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회
승엽이 보거라
몸은 건강허냐?
기픈 소식 전한다
어제 소 한마리가 송아지를 나앗따
세쌍둥이를 나앗따
이런 일은 업는 일이라 짐작도 못햇따
여태 소를 길러봣지마는 처음 잇는 일이다
가끔 두 쌍둥이는 나온다
수태기간 동안 소의 자태가 워낙 달라서 혹시나 쌍둥이려나 생각은 햇다마는
세쌍둥이가 나올 거시라고는 짐작도 못햇따
너에게 얼릉 알리고자 이러케 쓴다
한마리씩 세마리가 십여분 사이를 두고 나왓따
한마리 때보다 몸집은 작다마는 세마리 다 건강하다 처음이라 당황햇다마는
너에게 알리느라 쓰다보니 말할 거 업시 기쁘다
송아지는 어미 배에서 나오면 바로 거름마를 한다
세쌍둥이도 그랫따
사슴 가타따
어미가 태반에 묻은 것을 다 핱아주기도 전에 몸을 일으키더니
비척비척 걸어따
세마리가 한마리씩 다리를 피고 일어서는데 웃슴이 터져 혼낫다
승엽아
나는 니가 결혼하믄서 내게 햇던 말은 잊지 안고 잇다
소 여덟마리를 내게 사주면서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게 되니 이 소들을 길러서 동생들 학비에 보탰스면 한다고 햇지 낮에는 동사무소에 다니고 밤에는 대학에 다니고 대기업에 드러갈 때까지 일햇던 공무원 직의 퇴직금을 불린 돈이라고 햇다
나는 아버지 편지를 읽다가 말고 고개를 들었다. 머릿속에 쩡, 소리가 들리는 듯해 편지에서 눈길을 떼고 방문 바깥을 내다보았다. 빗소리 속에 천둥소리가 섞여 있다. 텃밭에 심어져 있는 채소들을 짓이기듯이 빗소리도 더 굵어졌다. 오빠가 결혼하면서 아버지에게 소를?
나로서는 여태 알지 못했던 일이다. 그러고 보니 오빠가 결혼한 후에 아버지가 여덟마리의 소를 기르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어떻게 소가 여덟마리씩이나 생겼는지에 대해 크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니. 나는 텃밭에서 세찬 비를 맞고 있는 담장 밑의 머윗잎이 된 기분이었다. 아버지가 큰오빠에게 미안해하던 마음 깊은 곳에 소 여덟마리가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다니.
마음이 안 조앗다
가난한 아비를 만나 이른 나이에 집을 떠나 생면부지의 타지에서 혼자 밥 끄리머고 살게 한 것도 모질라 혼인을 앞두고서도 기픈 시름에 잠겼쓸 너를 생각하면 늘 마음이 저리고 미안햇타
내가 할 수 있는 거슨 소의 숫자를 줄이지 안는 것이엇따
네가 사준 여덟마리에서 한마리도 줄이지 안으려고 노력햇따
경운기 타고 낙천이랑 소몰이 투쟁에 나간 것도 그래서엿다
나는 어쩌든지 간에 온전히 니가 소를 사주엇을 때 숫자를 지킬라고 햇따
늘이지는 못히도 줄이지는 말어야 한다 생각햇다
이제 세쌍둥이가 태어나스니 니 소는 여덟마리가 아니라 열한마리다
거그서 답답하고 울화가 치미면 생각하거라
여그에 니 소 열한마리가 잇다고
두릿두릿 눈 크게 뜨고 너를 기다리고 잇다고
그거시라도 힘이 되엇시믄 한다
늘 말햇드시 아비는 바라는 게 업따
하늘 아래 니가 건강하면 그것으로 되엇따
1990년 9월 4일
아버지가
아버지 전 상서
그동안 무탈하셨는지요?
소가 송아지를 세마리나 낳았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습니다. 세상에 그런 일도 있군요. 아버지 편지를 읽고 알아봤더니 수정란 이식을 실행해도 세쌍둥이를 얻기는 힘든 일이라고 합니다. 아버지께선 늘 그러셨던 것처럼 일반 인공수정을 했을 텐데 어떻게 세쌍둥이가 태어났을까요? 송아지 세마리가 비척비척 일어나서 걸어다니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즐겁습니다. 더구나 아버지께서 그리 기뻐하시니 제 마음도 그와 같습니다.
아버지.
새끼 한마리도 받기 쉽지 않았을 텐데 세마리를 차례로 받아냈을 아버지를 생각하니 자랑스럽습니다.
아버지.
우사의 소들은 제 소가 아니라 아버지 소입니다.
아버지의 우사에 소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든든하고 힘이 솟습니다. 저는 저희들을 대학까지 공부 시키는 것이 아버지 소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산밭을 팔아서 제 첫 대학 입학금을 마련해주셨을 때 돈을 받으며 저도 다짐했습니다. 어떻게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데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요.
아버지.
맞습니다. 저는 아래로 동생 다섯을 둔 시골 출신의 장남입니다. 결혼을 하면서 고민이 많았던 건 사실입니다. 아버지도 알고 계시듯이 서울이라는 곳은 돈의 개념이 시골과는 차이가 많이 나서 제가 결혼을 한다고 해서 헌이와 셋째를 분가시킬 만큼 여유롭지 않았습니다. 아내도 동생 많은 시골 출신의 장녀라 결혼 후에도 동생들과 함께 지내는 것을 이해해주었습니다.
아버지, 제게 미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그때 아버지가 소를 사게 도와드리는 것으로 동생들 학비를 마련해야 한다는 부담으로부터 빠져나온 것입니다. 그깟 소 몇마리로 말입니다. 제게 이런 속셈이 있었다는 걸 아버지가 아셨을 턱이 없겠지요.
아버지.
제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제 아버지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J시에서 살 때 사람들이 가끔 제가 뉘 집 자식인지 알고 싶어 아버지 존함을 물을 때가 있었는데 아버지 함자를 대면 모두들 아…… 하면서 아버지를 대하듯이 제게 잘해주었습니다. 아버지 함자를 댈 때면 바로 친절해지고 다정해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버지가 제 아버지라 항상 뿌듯했습니다. 그런 아버지이니 충분히 소를 길러서 그렇게 하실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실행할 수 있었던 일입니다. 그렇게 저는 자유로워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텃밭에 우사까지 따로 지으시고 정부시책에 따른 지원을 받아 소를 수십마리로 늘리고 아침저녁으로 쇠스랑을 들거나 장화를 신고 허리를 굽히고 소들이 내뿜는 더운 입김과 소들이 싸놓은 똥 속에서 일하시는 모습을 뵙고 돌아올 때면 소를 기르도록 권유한 저 때문에 아버지가 저 고생인가 싶어서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시는지 저는 알고 있습니다. 등록금이 셋이 겹칠 때도 있었는데 아버지께서 등록금을 틀림없이 맞춰주실 때면 저는 아버지가 존경스러웠습니다. 그렇게 지키신 소들인데 제 소라니요.
제가 근무하는 곳은 작업현장이 아니라 트리폴리에 있는 본부입니다. 여기서 하는 일의 대부분이 서울의 회사와 연락을 하는 것이라 크게 어려운 일은 없어서 저는 비교적 적응을 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1990년 9월 8일
승엽 올림
승엽이 보아라
몸은 건강하냐
추석이 며칠 남지 안엇다
새복이먼 바람이 차서 이제 이불을 찾는다
여름에 여기 살던 새들이 이제 딴 고스로 떠나려는지 부산해져따
니가 뭐라고 해도 이 소들은 니 소다
안타깝게도 세 송아지 중의 한마리는 눈이 멀었시야
어찌 자꾸 아프로 나가질 모터고 벽 쪽으로 가서 머리를 찌어싸길래 살펴보니 아플 못 보네
아피 안 보이니 젖꼭지도 제대로 못 물어 세마리가 똑가치 태어나써도 눈먼 놈은 벌새 몸피가 딴 두 송아지와 차등이 난다
아플 못 보니 나도 자꾸 신경이 쓰이는데 어미도 그런지 세 새끼 중에 눈먼 놈만 혓바닥으로 부지런히 핥아준다 아플 못 봐도 금시 자랄 것이다
너흐들이 그랬던 거처럼
아버지는 아무것도 바라는 거시 업다
하늘 아래 니 몸 건강하게 있다가 돌아오면 된다
어머니가 여페서 추석에 송편이나 먹냐고 무러보라 하네
어머니가 여그 걱정은 당최 말고 마음 편이 지내라고 하네
1990년 9월 12일
아버지가
아버지 전 상서
오늘은 기쁜 소식을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회사의 회장님이 서울에서 이곳으로 오는 비행기를 일주일에 한번 오갈 수 있게 주선했는데 성사되었다고 합니다. 그동안은 비행기 착륙 날짜가 들쭉날쭉했습니다. 항공회사에서 최소한 일주일에 한번 이곳으로 비행기를 띄우지 않으면 회장님이 회사에서 전세기를 내서라도 일주일에 한번은 서울과 트리폴리를 오가게 하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이제 일주일에 한번은 서울에서 이곳으로 비행기가 오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모두들 반기는 이유는 공사에 필요한 물류 조달이 원활해진 것도 있고 서울의 본사에서 한국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식료품들을 일주일에 한번씩 이곳으로 보낸다 해서입니다. 충분한 양은 아니겠으나 한국 음식 재료들이 일주일마다 한번씩 조달되면 한국 음식 먹는 날이 더 많아질 것이라 모두들 기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사의 해외관리부 직원과 연락을 했는데 이번에 추석을 맞이해서 회사에서 이곳으로 송편을 보낸다고 합니다. 일주일에 한번은 취항할 수 있게 되어서 가능한 일입니다. 동료들이 저보고 송편 먹을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날짜로 보면 추석 당일은 아니지만 그 무렵에 이곳에 송편이 도착한다고 합니다. 냉동으로 보낼 것이기 때문에 언 채로 오겠지만 이곳 숙소의 조리사들이 따뜻하게 쪄서 내줄 것입니다. 그러니 어머니께 여기서도 추석에 송편을 먹을 수 있으니 염려하시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아버지.
음식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얘기인데요.
다음 달 일요일에 제가 여기 동료들을 위해 비빔밥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조리사가 여기로 파견근무를 나와서 이년이 되도록 시내 구경을 한번 못 했답니다. 그날은 우리가 알아서 식사를 할 테니 관광을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날 점심은 신참인 제가 비빔밥을 만들어 돌리는 것으로 책임지겠다고까지 해버렸습니다. 사실 은근 걱정이 됩니다. 제가 비빔밥을 만들겠다고 한 건 아버지께서 만들어주신 비빔밥을 맛있게 먹어본 경험자로서 한 말이었는데 곰곰 생각해보니 먹어만 봤지 만들어본 적이 없지 뭔가요. 이곳은 더운 나라인데다 한국에서처럼 채소가 풍부한 것도 아니라는 걸 간과했습니다. 쓰다보니 아버지께서 비벼주신 열무비빔밥이 생각나 침이 고입니다. 물정도 모른 채 장담을 해놓고 보니 체한 기분이 듭니다.
아버지께서 비빔밥을 만드실 때 비법 같은 게 있었는지요?
편지를 쓰다가 웃었습니다.
제가 아버지께 별걸 다 묻습니다.
저는 잘 지내고 있으니 제 걱정은 마십시오.
그럼 늘 평안하시길.
1990년 9월 16일
승엽 올림
승엽이 보거라
회사 회장님은 참 힘이 쎄구나
마음 머그먼 업던 비행기도 생기기도 하는 거 보며는 말이다
너가 있는 고스로 일주일에 한번은 서울 비행기가 간다니 안시미 된다 그 비행기에 송편도 실고 간다니 조은 새상이다
비빔밥 만드는 비법이라야 빤하다
너 어머니가 내가 밥을 비빌 때만 참기름 병을 따주엇기 때문이다
그때는 참기름이 귀해서 한방울만 써도 고소한 냄시가 확 퍼젓는데
요새 참기름은 그만 모타다
기름 짜는 방식이 달라져서 그런지도 모린다
니가 비빔밥을 맛나게 만들라먼
참기름이 필수인데 그곳에 참기름이 잇느냐?
나는 읽던 편지를 내려놓았다.
그랬다. 어렸을 때 아버지는 자주 우리들에게 음식을 만들어주었다. 자장면도 만들어주었고 양념을 바른 돼지고기를 석쇠에 구워주기도 했다. 모두들 모여 밥을 먹어야 하는데 마땅찮은 반찬이 없을 때 가끔 엄마가 나서서 아버지에게 밥을 비비게 했던 것 같기도. 엄마도 큰오빠처럼 말했다. 당신이 밥을 비비면 다른 사람이 비비는 것보다 맛있다고. 엄마는 집에서 가장 큰 양푼을 아버지 앞에 놓고 밥을 다 붓고 봄이면 상추를 여름이면 열무를 가을엔 고구마순 김치를 겨울이면 묵은 김치를 잘라 밥 위에 가득 올려주었다. 아버지는 묵묵히 밥을 비볐다. 숟가락으로 고추장을 떠 넣고 매운 고추를 썰어 넣고 끓인 강된장이 있을 땐 그것도 간 맞을 만큼 밥 위에 올리고 어린 열무가 지나치게 으깨지겠다 싶을 땐 숟가락을 내려놓고 젓가락으로만 밥을 휘저어 비볐다. 그랬구나. 아버지가 밥을 비비면 맛이 있어서 둘러앉은 식구들 모두 비빔밥이 다 떨어질라 바삐 수저질을 했었는데 그게 아버지가 밥을 비빌 때만 엄마가 참기름을 내주어서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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