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회
어느날부터 나는 내가 살기 위해서, 퇴근하면 이희승의 『국어대사전』을 옆구리에 끼고 역촌동의 독서실로 향했다. 독서실 한칸을 차지하고 나는 날마다 무언가를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어느날 어디다 뒀던가,라고 썼고 그 문장은 지워지지 않고 네칸짜리 여닫이 서랍을 온통 다 뒤져도 장갑은 보이지 않는다,라고 이어졌다. 당시의 내 숙소였던 오빠네 집으로 퇴근을 해서 저녁을 먹은 뒤 이희승의 『국어대사전』을 들고 독서실로 향하면서부터 나는, 출근길의 나무계단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만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가버리고 싶은 충동적인 마음과 갈등하지 않아도 되었다. 퇴근하고 독서실에 가기 위해서는 출근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바꾸자 출근도 담담히 할 수 있었다.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들쭉날쭉인 번역원고들의 앞뒤를 가능한 한 맥락에 맞는 자리에 맞춰놓는 일을 긴장을 풀고 어깨를 가지런히 하고 감정의 기복 없이 이어 했다. 그 일의 끝은 있을 수가 없었다. 마쳤다고 생각하고 펼쳐 보면 늘 수정해야 할 게 돌출했다. 이곳을 바로잡으면 저곳이 틀렸다. 틀렸다고 생각되는 저곳을 고치면 다시 저곳이 맞지 않았다. 그랬어도 나는 3층 그 사무실의 책상에 앉아 할 수 있을 때까지 여기를 고치고 저기를 다시 고치는 일을 계속했다. 퇴근하는 내 발걸음에 생기가 붙고 부지런해졌다. 저녁을 먹은 후에 독서실로 돌아가 어제까지 쓰던 글을 조금씩 이어 썼다. 원고지를 사용하던 때였다. 어느날은 한장을 쓸 때도 있었고 잘될 때는 일곱장을 쓰게 되는 날도 있었다. 한줄도 이어 쓰지 못하는 날조차도 낮의 시간과는 대조적으로 밤의 시간은 훌쩍 지나가 이내 새벽에 접어들곤 했다. 독서실 아래층에는 떡을 만드는 가게가 있었다. 많은 양을 주문받아 도매로 넘기기도 하고 얼마간은 가게 앞에 내놓고 파는 집이었는데 새벽 세시쯤부터 떡을 만드는 기계가 돌아갔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 가래떡이나 인절미를 빼는 기계 소리가 윙윙 들렸다. 바람을 쐬려고 복도로 나와 기다란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면 텅 빈 거리 바닥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은행나무 그림자가 이리저리 쓸려다녔다. 바람이 많은 날엔 인기척이 끊긴 거리에 나뭇잎들이 도로 한가운데까지 밀려다녔다. 새벽 거리는 적막했다. 새벽 세시의 거리를 내다보다가 떡을 만드는 기계의 쉬이익, 소리를 듣고 있으면 저절로 양손이 양 팔꿈치를 잡아 팔짱을 끼게 되었다. 새벽 세시의 텅 빈 거리와 바닥에 쓸려다니는 나뭇잎과 가로수 그림자를 내려다보는 절박한 마음에 나의 미래가 스쳐 지나갔다. 그때 어렴풋이 짐작했다. 나의 삶 속에서 쓰는 일의 끝은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불완전한 채로 어디서든 무엇인가를 쓰고 지우고 있으리란 것을. 마침표를 찍은 자리는 다시 새로운 문장이 시작되는 자리가 되리란 것을. 그리고…… 나는 내가 쓴 글을 끝도 없이 수정하고 있으리라는 것도 그때 짐작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로서는 살아야겠다는 의지이며 동시에 고통이 되리란 것도. 내가 얼마나 더 글을 쓰면서 살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이 미완성 속에 내가 있다. 나는 어떤 것도 완성시키지 못하고 쓰고 지우고 다시 쓰고 수정하며 내 일생을 마칠 것이다. 그게 내 글쓰기의 전부일 것이다. 거칠고 커다란 손에 덜미가 잡힌 무거운 느낌과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검은 돌무덤을 밀어내고 전진하는 느낌이 동시에 들어 발에 힘을 주었다.
헛간의 농기구 앞에서 아버지를 발견한 것을 시작으로 나는 밤마다 어딘가에서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는 아버지를 찾아다녔다. 우물 옆일 때도 있었고, 감나무 밑일 때도 있었고 장독대의 장독 사이에서 아버지를 발견할 때도 있었다. 아버지는 다음 날이면 자신이 울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도시 병원의 엄마에게 전화를 걸고 나에게는 산낙지를 사러 가자고도 했다. 산낙지? 씹지도 못할 건데? 하지만 무슨 뜻이 있겠지, 싶어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내가 산낙지를 좋아한다고요?
나는 J시의 시장통 생선가게 앞에서 아버지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아버지가 갑자기 산낙지를 사러 가자고 한 건 나를 위해서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산낙지 먹는 일을 좋아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어떻게 아버지 기억 속에는 내가 산낙지를 좋아한다고 각인되어 있는 것인가. 내 기억 속에 산낙지를 좋아한 건 아버지였는데. 어느해 초여름 여동생의 아이가 태어나 산후를 위해 엄마가 서울에 와 있었을 때에, 그때도 집에 혼자 남아 있는 아버지를 보러 내가 J시에 왔었다. 아버지는 입맛이 없는지 내가 해서 내놓는 반찬마다 젓가락을 한번 대고는 말았다. 서울의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시장에 나가 산낙지를 사다 드리라고 했다. 산낙지요? 엄마는 아버지가 입맛이 없을 때 산낙지를 사다드리면 입맛을 되찾곤 했다고 알려주었다. 아버지의 입맛을 찾아주기 위해 버스를 타고 오거리 앞 시장통에서 내려 산낙지를 찾아다녔다. 생선가게를 몇군데나 돌아도 살아 있는 낙지는 없고 죽은 낙지뿐이었다. 엄마는 꼭 살아 있는 낙지여야 한다고 했다. 나는 생선가게마다 들러서 산낙지가 있느냐 묻고 다니다가 결국 실패했다. 그만 집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역전의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데 뜻밖에도 정류장 앞 횟집 수족관에 산낙지가 있었다. 산낙지를 발견하고 그렇게 반가워해본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횟집 주인이 수족관에서 산낙지를 건져내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주었다. 산낙지가 얼마나 센 힘으로 꿈틀대는지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비닐봉지가 요동을 쳤다. 비닐봉지를 뚫고 산낙지가 튀어나올까봐 바싹 긴장해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던 기억. 아버지는 내가 사온 산낙지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아무 말 없이 받아들고 부엌으로 갔다. 도마 위에 산낙지를 올려놓은 다음 한 손으로 잡아서 단숨에 내장을 제거했다. 아버지의 손놀림은 경쾌하기까지 했다. 낙지는 내장을 제거했는데도 빨판이 꿈틀거렸다. 아버지는 산낙지를 통째로 초장에 찍어 입에 넣고 씹었다. 내가 우두커니 아버지를 바라보자 아버지는 낙지를 도마 위에 내려놓고 자디잘게 잘라 깨와 참기름으로 양념을 해서 내 앞으로 밀어주며 먹으라고 했다. 엄마 말대로 입맛 없어하던 아버지는 산낙지를 맛있게 먹었다. 어찌나 맛있게 씹는지 나도 아버지를 따라 잘린 낙지를 입안에 넣어보다가 뺨 안쪽이 낙지에 물려 뜯어지는 것 같아 기겁을 하며 내뱉었다. 덩달아 배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입안에 옅게 남아 있는 깨소금과 참기름까지 죄다 뱉어내는 나를 보고 아버지가 못 먹겠냐?고 물었다. 꿈틀꿈틀거려서요, 내가 대답하자 아버지는 낙지를 뜨거운 물에 데쳐서 내 앞에 내주었다. 아버지는 산낙지를, 나는 데친 낙지를 먹었던 그런 초여름날이 있긴 있었다. 그 이후로 아버지와 산낙지를 먹은 기억이 없는데 아버지는 어떻게 내가 산낙지를 좋아한다 기억하고 있는지. 그렇다고 모처럼 생기를 띤 얼굴로 나를 위해 산낙지를 사러 함께 시장통에 나온 아버지에게 나는 산낙지를 먹어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게 야박하게 느껴져서 아버지가 산낙지를 고르고 값을 치르는 것을 멀거니 바라만 봤다. 생선가게에서는 예전처럼 산낙지를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주는 게 아니라 집에 가서 펼쳐놓고 먹기만 하면 되도록 손질하고 잘게 자르기까지 해서 투명한 플라스틱 통에 담아주었다. 횟집도 아닌데 생마늘과 초고추장까지 챙겨주었다. 집에 돌아와서 산낙지를 오목한 접시에 옮겨 담고 밭에서 솎아온 상추도 씻어 큰 접시에 담고 그 옆에 생마늘과 초고추장을 놓아서 아버지 앞으로 밀었다. 아버지가 못 씹으실 텐데, 하면서도. 아버지는 너 먹으라는 것이제, 했다. 아버지는 정말 내가 산낙지를 좋아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기억이 왜곡된 것일까. 이렇게 왜곡되는 것이 기억인데 내가 사실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들을 계속 믿어도 될까. 나는 딴생각을 하며 그때까지도 살아서 접시 위에서 몸을 뒤틀며 꿈틀거리는 잘린 산낙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살아가는 일의 얼마간은 왜곡과 오해로 이루어졌다는 생각. 그것을 탓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좋고 나쁜 일로 나눌 수 있는 일이 아닐 테니. 왜곡되고 오해할 수 있었기에 건너올 수 있는 순간들도 있었을 테니까. 나는 불현듯 아버지가 접시 위에서 꿈틀거리는 산낙지를 응시하다가 또 울까봐서 낙지죽 끓여드릴 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하고는 얼른 식탁 의자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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