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회
말하자면 민규는 감정에도 여러 층위가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자력으로 통제가 어려운 감정도 분명히 있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라고. 어떤 감정은 노력하면 통제가 가능하다고. 마음먹기에 따라서, 자기의지에 따라서,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인간은 별로 강인한 존재가 아니며, 자신이 하나의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집 안에서 어깨 근육을 아무리 빳빳하게 긴장시킨 채 지내도, 양말도 벗지 않고 발뒤꿈치를 살짝 든 채 걸어 다녀도, 그것은 마음의 거리와는 별 상관이 없었다. 하나의 공간과 그 안의 사람은 억지로 가까워질 수도, 억지로 멀어질 수도 없었다. 생활 안에서 서서히 서로에게 깃들 뿐이다.
첫번째 집을 비우라는 문자 메시지를 받고 나서도 민규는 눈치채지 못했다. 처음이라 늘어져 있던 자신의 짐들을 치우고 욕실과 침구를 비롯하여 집 안 정리를 깔끔하게 마치는 데에 시간이 꽤 걸렸다. 현관문을 반쯤 열고 밖으로 나오다가 그만 멈칫했다. 이제 자신의 몸을 밖으로 빼낸 다음, 문을 닫으면 끝이었다. 다시 열지 못하는 것이다. 안으로 다시 들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문을 사이에 두고, 이쪽과 저쪽 사이에 바닥의 차이가 완연했다. 안쪽 바닥에는 검정색 바탕에 흰색으로 직선과 곡선의 기하학적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바깥쪽의 바닥은 콘크리트였다. 예기치 못한 서운함이 몰려왔다.
두번째, 세번째, 네번째…… 집을 옮기는 일을 거듭할수록 그 마음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작별은 매번 서운하기만 했다. 시간이 흘러도 마음의 근육은 단단해지지 않았다. 이를 닦고 나서 칫솔과 양치컵을 다시 벽장 안에 들여놓는 삶을 살고 있대도 마찬가지였다. 아홉번째 집에서 지연을 만났다. 열번째 집에 그녀를 데리고 갔다. 계약조건을, 처음으로 어긴 것이다. 창 너머의 불빛들을 꼭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규칙을 이겼다. 집에 들어온 그녀는 대체로 조용했다. 지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이윽고 지연은 전화기를 꺼내어 집에 대해 검색했다.
“십억. 십억이야, 이 집이.”
그렇게 말하는 지연의 목소리에는 흥분도, 부러움도, 갈망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를 놀라게 한 것은 그 음성의 평이함 또는 평온함이었다. 그 공간들에 대한 자신의 복잡한 심경과는 사뭇 다른, 그녀의 단순하고 쉬운 한마디가 귓가에 오래 맴돌았다.
천만원과 십억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구억 구천만원.”
지연이 명쾌하게 대답했다.
민규에게 그것은 아득하고 까마득한 숫자였다.
“오빠, 이상하지 않아? 저런 창문 하나를 가지려면, 그런 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게.”
그들의 일터인 카페 근처에도 아파트 단지들이 몇 있었다. 지은 지 이십여년이 다 되어가는, 겉보기엔 평범하기 그지없는 아파트들의 가격도 비쌌다. 일부러 확인하고 싶지 않아도, 대로의 부동산을 지나다보면 저절로 알게 되고 마는 사실들이었다.
그 무렵, 일하는 곳에서 사건사고가 잦았다. 베이커리 까페와 같은 건물 2층에 프렌치 레스토랑이 입점하면서 그의 업체가 그쪽 방문객들의 주차도 대행하게 되었다. 차를 가지고 온 사람들은, 건물 앞에서 그를 발견하는 순간 그냥 차를 세워버렸다. 길 한가운데인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내버리기도 하듯 차에서 내렸다. 건물 주차장에는 주차할 만한 자리가 열대 남짓뿐이어서 인근에 새로 계약한 기계식 주차장에 차를 넣곤 뛰어서 되돌아와야 했다. 그곳에 세운 차를 찾으러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와 동료가 둘 다 부스를 비우기라도 하면, 주차요원을 기다리고 있던 대부분의 손님은 짜증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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