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협의 정치, 19대 국회에 바란다

이철희

이철희 /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사용자 삽입 이미지딱 두사람만 있어도 의사결정에 타협은 불가피하다. 한사람의 의도나 이해만 전일적으로 관철되면 공존할 수 없다. 그러나 누가 좀더 이익을 보거나, 약간 더 손해를 보는 정도의 차이는 어쩔 수 없다. 배분을 정하는 의사결정에 아예 참여하지 못하게 막지만 않는다면 어느정도의 차이는 용인된다. 정치는 많은 사람에게 제한된 자원을 배분하는 시스템이다. 따라서 정치에선 타협이 불가피하다. 혼자 다 먹겠다고 하거나, 제 맘대로 하겠다는 것은 독재일 뿐 정치가 아니다.

 

흔히 대통령제는 대통령의 권한이 막강한 탓에 대통령의 일방독주가 가능한 것으로 이해된다.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말이 이를 말해준다. 그런데, 대통령제의 원형인 미국을 보면 대통령제의 핵심 원리가 ‘견제와 균형’이다. 입법부와 행정부, 그리고 사법부 간에 상호견제가 이뤄지도록 하고, 그럼으로써 균형이 달성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논리적으로 내각제에 비해 대통령제가 갖는 거의 유일한 장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견제와 균형의 전제는 ‘타협’

 

아무리 막강한 대통령이라고 해도 의회가 동의해주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여소야대 상황에서 특히 자주 발생하는 입법교착(gridlock)이다. 대통령제는 입법부와 행정부 간 제도적 경쟁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에 타협이 불가피하다. 미국 대통령이 수시로 야당의원들을 백악관으로 초청해서 설득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결국 대통령제의 견제와 균형은 타협에 다름 아닌 것이다.

 

미국 정치에서 타협을 강제하는 장치는 많다. 그중에서 두가지에 주목해볼 수 있다. 하나는 상원의석 배분이다. 인구 53만여명에 불과한 와이오밍주나 3670만 명에 달하는 캘리포니아주나 모두 상원의원 수는 2명으로 동일하다. 다수가 힘으로 소수를 억누르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의사진행방해(Filibuster)다. 이것은 미국 헌법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것인데도, 계속 유지되고 있다. 이를 저지하려면 재적의원의 3/5, 즉 최소 60명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 정당이 60석 이상을 차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한때의 바람으로 가능할 수도 있지만 미국의 선거법은 상원은 2년마다 1/3씩 선거를 치르도록 하고 있다. 일시적 바람에 의한 과잉 다수의 출현 가능성을 제어하기 위한 고려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미국 의회에 일견 말도 안되는 제도나 관행이 유지되는 것은 그만큼 타협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협이 일종의 제도적 정언명령으로 기능하고 있다.

 

미국과 달리 대한민국의 의회에선 타협을 찾기란 쉽지 않다. 다수 여당은 수시로 직권상정을 통한 강행처리를 시도한다. 야당은 날치기라며 강하게 반발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이른바 ‘국회 몸싸움 방지법’이다. 국회의장의 직권상정권을 사실상 없애고, 필리버스터 제도를 도입하는 한편 쟁점 법안에 대해서는 본회의에서 재적 3/5의 찬성이 필요하도록 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이 법에 대해 일부 언론에서 먼저 문제를 제기하고, 새누리당의 극히 일부가 이를 받아 공론화하면서 여야 간에 협상이 다시 진행되었지만 새누리당에서는 당내 반대여론으로 18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의 통과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스스로의 운영에 대한 룰을 정하는 데서조차 눈치를 보면서 전전긍긍하니 참 우습고 한심하다.

 

합의를 바탕으로 한 국회 운영을 기대한다

 

누가 집권하든 수적 우위를 앞세운 강행처리는 옳지 않다. “민주주의란 스스로 옳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체제다.” 이 유명한 명제에 비춰보더라도 자신이 옳다는 관점 때문에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정치문법이 아니다. 정치 거부에 가깝다. 꼭 필요한 건강보험개혁법이 소수의 반대 때문에 번번이 좌절된 미국의 예를 들어 다수결이 좋다고 주장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던 민권법(civil right act), 투표권법(voting right act) 등도 통과시킬 수 있는 것이 정치의 역동성이다. 그런 점에서 보수든 진보든 문제는 어떻게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느냐 하는 것이지 다수결 조항이 아니다.

 

새누리당이 총선 후에 입장을 바꿔 이 법에 대해 시비를 거는 것은 총선 결과에 대한 부정이다. 비록 의석수에서 152석을 얻어 승리했지만, 득표율로 보면 48:48의 호각지세다. 게다가 17대 대선과 18대 총선의 결과로 조성된 보수 우위의 구도가 이번 총선에서는 대등한 구도로 변화됐다. 누구의 손을 분명하게 들어주지 않았다는 점에서 총선 민심은 타협과 균형을 주문하고 있다. 이를 무시하고 단순다수제에 의한 제도효과로 과반을 얻은 결과를 과도하게 해석해 원래의 합의를 뒤집는 것부터가 올바른 민주적 태도가 아니다. 총선 직후 박근혜 위원장이 이 합의를 부정하는 태도를 취한 것은 약속 준수를 외쳐온 그간의 행태에 비춰볼 때 어김없는 자기부정이다.

 

정치를 쪽수 싸움으로 이해하는 것은 군사독재의 잔재다. 소수를 설득하고 민심을 움직여 원하는 바를 성취하도록 해야 정치가 산다. 또 그래야 입법부가 행정부 감시와 견제라는 본래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 앞으로 여야가 어떻게 합의할 지는 그들의 몫이다. 다만, 입법부가 스스로 거수기로 전락하는 비민주적 관행을 잔존시키려 하는 모습만큼은 지양했으면 좋겠다. 의회가 의회다울 때 비로소 여당도 산다는 사실을 기억하길 바란다.

 

2012.5.2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