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기호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이민경

변화를 위한 멈출 수 없는 시도
– 엄기호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따비 2013

 

 

ewqeq어느 시인의 표현을 빌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학교’였다고 고백적인 글을 쓴 적이 있다. 돌이켜보니 학교는 내게 놀이터였고, 선생님들이 들려주는 교과서 안팎의 이야기는 새로운 세계로의 초대였다.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그 자체로 즐거웠고, 새로운 세상을 알아가는 설렘과 자유로움도 있었다. 아마도 별다른 가족적 자원이 없었던 탓에 학교는 집보다 훨씬 다양한 기회와 경험을 제공해줄 수 있는 유일한 ‘공적’ 공간이었던 이유가 컸을 것이다. 근대 공교육의 신화가 내 성장의 역사에도 그대로 배어 있는 셈이다.

 

물론 가난한 집 아이가 학교교육과정을 통과하며 겪어야 했던 상처와 배제의 경험도 적지 않다. 입시경쟁, 통제와 규율 속에서 느꼈던 불안과 답답함도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의 기억은 내게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교육’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하면서 여전히 ‘학교’를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게 지극히 주관적인 나의 의미화와는 달리, 지금 학교는 삶의 기회도, 의미있는 배움의 공간도 되지 못하는 듯하다. 희망, 배움, 성장, 삶의 기회보다 무기력, 황폐함, 경쟁, 폭력, 계층 재생산 등의 언어가 훨씬 자주 ‘학교현실 담론’에 등장한다. 이런 환경에서 교사로 살아간다는 것의 무게를 가늠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열정적일수록 더 ‘선생 노릇’ 하기 힘들어지는 게 요즈음 교육현실이라고 한다. 학교는 더이상 과거처럼 ‘감히’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교사들의 교과수업이 지닌 권위는 사교육에 밀린 지 오래라는 자조 섞인 이야기도 들려온다.

 

교사들은 어떻게 소진되는가

 

연구와 강의 등으로 학교현장을 다니다보면, 학교에서 무엇인가를 해보려고 해도 냉소적인 반응만을 보내는 아이들에게 상처를 입게 된다는 교사들의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좋은 선생 노릇하기가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는 이야기는 좋은 교육을 고민하고 실천해온 교사들에게서 자주 듣는 말이다. 학교의 위기를 교사들의 탓으로 돌리는 사회 분위기로 인해 때로 교사는 ‘공공의 적’이라는 사회적 시선도 견뎌야 한다고 한다.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라는 엄기호의 책에 그래서 충분히 공감하게 된다.

 

이 책은 열정적인 교사들이 어떻게 소진되고 고립되어가는지를 교사들의 목소리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하는 교육 현장보고서다. 저자의 박사논문을 펴낸 책이라 오랜 현장연구 작업의 결과로 짐작되는 학교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이 주는 울림이 적지 않다. 표면적인 학교풍경 스케치를 넘어 학교와 교사들이 처한 현실을 매우 입체적으로 드러내주는 것도 미덕으로 다가온다. 학생, 학부모와의 관계에서 쌓이는 교사들의 무력감, 소통 없는 교무실 문화, 관료적이고 통제적인 학교 소통구조에 대한 이야기를 따라가노라면 그 황량한 풍경이 머릿속에 펼쳐지면서 절로 한숨을 짓게 된다. 저자의 표현처럼 냉소와 비난 사이에 있는 교육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의 딜레마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학교가 미래세대를 키우는 희망의 공간이 아니라 피곤과 짜증으로 가득 찬 무기력한 공간임을 드러내주는 이 책은 그리 낯설지 않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무기력’은 최근 한국 학교교육의 현실을 관통하는 열쇳말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학교붕괴’ 혹은 ‘교실붕괴’가 지배적인 담론이 되면서 무력감은 비단 학생뿐 아니라 교사들에게도 급속하게 퍼져가고 있다. 초임교사의 열정은 3년을 넘기기 힘들다는 속설도 있다. 학생들에게 학교란 잠을 자면서 수업시간을 그냥 견디거나 졸업장을 취득하는 곳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 것처럼 교사들도 더이상 자신을 ‘스승’으로 정의하거나 특별한 전문직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이 냉정한 한국교육 현실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가져야

 

폐허에 대한 냉정한 응시를 통해 역설적으로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저자의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관통하는 정서는 학교교육에 대한 피로와 비관론이다. 이러한 비관론은 현장경험에 기반한 것이어서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현실을 관통해나갈 아무런 힘도 가질 수 없다는 점에서 문제적일 수는 있다. 물론 그 어떤 변화도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루기엔 한계가 있다. 지금의 교육문제가 교사들의 탓은 더더욱 아니다. 구조적 문제를 그대로 두고 미시적 변화를 외치는 것은 모든 책임을 개인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위험성이 있다는 점에서 경계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구조적인 요인은 매우 중요하고 지속적으로 풀어가야 할 핵심적인 과제이지만, 역으로 구체적인 행위자들의 의지와 실천 없이는 그 어떤 변화도 불가능하다. 부르디외(P. Bourdieu)의 통찰대로 인간의 삶과 사회는 구조화되는 동시에 구조화하는 역동성을 지닌다.

 

무조건 ‘하면 된다’는 불도저식 낙관론을 설파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낙관의 논리는 ‘언제나 가능하다’는 것이고, 희망의 논리는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마음산책 2014) 불가능하지 않으므로 노력은 할 수 있고 또 필요하다는 의미다. 이반 일리히(Ivan Illich) 식으로 말하자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대’가 아니라 ‘희망’이다.

산다는 일이 별 게 없다는 생의 비밀을 알아차렸다 하더라도 뭔가를 시도하면서 주어진 생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인 것처럼, 교육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수업이, 학교가 바뀐다고 아이들의 삶이 특별하게 달라지지도, 견고한 사회구조가 바뀌지 않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변화를 만들어내려는 과정에서 상처만 입고 실패로 끝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픔과 상처로 끝날 줄을 알고도 사랑을 하는 것처럼, 수없이 경험한 그리하여 예측 가능한 다양한 장벽과 어려움 혹은 실패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도 무언가를 또다시 시도해야 되지 않을까라는 화두가 이 책을 읽는 내내 떠나지 않았다. 학교를 ‘우정의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교사들이 둥그렇게 앉아야 한다는 저자의 말도 아마 다른 언어로 표현된 동일한 이야기일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상상력의 역사’라고 정의한 프랑스 사회철학자 까스또리아디스(C. Castoriadis)의 통찰을 빌리자면, 지금 우리의 삶은 인류의 끊임없는 상상력이 만들어온 흔적의 총합이다. 지금 ‘교육 불가능의 시대’에 여전히 필요한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거나 당연시되는 것을 바꾸어 내기 위한‘ 불온한 상상력’, 그리고 그 상상력을 행동으로 옮기는 ‘무모한 용기’인지도 모르겠다.

 

* 이 글의 문장 일부는 필자의 책 『거꾸로 교실, 잠자는 아이들을 깨우는 수업의 비밀』(살림터 2015)의 것을 재구성하였음을 밝힙니다.

 

이민경 / 대구대 교육대학원 교수

2015.12.16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