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회
비어 있지 않음
작은 컨테이너부스 안에는 의자가 하나뿐이었다. 누군가 버리고 간 듯한 낡은 사무용 의자였다. 사장 의자로는 어림도 없었을 테고 부장 의자도 아니었을 테고 그냥 보통 의자였겠구나, 보통 직원의 의자,라고 지연은 생각했다.
“여기 잠깐 앉아도 돼요?”
“아, 네.”
오며 가며 서로 얼굴은 몇번 보았지만 대화를 나눈 것은 그날 아침이 처음이었다. 질문은 지연이 했고 들릴락 말락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 쪽은 민규였다. 주차부스 안에 엉거주춤 선 자세로 책을 읽고 있던 민규는 책을 손에 그대로 쥔 채 황황히 부스 밖으로 나갔다. 지연은 의자에 앉았다. 등을 기대보았다. 제법 편안했다. 그때 민규가 뭔가를 잊었다는 듯이 들어와 선풍기를 틀어주고는 다시 나갔다. 서늘한 선풍기 바람이 이마에 닿았다. 그제야 지연은 아까 조금 더웠다는 것을 알았다. 조금 덥고, 고요한 아침이었다. 곧 밍밍하고 고단한 하루가 몰려올 것이었다.
민규는 부스에 몇미터 떨어져 선 채로 책을 읽고 있었다. 표지는 보이지 않아서 무슨 책을 읽는지 알 수 없었다. 판형이 크지 않은데다 글자가 빽빽한 것으로 보아 소설책인 것 같다고 지연은 생각했다. 그녀는 그때 민규가 자신의 의자를 잠시 양보했다고 짐작했다. 그녀의 짐작은 틀렸다. 그는 눈앞에 빈 의자가 하나뿐이라면 절대로 앉지 않는 사람이었다. 조금 후에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누군가가 나타날까봐서였다. 착해서가 아니었다. 곤란한 상황에 닥쳤을 때 지을 표정에 대해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 없는 것은 아예 시도하려 하지 않았다.
그때의 지연은 그것을 몰랐다.
그들은 같은 건물에서 일했다. 정확히 말하면 같은 건물을 위해 일했다. 도산대로사거리의 그 투명유리로 된 건물 1층에는 디저트까페가, 2층과 3층에는 이딸리안 레스토랑이, 4층과 5층에는 와인바가 있었다. 지연이 일하는 곳은 1층이었고, 민규가 일하는 곳은 1층 출입구 앞의 주차부스였다. 지연은 매장의 알바였고, 민규는 주차관리요원이었다. 요원이라고 하면 잘 재단된 검정색 슈트에 선글라스를 끼고 비밀스러운 업무를 수행하는 모습이 떠오르지만 주차관리요원의 임무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를 포함한 그의 동료들은 주차관리 대행업체에서 파견된 계약직이었다. 그들의 근무복은 슈트가 아니라 ‘valet’라는 단어가 등판에 크게 새겨진 흰색 티셔츠였다.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지연은 그 단순한 근무복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그 심플한 옷에 비하면 자신의 유니폼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그것은 마치 중세의 메이드복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지연이 근무하는 까페의 사장에게는 프랑스와 벨기에의 유명한 요리학교에서 제빵을 공부하고 귀국한 딸이 있었다. 그들 부녀는 각종 타르트와 마카롱, 밀푀유와 무스케이크 등의 프랑스식 디저트로 메뉴를 준비하면서 매장의 인테리어도 파리 스타일로 꾸미고 싶어했다. 벽과 바닥재, 타일 같은 것은 심플하게 흰색으로 하고, 가구와 조명은 우아한 스타일로 배치하는 것을 모던클래식 스타일이라 부른다는 것을 지연은 그곳에서 일하면서 처음 알았다.
직원들 역시 매장의 중심 오브제였다. 빠띠시에 외의 모든 직원은 젊은 여성으로만 뽑았는데, 면접에 합격한 직원들은 모두 신장 160~162cm에 마른 체형, 양순한 인상의 소유자들이었다. 언뜻 사촌자매들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그래야 고객들이 위압감을 느끼지 않고 편안하게 그 공간에서 쉴 수 있다는 것이 사장의 믿음이었다. 첫날, 지연은 어깨 부분을 과장되게 부풀린 흰색 원피스와 레이스가 달린 초콜릿색 앞치마를 유니폼으로 지급받았다. 앞머리는 올백으로 단정하게 빗어 넘겨 하나로 묶고, 머릿수건을 써야 했다.
매장 안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고객보다 높은 데시벨의 목소리로 말하면 안 되었다. 나직하되 상냥한 음성으로. 그것이 고객 응대의 기본 요건이었다.
- 분단을 넘는 학교 - 2021년 9월 29일
- 병원 노동자 파업의 정치경제 - 2021년 9월 27일
- 아프간 둘러싼 강대국의 책임을 생각한다 - 2021년 9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