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의 미소

김사과

김사과 / 소설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자유의 나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더이상 듣기 힘든 이 진부한 말을 미국에 갔을 때 실제로 들어본 적이 있다. 마침 부시 정부 시절이라 솔직히 우스웠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딱히 우스워할 처지가 아니었다. 엄밀히 따져봤을 때 여전히 전쟁이 진행중인, 게다가 국가보안법이 건재하는 내 나라보다는 현 정부의 외교정책을 비판하는 다큐멘터리를 수출해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고, 포르노잡지 출판업자의 편을 들어주는 판사를 가진 그 나라가 확실히 훨씬 더 자유로워 보였던 것이다.
 
사실 미국이 가진 자유의 나라라는 이미지는 예전의 한국과 같은 2,3세계의 사람들에게 거부하기 힘든 매력이자 반론의 여지가 없는 미국적 체제의 우월성의 상징이었다. 히피들의 쌘프란시스코, 잭슨 플록과 앤디 워홀의 뉴욕은 레닌그라드와 집단농장으로 상징되는 소비에트연합에 대항해 전세계에 미국적 질서를 홍보하는 가장 쿨한 팸플릿이었다.

자유의 나라에 찾아온 안전강박증

물론 나는 미국이 자랑하던 ‘자유’라는 이미지가 단지 냉전시대 체제경쟁의 도구로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낸 사악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재밌는 건 1990년대초 공산권의 붕괴 이후 자유의 위상과 색채가 미묘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거다. 9·11사태 이후의 미국을 생각해보면 그 차이는 더 확연해진다. 한마디로 말해 미국은 더이상 이 멋진 개념을 자국의 공식적 이미지로 사용하고 싶지 않은 것 같다. 대신 미국이 이제 원하는 건 ‘안전’이다. 1980년대 위험함으로 악명이 높았던 뉴욕 맨해튼의 동남부 지역에는 이제 전면 금연을 실시하는 쾌적한 술집들이 길게 늘어서 있고, 감시카메라가 빼곡한 거리는 밤 12시가 넘어 여자 혼자 돌아다니는 게 가능할 정도로 안전하다.

하지만 여전히 불충분하게 생각되는지 공항에서의 검색은 날이 갈수록 정밀해져만 가고 사람들은 안전요원의 괴상한 요구에 불평 없이 따른다. 미국인들은 더이상 잭 케루악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돈도 계획도 없이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히치하이킹을 할 정도로 순진하지 않다. <CSI> 같은 인기 높은 범죄수사물은 우리가 사는 곳이 얼마나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인가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예측 불가능한 모든 것은 호기심이 아닌 공포의 대상이다. 그리고 그 공포가 현실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사람들은 기꺼이 부자유를 감수한다.

참을 수 없는 ‘예측 불가능성’의 불안

그런데 이건 단지 미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고향인 미국에서 위험물로 낙인찍힌 자유는 이제 다른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자유란 더이상 멋지고 신나는 게 아니다. 불길한 것, 위험한 것, 해로운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자유는 어디에 있는가? 바로 아프가니스탄에 있다. 아니면 내전중인 아프리카에 있다. 혹은 아시아에서 온 테러리스트의 옷에 감춰진 폭탄, 분노로 가득한 고등학생이 든 총, 그리고 영화 <다크 나이트>의 조커가 짓는 미소에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다크 나이트>의 조커

<다크 나이트>의 조커는 정말이지 요즘의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모든 것을 모아 한 인간의 형태로 빚어놓은 듯한 인물이다.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는 건 예측도 이해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그를 모른다. 무슨 생각으로 무엇을 왜 하려는지 추측할 근거조차 없다. 왜냐하면 그는 이름도, 소속된 곳도, 일정한 거주지도, 심지어 입고 있는 옷의 상표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내 흥미를 끄는 건 상표 없는 옷이다. 범죄수사극에서는 종종 범죄자가 사들인 상품을 통해 그를 찾아내는 장면이 나온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은 구매자에 대해 말 그대로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커한테서는 바로 그 요소가 빠져 있다. 그러니 우리는 그에 대해서 알 수가 없고, 그게 조커가 가진 힘의 핵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경제적 합리성이라는 환상

악당들과의 거래로 받은 돈에 불을 지르는 유명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왜 그는 거물 악당들도 꺼리는 짓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는가? 왜냐하면 그 거물 악당들의 최종목적은 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돈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 돈을 위해서 일한다. 그러니 자본주의체제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은 근본적으로 위험하지 않은 존재이다. 하지만 조커는 다르다. 그는 댓가로 받아낸 돈을 아무 미련 없이 불태워버린다. 그는 게임의 룰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단지 자신의 욕망–세계가 불타는 것을 보고 싶다는–을 이루기 위해 행동한다.

어쩌면 그가 증명하려는 것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이 게임 자체가 결국 사람들이 힘겹게 쌓아올린 인공물에 불과하다는 것, 따라서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체제 내로 환원되지 않을 욕망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이용한다면 아주 약간의 힘으로도 세상을 완전히 뒤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가 바란 것은 최악의 변화였지만 말이다.

현실의 조커들이 우리에게 반복해서 증명해내려는 것도 결국 같다. 그들은 경제학 교과서에서 끝도 없이 강조하는, 인간은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동물이라는 명제를 온몸으로 부정한다. 그들은 이익이 아니라 신념–그게 얼마나 바보 같은 것이든지 간에–에 따라 행동한다. 그리하여, 목이 마른 사람은 한잔의 물을 마시기 위해 천만원을 지불할 거라고 주장하는 합리주의자들을 공포에 빠뜨린다. 어떤 사람들은 그걸 마시는 대신 그냥 죽는 것을 택한다.

고담시는 어떻게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여기까지 읽고 어떤 사람들은 내가 순진한 망상에 빠져 테러리스트들을 미화하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말하려는 것은 사실 그 이상이다. 아니 내가 진짜 궁금한 건, 왜 이런 엄청난 힘과 가능성을 지닌 인물이 조커 같은 추하고 끔찍한 괴물 같은 악당으로 그려져야 했는가이다. 그리고 그의 위험함은 왜 하필이면 상표 없는 옷이나 돈을 불태우는 장면 따위를 통해 묘사되어야 했나. 그건 어쩌면 자본주의체제가 자신의 내부로 수렴되지 않고 자꾸만 외부로 흘러나가는 ‘어떤 다른 것’에 대해서 갖는 공포를, 다시 말해 체제가 가진 틈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렇다면, 지금보다 나은 세계를 바라는 한 사람의 입장에서 난 조커의 그 섬뜩한 미소를 좀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조커의 미소에 놀라 굳어버리는 우리들은 어쩌면 겁에 질려 다른 가능성을 혼란과 파괴로 오해하고, 일시적인 평화를 위해 기꺼이 외부의 권위에 복종하는 최악의 선택을 저지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최악의 선택을 막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늘어선 감시카메라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게 아니라 공포의 실체와 대면하는 것이다. 조커의 일그러진 미소에서 왜곡되어버린 자유와 저항의 가능성을 발견할 때, 비로소 고담시(市)는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필요한 건 배트맨 같은 어둠의 기사도 하비 덴트 같은 거짓 영웅도 아니다. 더 많은 안전과 그 안전을 위탁할 권위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 응시다. 그것만이 우리를 진정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

2010.1.2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