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연재

1회

   ―언젠가 내가 아버지에게 당신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내가 무엇을 했다고? 했다. 아버지가 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내가 응수하자 아버지는 한숨을 쉬듯 내뱉었다.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살아냈을 뿐이다,고.

 

 

 

 

 

 

 

 

 

 

   1장. 너, 본 지 오래다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기 위해 여동생을 따라나서자 J시의 오래된 집에는 아버지 홀로 남게 되었다.

 

   엄마와 함께 집을 떠나올 때 아버지가 대문 앞에서 울었다는 말을 여동생에게서 듣지 않았다면 엄마가 없는 동안 내가 J시에 가 있어야겠다는 생각까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년이 넘도록 나는 J시에 가지 않고 있었다. 형제들이 주말이면 번갈아서 J시의 부모 집을 방문해 아버지 이발을 시켜드리거나 장을 봐서 일주일 분의 음식을 만들어 냉장고에 채워놓고 돌아오는 일을 몇년째 하고 있는데 나는 그 일에서도 빠졌다. 막내가 메신저 가족 대화방을 열고 이번 주엔 누가 J시에 내려가고 다음 주엔 누가 내려가는지 스케줄을 짜는 것을 나는 묵묵히 보고만 있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딛고 있거나 의지하고 있던 관계들이 균열이 나고 조각조각 부서져 가슴이 아프기 시작하자 나는 맨 먼저 늙은 부모에게 연락을 삼갔다. 부모는 내 가라앉아 있는 목소리나 어두운 표정을 대번에 알아본다. 걱정을 끼치기 싫었다. 멀리 가서 오래 지내다 와야 할 일이 생겼다고 둘러댔다. 당분간 J시에 내려갈 수 없다고. 가는 곳이 외국이라 시차가 달라 전화 연결도 잘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있는 중인데 아버지가 울었다는 전언이 얼음장 같던 마음을 흔들었다. 태생지를 떠나온 이후로 아버지는 매번 이런 식으로 나를 곁에 불러들였다,라고 쓰려니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아버지 쪽에서 나에게 뭐라 한 적은 없으니까. 매번 엄마로부터 혹은 형제들로부터 뭔지 탈이 나 있는 듯한 아버지 소식을 들으면 나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거나 기차를 타는 식으로 아버지에게 가곤 했다. 그러지 않으면 아버지가 눈앞에 어른거려 다른 일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울었다는 말에 문득 사방이 적막해져서 왜 우셔? 내가 묻자 여동생은 몰라, 했다. 왜 우느냐고 묻는 나와 몰라,라고 대답하는 여동생이 동시에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 숨에 얹어지는 무거운 마음을 피하지 못해 잠깐 서로 침묵했다. 내 침묵 속엔 엄마 모시고 올 때 아버지도 함께 오자고 하지 그랬냐? 하는 마음이 섞여 있었는데 여동생이 곧 아버지 혼자 집에 두고 오려니 그때야 함께 가자고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물가에 아이 두고 온 것같이 마음이 별로네, 언니.

   여동생의 말끝이 흐려졌다.

   ―대문을 나서면서야 아버지에게 함께 가시겠어요? 했더니 아니라고 하시더라고. 말은 그리 하면서 우시더라니까.

   아픈 엄마를 여동생 편에 서울로 보내면서 아버지는 어떤 마음이라 울었을까. 보다 못한 엄마가 아니, 왜 우요? 내가 죽으러 가간디? 나아가지고 금방 올 것잉게 이 치료나 잘하고 계시오, 해서 아버지를 달래는 줄 알았더니 엄마도 울고 있었다고. 그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져 나도 모르게 깊은 숨이 쉬어졌다.

   ―누가 보면 내가 두분 생이별 시키는 줄 알았겠어.

   여동생이 툭 내뱉었다. 엄마는 내일 병원에 입원을 할 것이다. J시에 가지 않아도 부모에게 전화 거는 일을 하지 않게 되었어도 J시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가족 대화방을 통해 알고 있었다. 형제들이 부모에게 생긴 일들을 상의하는 일이 언제부터인지 그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여동생은 엄마를 큰오빠 집에 내려주고 제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나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그런데 언니, 다 그런대.

   ―……?

   ―좀 전에 큰오빠 집에서 올케가 그러는데 다 그런다고 하더라고.

   ―무엇이?

   ―내가 아버지가 울었다고 하니까 올케가 아버지들은 다 그런다면서 너무 마음 쓰지 말라고 하더라. 올케네 엄마도 아파서 병원 가려고 서울에 올 적에 올케네 아버지가 우셨대.

   올케네 부친은 이태 전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들은 다 그런가봐. 그니까 우리도 그거엔 신경 쓰지 말자. 내가 언니한테 괜히 전화했나봐.

   마음에 걸리는 것은 어쩌든 해결을 봐야 하는 성격인 여동생은 아버지들은 다 그런 거라는 쪽으로 정리를 하고 싶은 모양인데 그게 잘 안 되어 계속 마음이 쓰이는지 신경 쓰지 말자,면서도 울적한 목소리였다.

   ―아버지가 이 치료를 하셔?

   내 질문에 여동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동생이 대답을 하지 않은 건 그동안 너무 무심하지 않았느냐,는 나를 향한 무언의 책망일 것이다. 막내가 아버지가 치과에 다니기 시작했다,는 내용을 대화방에 올린 적이 있다. 시내의 치과에 홀로 찾아간 아버지에게 의사가 배우자나 자식 같은 직계가족과 함께 오라고 했나보았다. 아버지는 동네에 사는 고모의 아들을 대동하고 치과에 갔다고 했다. 고모의 아들이라고 적으니 그가 젊은이인 줄로 짐작할 수 있겠는데 환갑이 지난 지 몇년은 된 나이 든 사촌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치과행을 우리에게 심지어는 엄마에게도 비밀로 하고 싶은 듯했으나 사촌이 막내에게 전화함으로써 모두에게 알려졌다. 아버지의 치과 치료를 두고 다른 형제들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견디실 수 있을까, 싶은 게 영 내키지 않아서 구체적인 이야기가 오가는데도 가만있었다. 그게 겨우 한달 전의 일인데 잊고 있었으니 무심하다는 말을 들은들 뭐라겠는지. 불편해진 내 마음을 읽었는지 여동생이 얼른 언니가 그런 것에 신경 쓸 경황이 없었잖아,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런 것에,라는 여동생이 남긴 말의 여운이 책상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게 했다. 그렇게 무력감 속에 두어시간을 앉아만 있다가 나는 J시로 가는 기차표를 예약하고 노트북의 전원을 뽑아 가방에 담고 가족 대화방에 나의 J시행을 알렸다. 엄마가 병원에 있는 동안 내가 아버지에게 가 있겠다,고 했다.

 

   아버지가 울었다,는 말을 처음 들은 건 아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내가 J시를 떠났을 때도 아버지는 사흘을 울었다. 나를 서울에 데려다주고 엄마가 집으로 내려와 보니 아버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는데 그 부은 눈이 사흘을 가라앉지 않았다고 했다. 막걸리를 됫박으로 푸다가 울고, 떨어진 담배를 떼러 읍내의 도매상에 가기 위해 짐자전거에 올라타면서도 울었다고. 아버지가 나를 보내고 울었다는 얘기는 나를 망연하게 했다.

   아버지가?

   상상해본 적이 없는 아버지의 눈물. 엄마도 아버지가 우는 걸 그때 처음 봤다,고 했다. 아버지는 나를 두고 어린것을 다 크지도 않은 어린것을……이라고 했다고. 나는 농담으로 내 키는 중학생 때 다 컸어요. 163센티가 작은 키는 아니야, 하고 웃어넘겼다. 아버지가 마을 끝 기찻길 옆에서 식료품 가게를 하고 있었던 때다. 아버지의 그 가게 운영은 그때가 두번째였다. 기찻길 옆 그 가게는 누구 소유였는지?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이학년인가 삼학년 때 일이년쯤 그 가게를 맡아 하다가 그만두었는데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다시 맡았다. 그 가게를 식료품 가게,라고 하자니 지금의 마켓이나 편의점을 떠올리겠으나 그런 규모는 아니었고 ‘점방’이라고 칭했던 시골 마을의 비좁고 허름한 가게였다. 진열대엔 몇개인지 세는 데 오분도 안 걸릴 정도의 과자나 풍선껌, 빵, 캐러멜 같은 게 겨우 구색을 갖출 정도로 놓여 있었고 주로는 담배를 팔았다. 가게 안쪽으로는 큰 독이 묻혀 있었는데 거기엔 양조장에서 배달되는 막걸리가 부어져 있고 그 곁엔 항상 술 냄새에 전 나무 됫박이 엎어져 있었다. 그 됫박으로 독의 막걸리를 퍼서 주전자에 담아 내놓던 아버지. 손님들은 주로 마을 사람이거나 읍내에 나갔다가 우리 집이 있던 마을보다 더 안쪽, 진산리나 삼산리 천안 쪽으로 들어가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해 저물녘이면 논밭에서 일을 마친 사람들이 아버지 가게에 머무르며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그때면 누가 손님이고 주인인지 모를 정도로 뒤섞여 있었다. 가끔은 어두워진 후까지 소주 내기 윷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맥락 없이 지금도 떠오르는 그 가게의 풍경 중의 하나는 가게 문 입구에 길게 묶음으로 늘어뜨려 있던 검은 고무줄 다발이다. 고무줄은 수양버들처럼 가게 문 앞에 발처럼 늘어져 있었다. 나는 엄마의 심부름이나 돈을 타러 아버지에게 갈 때면 입구에 늘어진 고무줄을 손에 배배 꼬아 잡고는 가게 안에 대고 아버지, 불렀다. 아버지에게 돈을 달라고 하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질 않아 애매한 그 고무줄만 잡아당기고 있을 때도 있었다. 가끔씩 사람들이 그 고무줄을 사가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은 햇볕이 좋은 날 된장이나 장항아리 뚜껑을 열어놓았는데 뚜껑을 열면 항아리 입구에 덮어놓은 삼베포가 보였다. 삼베포가 바람에 날아가지 못하게 끝을 오므리는 데 그 고무줄이 쓰였다. 그 가게는 그런 곳이었다. 당장 필요로 하는데 그것만 사러 읍내까지 나가게 되지는 않는 것들이 선반이나 유리장 안에 오밀조밀 진열되어 있었다. J시를 떠나올 때 아버지에게 작별인사를 하려고 그 가게에 갔었다. 가게에 도착하면 늘 그랬던 것처럼 그 늘어뜨려진 고무줄을 모아 잡고 아버지, 불렀는데 아버지가 안에서 나오기 전에 기차역으로 가는 버스가 가게 앞 신작로에 도착했다. 밤이었다. 그 버스를 놓치면 기차역까지 걸어가야 했다. 걸어서 기차역에 도착해본들 기차가 출발한 다음일 것이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어두운 가게에 대고 아버지 아버지……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