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연재

11회

   밤에 나는 엄마 침대에서 자는 것을 포기하고 거실에 놓여 있는 아버지 침대 밑에 이부자리를 깔았다.

 

   한밤에 자다가 깨서 아버지를 찾아다닐 것 같은 느낌 때문에 아버지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순간 아버지가 침대에서 일어나 우두커니 혼자 앉아 있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침대 아래 어둠 속에서 바라보았다.

   ―자냐?

   ―네, 자요.

   ―잔다면서 대답을 허냐?

   ―그러게 말이에요, 어서 주무셔요.

   아버지는 조금 더 앉아 있다가 다시 돌아누웠다. 아버지가 돌아누운 벽 위쪽엔 나와 큰오빠를 시작으로 내 형제들이 학사모를 쓰고 찍은 사진들이 나란히 걸려 있다. 어둠 속에서 아버지는 아마도 큰오빠의 사진을 시작으로 막내의 사진까지 일별하고 있을 것이다. 나도 아버지 등 뒤에서 큰오빠의 학사모 쓴 사진을 올려다봤다. 큰오빠 옆에 작은오빠, 작은오빠 옆에 셋째오빠, 셋째오빠 옆에 내 사진이 걸려 있어야 하는데 그 자리는 비어 있다. 다음으로 여동생, 여동생 옆에 남동생…… 94년인지 95년에 이 집을 새로 지었을 때 아버지는 맨 먼저 저 자리에 우리 형제들이 학사모를 쓴 사진을 직접 못질을 해서 걸었다. 그사이에 기념해야 할 수많은 사진들이 생겼으나 아버지는 형제들이 학사모를 쓰고 찍은 사진들만 벽에 걸어두었다. 그 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우리 형제들은 나이도 들지 않고 항상 그때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큰오빠가 다니던 회사에서 은퇴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나는 아버지가 왜 저 사진들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놓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제는 이 지상에 없는 옛집에 맨 처음 큰오빠의 사진이 걸렸을 때는 장남이 대학을 졸업한 게 대견해서겠지 했는데 몇년 텀으로 아래 오빠들의 학사모를 쓴 사진이 나란나란 벽에 걸렸다. 아버지의 장벽은 넷째인 나였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아버지의 요청을 거부했다. 나는 사진을 찍기 싫었다. 졸업 앨범을 만드느라 한번은 찍게 되어 있었지만 크게 인화해 프레임에 넣어서 아버지에게 보내기가 싫었다. 무슨 학사모를 쓰고 찍은 사진들을 벽에 걸어놓는담, 이런 마음이었다. 집에 온 방문객들은 맨 먼저 그 사진들을 보게 되어 있었는데 그것도 싫었다. 방문객들은 학사모를 쓰고 찍은 형제들의 사진을 보며 제각기 한마디씩 했다. 자식농사를 잘 지었다고도 했고 누가 누구를 닮았다고도 했는데 그런 품평을 듣는 일도 거북했다. 나는 내가 대학을 졸업한 후 아버지가 학사모를 쓰고 찍은 사진을 요구할 때마다 번번이 잊은 척, 어느 때는 노골적으로, 뭐하러 그걸 걸어놓고 봐요, 촌스럽게, 하면서 짜증을 냈다. 내가 안 보내면 잊겠지, 생각했으나 아버지도 내게서 학사모를 쓰고 찍은 사진을 받아내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아버지는 말수가 적은 분이었다. 지금도 아버지가 얼마나 말수가 적은 분인지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어느 해 겨울방학에 우리 집에 와서 한달쯤 지내다 간 외사촌이, 고모부는 내가 한달이나 고모네에서 지내는 동안 갔을 때 왔냐? 하시고 떠날 때 가냐? 총 두마디를 했다며 웃곤 했다. 그랬던 아버지가 나를 볼 때마다 학사모를 쓰고 찍은 사진을 보내달라는 얘기를 꺼냈다가 모른 척하는 내 마음을 바꿔보려고 수다쟁이가 될 때도 있었다. 덕분에 알게 된 것도 있다. 내겐 초등학교 졸업 앨범에 있는 사진이 세상에서 두번째 찍은 사진이고 첫번째는 백일 때 찍은 가족 사진이다. 백일 때 찍은 사진 속에서 아버지는 막 어딘가로 튀어나가려는 셋째오빠를 붙잡고 있고 그 옆에는 저고리를 입고 가는 빗으로 머리카락을 빗고 빗어 부풀려 볼륨을 만든 머리스타일을 한 엄마 품에 백일 된 내가 안겨 있다. 큰오빠와 둘째오빠는 의젓하게 부모님 양옆에 서 있다. 만약에 그때 그 사진을 찍지 않았다면 초등학교 앨범 속의 졸업 사진이 내 첫 사진이었을 것이다. 사진 찍기가 쉽지 않았던 시절에 읍내의 사진관에까지 가서 내 백일 사진을 찍은 그날에 대한 이야기를 아버지는 어제 일처럼 얘기했다. 내가 생각해도 내 백일 사진은 뜻밖의 사진이긴 했다. 오빠들 백일 사진도 없는데 내 백일 사진이 존재했으니까. 아버지는 미안하다고 했다. 당시에 사진 찍는 비용이 많이 들어서 백일날 내 독사진을 못 찍고 가족 사진만 찍었다면서. 아버지는 무슨 큰 비밀이라도 알려주듯 너가 태어났으니까 이제 아이는 그만 낳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아들 셋에 딸 하나면 되었지, 생각했다고. 아버지가 무척 진지하게 얘기해서 나는 아버지! 그럼 이삐와 막내는 가족계획의 실패로 태어난 아이들이에요? 하며 크게 웃었다. 이삐는 여동생을 부르는 애칭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지 말라며 주위를 살피기까지 했다. 이삐와 막내가 들을까봐 염려하는 표정으로. 아무튼 아버지 말에 따르면 내 백일에 맞춰서 처음 가족 사진을 찍게 된 배경은 오빠 셋을 두고 태어난 넷째인 내가 딸이어서 아버지가 만족했고 처음으로 가족 사진을 찍을 생각까지 했다는 것이었다. 니가 딸이어서 참말 좋았다, 이제 더는 아무것도 얻지 않아도 되겄다, 싶었어. 아버지의 이런 마음을 처음 듣는 건 아니었다. 엄마도 가끔 내가 태어났을 때 가장 기뻐한 사람이 아버지였다고 했다. 엄마의 출산 소식을 듣고 동네 사람들이 아들인가 딸인가 물으면 아버지의 얼굴이 환해지며 딸이어라오! 크게 대답했다고. 내 백일 때 오빠들에게 새 옷을 입히고 엄마는 거울 앞에서 머리를 부풀리고 읍내 사진관에 가서 가족 사진을 찍은 것은 다 내가 딸이어서였다고. 내가 학사모를 쓰고 찍은 사진을 받아내기 위해 아버지는 사진과 관련된 얘기라면 무엇이든 했으나 내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한번은 아버지에게 나는 엄밀히 말해서 2년제 전문대를 다녔기 때문에 학사가 아니에요,라고 항변까지 했다. 그러니 아버지가 내게 학사모를 쓰고 찍은 사진을 요구하는 것은 나에게 반칙을 하라는 것과 같다고. 잠시 말문이 막히는 듯했던 아버지는 그러면 지금이라도 편입해서 4년제를 마쳐라, 했다. 평생 시골에서 농부로 살아온 아버지에게서 ‘편입’이라는 단어를 듣게 되어 나는 놀란 얼굴로 아버지를 멀거니 바라봤다. 편입이라는 단어를 아버지가 알고 있을 줄이야. 그럼에도 나는 갖은 핑계를 대며 학사모를 쓰고 찍은 사진을 아버지에게 보내지 않았고 그사이에 여동생과 남동생이 대학을 졸업했다. 아버지는 동생들에게 사진을 받아 벽에 걸면서도 내 사진을 포기하지 않고 내 자리를 비워놓았다. 아버지는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십년이 지날 때까지도, 서울에 오게 될 때, 혹은 내가 시골집에 가게 될 때마다 잊지 않고 사진을 찍어 보내달라 했다. 보다 못한 큰오빠가, 아버지가 저렇게까지 원하시는데 딸로서 그거 하나 못 들어주느냐고 길게 말했다. 계속 다른 곳이나 바라보며 못 들은 척하는 나에게 큰오빠가 일갈을 했다. 그것이 아버지 인생 아니냐, 너는 글을 쓴다는 사람이 사람 마음을 그렇게 모르냐? 아버지 마음도 제대로 모르면서 무슨 글을 쓴다고……

 

   아버지 인생? 우리들 학사모 쓰고 찍은 사진이?

 

   나는 그때야 아버지가 왜 우리 형제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학사모를 쓰고 찍은 사진을 언제나 바라볼 수 있는 곳에 걸어놓고 싶어하는가에 대해 조금 납득이 가서 맥이 빠졌다. 나는 학교를 졸업한 지 몇년이나 지난 후에야 사진관에 가서 머리를 가지런하게 빗고 학사모를 빌려 쓰고 사진을 찍기는 했다. 그러고도 끝내 아버지에게 보내드리지 않고 한구석에 밀어두었다. 그때라도 보내드렸으면 좋았을걸. 뒤늦게 후회. 그 사진은 지금 어디에 세워져 있는지. 버리진 않았으니 어느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 것이다. 나는 어둠 속에서 지금도 비어 있는, 내 사진이 걸릴 자리를 짚어보았다.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아버지가 그토록 원하는 것을 나는 그토록 들어주지 않았을까. 쓰라림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침대 위의 아버지가 누워 있는 모습을 그대로 따라서 거실 바닥에 모로 누웠다. 아버지는 벽을 보고 나는 아버지 등을 보며 모로 누워 있으니 침대 위의 아버지와 바닥의 나 사이에 계단이 놓인 것 같은 형국이다. 이제는 사진을 보내라고 채근할 마음조차도 없어진 것일까? 어둠 속의 아버지 뒷등이 푹 꺼져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