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연재

10회

카드로 카드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것이 가능할 때에는 누구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모든 카드가 다 막히고, 사방이 꽉 막히고 나서야 김은미는 그때를 그리워했다. 신용거래를 하는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모두 신용등급이라는 것이 부여되어 있고, 그녀의 신용등급으로는 대한민국의 제1금융권 어디서도 대출을 받을 수 없었다. 김은미는 돈이 급히 필요했다. 중국 심천에 좋은 물건이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삼백만원이면 되었다. 한창 사업이 잘 될 때에는 크다고 생각해보지 않은 금액이었다. 일 매출이 그를 넘은 날도 많았다.

김은미가 동대문에 들어온 건 1998년 여름이었다. IMF 때였지만, 동대문시장의 경기는 유례없는 호황이었다. 패션에서도 유통의 거품이 빠지고,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직거래 요구가 거세졌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그리고 그해 8월, 동대문 한복판에 밀리오레가 문을 열었고, 이듬해 2월에는 두산타워가 개장했다. 동대문이 본격적인 패션쇼핑몰 시대에 돌입한 것이다.

김은미는 대학 1학년을 마치고 휴학한 뒤, 등록금을 벌겠다는 생각으로 밀리오레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여성의류를 전문으로 하는 매장이었다. 사장은 여러층에 몇개의 매장을 가지고 있었고, 자체적으로 패턴사와 미싱사를 두고 공장을 돌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곳에 그렇게 오래 있게 될 줄 전혀 몰랐다. 다른 매장의 알바생들도 대개 비슷했다. 처음부터 여기서 목숨을 바치겠다는 굳은 의지로 발을 디딘 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스무살의 김은미에게 그곳은 기회의 땅으로 보였다. 여기에 기회를 놔두고 학교로 돌아갈 이유가 없다는 것이 그녀의 판단이었다.

그 판단은 옳아 보였다. 적어도 십년 동안은 그랬다. 그사이 그녀는 동대문을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낮과 밤을 뒤바꾸어 사는 삶을 의미했다. 20대 중반에 자신의 매장을 가지게 되었다. 가방과 지갑을 중심으로 하는 잡화류도 함께 다루었다. 2000년대 초반 인터넷쇼핑몰 창업이 붐을 이루기 시작하면서 온라인몰과 오프라인을 함께 운영하기로 한 것도, 발 빠르고 적절한 선택인 것 같았다. 많은 시장 사람들이 그녀를 가리켜 기회를 놓치지 않는 인간이라고 했다. 선망과 질투가 범벅된 말이라고 코웃음을 치면서도 김은미는 그 말이 싫지 않았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기회라는 단어가 혹시 아무렇지 않은 척 아가리를 쫙 벌리고 기다리는 괴물은 아닐까. 출소하고 난 뒤에야 김은미는 비로소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괴물이 저 아래에서, 벌겋고 무시무시한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침을 삼키고 있더라도 그건 모두 나중 일이었다. 시작할 것은 시작되어야 했다. 살아날 기회가 아니라, 죽지 않을 기회를 잡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일단 죽지 않기 위해서 삼백만원이 필요했다.

“아는 오빠 소개해줄까?”

구치소에서 만난 언니가 물었다. 전화 한통으로 바로 빌릴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을 김은미도 모르지 않았다. 일수사채의 덫이 얼마나 무서운지도 알고 있었다. 시장생활 동안 그 덫에 걸려 몰락하는 사람들을 숱하게 보아왔다.

“깡패 아니고, 착한 사람이야. 초저리로 하라고 내가 말 잘 해줄게.”

살다보면,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게 마련이었다. 매일 5만원씩 석달을 갚으면 된다는 조건이 무리로 느껴지지 않았다. 알바 한명을 안 쓰면 충분히 가능한 금액이었다.

두달이 못 되어 일수가 밀리는 날이 생겼다. 다른 업체에서 빌려 갚는 것 말고 다른 방법 은 없었다. 일수사채로 일수사채를 막는 수밖에는. 그 남자를 알게 된 것은 네번째 업체에서였다.

사채업자는 그녀에게 새 차를 사라고 했다. ‘차깡’이었다. 그 바닥에서는 흔한 일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