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경제와 재정위기의 정치경제학

정건화

정건화 / 한신대 교수, 경제학

 

사용자 삽입 이미지지난 9월 8일 오바마 미 대통령은 의회 연설에서 4470억달러 규모의 재정부담이 예상되는 ‘미국 일자리 법안'(American Jobs Act, AJA)을 제안하며 의회의 조속한 통과를 요청했다. 올해 미국 연방정부 예산의 12%, 우리나라 총예산의 1.5배에 이르는 대대적인 경기부양과 고용창출을 위한 제안이라 할 수 있다. 가파르게 상승한 후 좀처럼 내려오지 않는 실업률과 추락하는 지지율로 재선 가도에 위험신호가 들어온 상태에서 대규모 경기진작책으로 국면 돌파를 시도하는 오바마 대통령은 ‘법안을 통과시키라’는 말만 열차례 넘게 반복하며 격정적인 연설을 40여분 동안 이어갔다.

 

그러나 주식시장이나 대중, 경제전문가들의 반응은 냉랭하다. 경제를 움직이는 힘 중 중요한 것으로 경제주체의 심리를 들 수 있는데 이는 예상과 기대의 자기충족효과(self-fulfilling effect) 때문이다. 경제에 대한 위축된 심리가 낙관적인 기대로 바뀌지 않으면 경제정책의 실효성은 기대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번 제안이 오바마 대통령의 재선 가능성을 높이는 데 얼마나 기여할지는 다소 회의적이다.

 

신뢰를 잃어버린 대규모 재정지출안

 

이러한 냉랭한 반응에는 두가지 경험에 대한 기억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오바마 정부는 경제위기가 최고조에 달한 2009년초, 취임과 동시에 이번 제안의 거의 2배에 달하는 재정지출 법안(일명 Stimulus Package)과 3조 6천억달러에 이르는 역사상 최대 예산을 편성해서 시행해온 터였기에 경제주체들에게 이번 제안이 주는 신선함이나 기대효과는 그리 크지 않다. 다음으로, 미국 대중의 머릿속에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은 정부가 채무 불이행 직전까지 몰렸던 기억이다. 불과 한달 전인 8월 2일, 국가 디폴트(채무상환 불이행)를 이틀 앞두고 정부의 채무한도를 인상하는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여 간신히 역사상 초유의 사태를 모면한 바 있다. 당시 오바마 대통령은 많은 민주당 의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1조 5천억달러, 우리 돈으로 약 1650조원 규모의 재정적자 감축안을 마련하기로 공화당과 합의했다.

 

정부의 재정적자와 국가채무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채무상환 불이행이라는 유례없는 상황과 재정지출 감축 합의가 대중의 뇌리에 깊게 각인된 지 한달도 채 지나지 않아 정부가 대규모 재정지출을 하겠다고 나서는 상황이 미 국민에게 과연 어떻게 비칠 것이며 얼마나 신뢰감을 줄 수 있을까? 머지않아 정치권이 합의한 재정지출 감축안이 만들어질 것이며 이에 따라 메디케어(Medicare, 65세 이상의 노인을 대상으로 한 공공의료보험), 메디케이드(Medicaid,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공공의료보험), 쏘셜 씨큐리티(social security, 은퇴 후 생활보장 프로그램) 등의 사회보장제도가 약화되고 기업이 노동자에게 제공하는 혜택에 대한 조세경감 조치들도 폐지될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이는 미국 GDP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소비지출을 더욱 위축시키고 그에 따라 고용창출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크다.

 

증세 없이 정부지출 삭감을 끝까지 밀어붙여 오바마 대통령을 굴복시킨 공화당이 이제 와서 대규모 재정지출에 동의하고 협력할 공산도 그다지 크지 않다. 내년으로 다가온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미 미국은 대선정국으로 들어서서 공화당 대선후보 선출을 위한 토론회가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화당 의원들이 오바마의 업적이 될 경제지표 개선에 우호적으로 협력할 가능성은 더 낮다.

 

오바마의 타협은 꼭 필요했는가

 

채무한도를 올리는 조건으로 재정지출 삭감을 합의한 데 대해 민주당 내에서도 반대의견이 만만찮게 제기되었고 지지기반의 동요를 불러일으키는 등 정치적 파장이 작지 않았다. 우선 미국에서 국가 채무한도 인상은 대통령이나 의회 다수당에 상관없이 지난 1963년 이래 평균 8개월마다 계속되어왔으며 이를 다른 정책에 연계시킨 전례가 없었다. 일부에서는 국가채무 상환이 의회 동의조차 필요 없는, 헌법상 대통령의 권한이자 의무라고도 했다. 또 오바마의 타협에 분노한 어느 논자는 냉전상황에서 사회주의국가인 중국과의 수교가 보수적인 공화당 출신 대통령 닉슨에 의해서 가능했던 것처럼, 뉴딜체제의 원리에 반하는 불황 속의 재정지출 삭감과 재정적자 감축안의 의회 통과는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 민주당 의원들을 설득해서 표를 분산시키는 상황에서만 가능한 일이라고 비꼬았다.

 

또한 부유층에 대한 증세를 전혀 실현하지 못한 채 사회보장적 지출이 예상되는 데 항의해서 버몬트주 출신 무소속 상원의원 버니 쌘더스(Bernie Sanders)는 무려 8시간 반 동안 발언을 지속해 의사진행방해를 한 바 있다. 그의 연설은 미국 금융과두기업의 탐욕과 중산층 몰락에 대한, 그리고 그것에 눈감고 있는 미국정치에 대한 생생한 증언으로서 오바마에 실망한 진보진영의 찬사를 받았고 간단한 서문을 덧붙여 ‘연설'(The Speech)란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현재 미국사회의 경제이념적 지형에서는 재정위기 담론이 고용위기 담론보다 우세하고 ‘작은 정부’ 담론이 ‘큰 정부’ 담론을 압도한다. 그럼에도 21세기 미국사회의 ‘새로운 뉴딜'(New New Deal)을 내세우며 교육, 에너지, 의료 개혁 등에 대한 투자를 추진한 오바마 정부는 장기적인 경쟁력 강화 정책과 고용창출을 단선적으로 연결시킴으로써 재정위기와 고용위기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자초했다.

 

딜레마에 빠진 미국

 

거대예산과 그것이 초래한 재정적자에 대한 거부감이 의료개혁, 교육개혁, 사회간접자본 투자 등 ‘새로운 뉴딜’에 대한 호감을 압도한 데는 미국사회의 대중적 보수주의가 영향을 미쳤으며 그 흐름의 한가운데 ‘티 파티 운동(Tea Party Movement, 정부의 재정지출과 증세를 반대하는 보수주의 정치운동)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일부에서 말하듯 소수 극우대중에 한정되지 않으며, 무능하면서 거대한 정부나 월스트리트에 실망하고 분노한 미국의 평범한 중하층이 다수다. 그런 점에서 재정위기와 고용위기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으려 허둥대는 오바마 정부와, 노동조합을 향해 분노하고 부자 감세조차 거부하며 국가에 대한 불신을 키우는 대중 사이의 간극 만큼 오늘날 미국사회의 문제와 해법 사이의 간극도 벌어져 있는 현 상황이 미국사회의 진정한 위기를 보여주는 듯하다.

 

2011.9.14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