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연재

10회

막상 화장실에 들어가자 요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손만 닦고 나와 자판기에서 커피 한잔을 뽑아 마셨다. 설탕이 들어가지 않은 커피를 선택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커피가 달았다. 할아버지가 이른 나이부터 당뇨를 앓아 고생하다 돌아가셨고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들도 사십대가 되자 하나둘 당뇨에 걸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거의 인연이 끊어진 친척들인데도 언젠가 같은 병을 공유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그는 못 견디게 끔찍했다. 그의 어머니는 남편의 장례식을 치른 뒤 두번 다시 시댁 식구들을 보지 않았다. 친척들의 경조사에는 어린 그를 보냈다. 그는 죽은 아버지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이 나란히 적힌 봉투를 들고 결혼식과 돌잔치를 다녔다. 아무도 그에게 어머니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 형민이가 올해 몇학년이지? 그런 질문만 수십번 받고 나면 식욕도 사라졌다. 그는 국수를 몇가닥 먹고는 화장실 가는 척하고는 몰래 빠져나오곤 했다. 그래도 봉투를 전달하러 가는 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할머니의 환갑잔치를 마지막으로 발길을 끊었다. 그의 아버지는 사남이녀 중 셋째였다. 여섯명의 자식들이 낳은 열세명의 손자손녀들이 할머니의 환갑잔치에서 노래를 불렀다. 나훈아의 ‘사랑’이란 노래였는데, 그는 자리에 앉아서 사촌들이 부르는 그 노래를 따라 불렀다. 사촌들이 하루 전날 만나 노래 준비를 했다는 사실을 그는 몰랐다. 고등학생인 사촌누나가 두살짜리 사촌동생을 안고 노래를 불렀다. 유치원에 다니는 꼬맹이들 셋은 맨 앞줄에 서서 춤을 추었다. 할머니가 박수를 치며 웃었다. 그날 그는 갈비를 두접시나 가져다 먹었다. 즉석 짜장면 코너가 있어서 짜장면도 한그릇 먹었다. 그리고 헤어질 때 할머니를 안아드렸다. 할머니가 그를 안으면서 불쌍한 내 새끼, 하고 말하며 울었다. 그는 그 말이 지겨웠지만, 그 말을 듣기 싫어서 일부러 할머니를 보며 눈을 마주치는 걸 피해왔지만, 그날은 그러지 않았다. 할머니의 말처럼 자신이 불쌍한 아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날 이후로 그는 친척들의 경조사에 가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했고, 봉투에 들어 있는 돈으로 비싼 운동화를 사서 신었다.

커피를 마시자, 다시 요의가 느껴졌다. 화장실로 들어가 오줌을 누려 했지만 한두방울 떨어지고는 그만이었다. 이게 뭐라고 긴장을 하네. 그는 피식 하고 웃었다. 그때 화장실 안쪽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뒤돌아보았다. 세칸은 열려 있고 마지막 한칸이 닫혀 있었다. 그는 뒤꿈치를 들고 걸었다. 세번째 칸으로 들어가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그리고 옷을 입은 채로 변기에 앉았다.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가깝게 들렸다. 그는 왠지 옆에서 울고 있는 사람이 사회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근거가 없었지만 울음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럴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옆 사람의 울음소리에 맞춰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엉덩이에 힘을 주어서인지 오른쪽 다리가 저려왔다.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코끝에 침을 묻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살면서 다리가 저릴 때 코끝에 침을 묻히는 사람을 본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도 왜 그런 장면이 드라마에 거듭 나오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울음소리가 그치더니 세차게 코를 푸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옆 사람이 밖으로 나간 뒤에도 한참을 변기에 앉아 있었다.

스튜디오로 돌아가보니 사회자는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사회자의 눈이 조금 빨개진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았다. 그는 조금 전 사회자를 한심하게 생각했던 자신을 반성했다. 갑자기 사회자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진구라면 머리를 쓰다듬으며 괜찮다고 말하는 일을 어려워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딸이 태어났을 때 그는 이런 결심을 했다. 이 아이가 커서 실수를 저질러도 화내지 말아야지. 머리를 쓰다듬으며 괜찮다고 말해줘야지. 방긋 웃는 어린 딸을 보면서 그는 누구보다 좋은 사람이 될 자신이 있었다. 진구가 동생에게 했듯이. 하지만 그건 결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었다.

작가가 커피 두잔을 가지고 왔다. 밖에 나가서 사왔는지 옷에서 찬 기운이 느껴졌다. 그에게 섭외 전화를 했던 작가였다. 누가 날 기억한다고요. 그는 거절을 했다. 제 어머니가 기억하고 있어요. 작가가 대답을 했다. 그 말이 그의 마음을 조금 움직였다. 그래도 선뜻 내키지가 않았다. 작가는 끈질기게 메시지를 보냈다. 마지막에는 그가 섭외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기도 프로그램에서 잘릴지도 모른다는 식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그 애원조의 말투 때문에 작가의 메시지가 몹시 불쾌했다. 그런데도 그는 하겠다고 했다. 내가 뭐라고.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뭐라고 이 아가씨를 곤란에 빠트리는가. 그는 자신에게 전화했던 작가가 신입만 아니었어도, 이제 막 이 일에 뛰어들어 PD와 메인 작가의 눈치만 보지 않았더라도, 거절했을 것이다. “십분 뒤에 시작할게요.” 작가가 말했다. 사회자의 화장을 손봐주던 사람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가 괜찮다고 말했지만 동그런 스펀지로 그의 얼굴을 두드렸다. 가루가 입으로 들어가 기침이 날 것 같았다. “딸이 몇 학년이에요?” 사회자가 커피를 마시며 그에게 물었다. “내년에 고등학교에 들어가요.” 그가 대답했다. “전 딸이 둘이에요. 큰놈은 고등학생이고 작은놈은 아직 초등학생이죠.” 사회자가 말했다. 그는 용기를 내어 사회자에게 이혼소송은 잘 해결되었는지 물었다. 사회자가 한달에 한번씩 딸들을 만난다고 대답했다. 더 자주 보고 싶은데 아내와 협의가 잘 안 되었다고 했다. “저와 딸은 만나면 주로 햄버거를 먹어요. 아내가 패스트푸드 음식을 못 먹게 하거든요. 그러니 몰래.” 그는 지갑에 넣어둔 딸의 사진을 떠올렸다. 열살 무렵 자기 얼굴만큼 커다란 햄버거를 먹고 있는 사진이었다. “제 딸들은 입맛이 달라도 너무 달라요. 한 녀석은 고기를 좋아하고 한 녀석은 떡볶이 같은 분식을 좋아하고. 그래서 점심은 큰 녀석이 먹고 싶은 걸로, 저녁은 둘째가 먹고 싶은 걸로, 그렇게 규칙을 정했어요.” 그렇게 말하고 사회자가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그리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말문을 열었다. “제 소원은 딸들이 처음 운전할 때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가족에게 운전을 배우면 싸운다고들 하던데, 그렇게 딸과 티격태격 해보고 싶었어요.” 그는 사회자에게 이혼했다고 딸에게 운전을 못 가르치는 것은 아니니 그 소원은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런 소원이 있어서 부럽다고 말했다. 그는 반 정도 마시다 만 커피를 의자 아래 내려놓았다. 그러자 작가가 무대로 뛰어올라와 커피잔을 들고 내려갔다. “진구의 소원은 무엇이었을까요?” 사회자가 물었다. “제 소원도 모르는데, 진구의 소원이 기억날 리 없죠.” 그가 대답했다. PD가 녹화를 시작하겠다고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