사건들을 뜨겁게 쥐고 그것을 식혀가면서 생각’하는 과정을 거침에 따라, 그는 어느덧 개안이 되어 세계를 인식하고 ‘펜’을 쥔 주체를 자각하게 된 셈이다. 그리하여 그는 펄펄 뛰고 와글거리는 뉴스의 표피를 가공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당면한 시대의 진실을 파고든다. 기자로 안주하지 않는 학자의 자세였다. 이런 결과물로서 《전환시대의 논리》를 비롯한 《우상과 이성》 《80년대 국제정세와 한반도》 등 역작을 세상에 내놓았다.

리영희의 펜은 이 땅의 독자들을 무한히 끌어당긴 것이 사실이다. 문필가로서의 위력을 십분 발휘했다고 하겠다. 그 비결은 어디 있을까? 첫째로 그의 글속에 담긴 내용이 요긴하고 참신한 때문이었음은 더 말할 나위 없다. 체제의 논리에 가려진 실상, 우상에 의해 왜곡된 진실을 그는 현장자료에 근거한 분석을 통해서 밝히고 바로잡아주었다. 우리나라의 학술사에서 일찍이 ‘숭명북벌(崇明北伐)’이라는 허위의 이데올로기를 실사구시를 일깨워 비판한 적이 있었거니와 리영희의 ‘친미반공(親美反共)’의 우상에 과감히 도전한 저 ‘문투(文鬪)’를 나는 실사구시 정신의 현대적 부활의 한 사례로 평가하고 있다.

그의 글은 읽는 맛이 각별하다고들 말한다. 의미내용을 절묘하게 살린 문체의 매력은 무엇에 연유하였을까? 필시 그 스스로 갈고 다듬은 글쓰기 솜씨일 터다. 나는 리영희란 존재가 산문양식으로 우리 현대문학사의 고봉에 우뚝 서야 할 것으로 생각해왔다. 산문가로서 리영희를 한번 중국의 루쉰에 견주어보자. 루쉰의 산문은 전투적 적응력이 탁월한 ‘일종의 사회논문’이라고 규정되고 있거니와, 리영희는 한국현대사에서 현실참여의 날카로운 무기로서 근대적인 산문양식을 개발한 것이다.”

2006.10.24 ⓒ 임형택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